중후장대 사업 지원 벗어나 벤처 육성 플랫폼 구축
직접 투자·대출은 물론 투자 유치 주선도

[비즈니스 포커스]
‘넥스트 유니콘 키운다’…스타트업 ‘키다리 아저씨’ 된 KDB산업은행
KDB산업은행(이하 산업은행)이 벤처‧스타트업 육성과 지원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스타트업과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가 1조원 이상인 스타트업) 육성에서부터 생태계 조성에 이르기까지 벤처기업 성장 전 단계를 지원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혁신 스타트업에 대규모 투자와 맞춤형 금융을 제공하는 데 힘을 쏟으며 시장의 큰손으로 자리매김했다.

중후장대 산업 지원과 구조 조정 전문 은행의 대명사로 불렸던 산업은행에 본격적인 변화의 바람을 가져 온 주인공은 이동걸 회장이다. “경제가 잘 돌아가기 위해선 예비 유니콘 기업을 발굴·육성해야 하는데 해외 자본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선 자본력이 있는 산업은행이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이 회장의 평소 지론이다.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밴처캐피털(VC)을 직접 찾아가 현장을 탐색하기도 하고 첫 임기 마지막 일정으로 산업은행이 투자한 벤처기업의 공장을 방문할 정도로 혁신 기업 지원에 확고한 의지를 보여 왔다.

이 회장의 뚝심에 산업은행은 출자 기관을 넘어 동료 벤처 투자사 중 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유망 투자처를 먼저 발굴해 업계에 공유하거나 기존 VC 투자 기업에 대규모 후속 투자자로 나서는 일이 많아졌다. 과거엔 수백억원의 후속 투자를 해외 VC나 사모펀드(PE) 등이 담당했다면 이젠 산업은행이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조직 개편부터 벤처 생태계 구축까지
이 회장은 4차 산업혁명과 혁신 성장을 경영 목표로 잡고 조직 개편에 칼을 빼들었다. 2017년 9월 취임 후 3개월 만에 ‘혁신성장금융본부’를 출범시켰다. 혁신 성장에 대한 정책 방향과 금융 지원 연계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1년 뒤 산업은행의 무게 추를 기업 구조 조정에서 혁신 기업 지원으로 옮겼다. 구조조정부문을 구조조정본부로 축소하는 대신 기존 혁신성장금융본부를 혁신성장금융부문으로 승격시켰다. 2년 뒤인 2019년 12월 혁신성장금융부문에 ‘벤처금융본부’를 설치하고 ‘벤처기술금융실’, ‘스케일업금융실’, ‘넥스트라운드실’ 등 3개 부서를 뒀다.

스케일업금융실은 예비 유니콘 기업 전담 부서로, 유니콘 가능성이 보이는 기업에 대한 대형 투·융자 복합 금융 활성화를 추진한다. 그간 한국에서 유니콘이 된 기업 대부분이 해외에서 투자받았다는 점을 고려해 산업은행이 한국의 예비 유니콘 기업 투자에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넥스트라운드실에선 유망 스타트업·벤처기업과 투자자들을 연결하는 ‘넥스트라운드’ 플랫폼을 운영한다. 매년 1회 열리는 스타트업 박람회 ‘넥스트라이즈’의 홍보와 네트워크 구축도 맡고 있다.

이 회장은 전임자가 시작한 넥스트라운드(투자 유치 네트워크)를 발전적으로 계승했고 여기에 넥스트원(기업 육성)과 넥스트라이즈(박람회)를 구축했다. 첫 임기 3년간 유망 스타트업 발굴에서 유니콘 기업 육성까지 관여하는 벤처 생태계 플랫폼을 완성한 것이다.

특히 넥스트라운드는 산업은행이 그간 꾸준히 벤처‧스타트업 육성에 힘써 왔다는 것을 숫자로 보여준다. 2016년 8월 첫발을 뗀 넥스트라운드는 출범한 지 1년 만에 총 2006억원의 투자 유치(66개 기업)에 성공했다. 3년 만인 2019년 투자 유치는 1조원(250개 기업)을 넘어섰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진 지난해에도 7410억원(108개 기업) 투자 유치에 성공해 누적 2조원을 돌파했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211개 기업이 기업설명회(IR)를 열고 그중 49개 기업이 6146억원의 투자 유치 성과를 올렸다. 지난해 투자 유치금의 83%를 이미 달성한 셈이다. 현재 누적 투자 유치금이 2조8064억원인 점을 고려하면 올해 3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실제 넥스트라운드는 2018년부터 전국 주요 거점 도시를 돌면서 지역 스타트업과 투자자 간 만남의 장을 주선, 현지 스타트업이 자생력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엔 온라인 서비스도 오픈해 접근성을 높였다. 오프라인 라운드에 직접 참가하지 못하는 스타트업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자사의 비즈니스와 기술 등을 소개할 수 있다. 또 자체 제작한 IR이나 홍보(PR) 영상 등을 업로드해 회사를 알릴 수 있다.

