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생산 구조·비즈니스 모델 근본적 재편 필요한 시점

[스페셜 리포트]
에너지 대전환 시대, 길 잃은 한전…정승일 사장의 3가지 딜레마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의 21대 사장에 정승일 사장이 취임했다. 정 사장은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산업·에너지·무역 등 3대 업무를 두루 섭렵한 에너지 전문가다. 2020년 11월까지는 산업부 차관을 지냈다.

한전은 탄소 중립 시대를 맞아 전력 산업의 대전환점에서 변화와 혁신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 최대 전력 공기업의 수장인 정 사장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만만치 않아 험로가 예상된다.

한전은 정부의 에너지 전환 정책에 발맞춰 신재생에너지 보급 확대의 첨병 역할을 해야 한다. 전기요금 현실화를 통한 적자 해소도 시급하다. 가장 큰 과제는 기업성과 공공성의 조화를 찾는 것이다.

한전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국정 과제를 이행해야 하는 공기업인 동시에 뉴욕 증시에 상장된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주주의 이익도 대변해야 한다. 주식회사인 동시에 공기업인 정체성에서 한전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적자 누적으로 주주들의 손실이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적자와 주주 반발을 감내하면서 리스크가 수반되는 대규모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주도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한국에너지공과대학(한전공대) 설립 등 국책 사업들을 이행하는 이유다.

정 사장은 취임식에서 “탄소 중립이라는 에너지 산업 대전환기에 에너지 전 분야의 선제적 기술 혁신, 과감한 에너지 시스템의 전환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며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솔루션을 찾아 과감히 도전해야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정 사장이 맞닥뜨린 첫 과제는 전임인 김종갑 전 사장이 마무리하지 못한 전기요금 현실화였다. 정부와 한전이 2021년부터 연료비 연동제를 도입하기로 했고 정 사장이 산업부 차관을 지낸 관료 출신인 만큼 정부를 설득해 전기요금 인상을 끌어낼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결국 3분기 전기요금이 동결되면서 임기 초반부터 실적 부담을 안고 출발하게 됐다.
정승일 한국전력공사 사장 /한국전력공사 제공
정승일 한국전력공사 사장 /한국전력공사 제공
① 전기요금 현실화
연료비 연동제 정상화로 적자 해소


한전은 2020년 12월 전기요금 체계를 개편하면서 연료비 연동제를 새로 도입했다. 연료비 연동제는 전기 생산에 쓰이는 연료비 변동분을 전기요금에 주기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원유·천연가스·유연탄 등 발전 연료비가 상승하면 전기요금을 내리고 연료비가 하락하면 전기요금을 내리는 등 연료비에 따라 전기료가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구조다.

하지만 정부가 국제 유가 등 연료비 급등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 우려로 2분기에 이어 3분기에도 전기요금을 동결하면서 이 제도가 유명무실해졌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연료비 연동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폐지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전기요금은 2013년 11월 이후 한 번도 인상된 적이 없다. 정부는 2011년 7월에도 연료비 연동제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다가 고유가가 이어지며 도입을 미루다 결국 2014년 폐지된 바 있다.

한전은 올해 7∼9월분 최종 연료비 조정 단가를 2분기와 동일한 kWh당 마이너스 3원으로 적용하기로 했다고 6월 21일 밝혔다. 국제 유가 상승 등을 고려해 3분기에는 전기요금을 1kWh당 3원 정도 인상해야 했지만 결국 2분기에 이어 2개 분기 연속으로 전기요금 인상이 불발된 것이다.

정부는 한전에 “2020년 말부터 국제 연료 가격이 급격히 상승한 영향으로 3분기 연료비 조정 단가 조정 요인이 발생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와 2분기 이후 높은 물가 상승률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의 생활 안정을 도모할 필요성이 있다”며 “1분기 조정 단가 결정 시 발생한 미조정액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해 3분기 조정 단가는 2분기와 동일한 kWh당 3원 인하로 유지할 것”을 통보했다.
그래픽=윤석표 기자
그래픽=윤석표 기자
전기요금 인상 실패로 한전은 또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게 됐다. 한전은 2021년 1분기 매출액 15조753억원, 영업이익 5716억원을 올려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전기요금 동결로 2분기에 이어 3분기도 적자가 예상된다.

한전은 전기요금 인상 등의 수익 개선 방안은 요원하지만 돈을 써야 할 곳은 계속 늘고 있다. 정부의 ‘재생에너지 3020’ 이행 계획에 따라 한전이 발전 자회사들과 함께 투자해야 하는 금액은 약 120조원에 달한다.

세계적인 에너지 전환 흐름 속에서 한전도 신재생에너지 중심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전환해야 하지만 문제는 체질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비용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한전은 한국의 전력 시장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감축 의무를 부여받고 있다.

유재선 하나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이런 한전의 상황을 ‘굶으면서 하는 다이어트’에 빗대 ‘지방(탄소)을 감량하는 과정에서 동반되는 근손실(자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유 애널리스트는 “정책 비용은 꾸준히 늘어나는 가운데 정부의 재정지원 없이 자본이 조달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원가 인상분만큼의 판가 상승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하반기에도 현재와 같이 높은 연료비 수준이 유지되거나 상승 추세가 지속되면 4분기에는 연료비 변동분이 조정 단가에 반영되도록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4분기에는 요금이 인상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지만 업계에서는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전기요금을 인상하면 표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인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그래픽=윤석표 기자
그래픽=윤석표 기자
② 저탄소·친환경 중심 해외 사업 확대
‘탈석탄’으로 ESG 리스크 제거


정 사장은 에너지 전환 시대를 맞아 한전의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비즈니스 모델을 저탄소·친환경으로 전환하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도 본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 한전은 2020년 10월 ‘탈석탄’을 선언하고 ESG 경영에 힘쓰고 있다.

한전은 탈석탄 정책에 맞춰 해외 석탄 발전 사업 투자 중단 결정을 발표했다. 해외에서 석탄 화력 발전 사업을 추진하지 않는 대신 신재생에너지 사업과 가스 복합 사업에 집중한다는 전략이다. 석탄 발전이 ESG 리스크로 부각되고 있어 한전은 발전 자회사들과 함께 석탄 화력 발전에서 신재생에너지 발전으로의 전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다만 한전은 해외에서 추진 중인 4건의 석탄 화력 발전 사업 가운데 인도네시아 자바 9·10, 베트남 붕