넥스트원도 출범 1년이 채 안 됐지만 괄목할 만한 사업 성과를 올렸다. 액셀러레이팅(기업 육성)을 위해 지난해 7월 15개 스타트업을 1기로 선발했는데 절반 이상이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올해도 상반기에 2기 운영을 완료했고 하반기에 3기 운영을 진행한다.

올해로 3회 차를 맞은 넥스트라이즈는 산업은행이 공들이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유망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와 국내외 기업의 사업 협력 지원을 목적으로 마련된 행사인데 스타트업과 VC는 물론 삼성·현대차·아마존 등 국내외 대기업이 한자리에 모여 일대일 미팅을 연다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 넥스트라이즈는 2019년 처음 막을 올릴 때만 해도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산업은행을 비롯해 무역협회와 벤처업계 관계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행사가 일회성에 그칠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우려가 무색하게 넥스트라이즈는 명실상부한 한국의 최대 스타트업 박람회로 자리 잡았다. 올해는 주요 참석자로 김부겸 국무총리가 행사장을 방문하면서 무게감이 더해졌다. 기술 협업 관계를 맺거나 홍보가 쉽지 않은 스타트업으로선 쟁쟁한 투자자들과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기술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주효했다. 이전엔 스타트업을 위한 대규모 네트워크의 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산업은행은 넥스트라이즈를 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대의 스타트업 행사로 키울 계획이다. “넥스트라이즈가 미국의 세계 가전 전시회(CES), 스페인의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와 같이 한국의 혁신 성장을 상징하는 국제적인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회장이 1회 개회식 당시 했던 말이다.
‘넥스트 유니콘 키운다’…스타트업 ‘키다리 아저씨’ 된 KDB산업은행
유망 스타트업 투자 주도
이 회장은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도 지원을 줄이기보다 투자와 융자를 확대해 왔다. 2018년 정부의 ‘혁신모험펀드 조성·운영 계획’에 따라 3년간 총 8조원을 목표로 시작된 성장지원펀드는 이미 지난해 목표치를 넘어섰고 올해 상반기 기준 9조9034억원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6월엔 토스를 운영하는 핀테크 업체 비바리퍼블리카에 1000억원의 투자를 결정했다. 핀테크 투자 중 역대 최대 규모다. 산업은행이 지난해 총 71개사에 5756억원을 투자했던 것을 보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토스 투자 건은 지난해 1월 신설된 스케일업금융실에서 주도했다. 스케일업금융실은 지난 한 해에만 카카오엔터프라이즈(1000억원), 프레시지(500억원), 리디(300억원), 지놈앤컴퍼니(200억원), 뷰노(90억원), 제주맥주(50억원) 등에 총 4800억원 정도를 지원(투자‧대출)했다. 그중 지놈앤컴퍼니·뷰노·제주맥주는 한국 증시 입성에 성공했다.

사실 유망 예비 유니콘을 두고 해외 유명 투자자들과 경쟁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산업은행이 이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투자와 대출 모두 가능했기 때문이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스타트업얼라이언스 이사장)는 “그동안 스타트업업계에선 VC는 투자를, 기술보증기금과 신용보증기금은 주로 대출을 담당했는데 산업은행이 직접 투자와 대출 등 종합 금융 서비스를 선보였다”며 “스타트업업계에서 산업은행을 주요 투자자로 주목하고 열렬히 환영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다만 일부에선 한국 VC의 투자 위축이 우려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산업은행의 직접 투자가 커지면서 한국의 VC로선 산업은행이 중요한 출자자이면서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한 상황”이라며 “최근 규모가 큰 펀드들이 많이 생기고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선 수백, 수천억원 정도를 투자할 수 있는 곳은 10곳 안팎”이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산업은행은 한국 스타트업의 해외 투자를 이끌어 내고 미국 주식 시장 상장까지 지원할 방침이다. 최근 미국 나스닥에 상장을 발표한 쿠팡과 같은 글로벌 유니콘을 길러 내겠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 실리콘밸리에 현지 법인을 설립하기 위한 개설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하반기 내 VC 자회사를 설립할 계획이다. 또 산업은행은 올해 1월 ‘뉴딜 벤처·스케일업 투·융자 프로그램’을 발표해 2025년까지 5년간 1조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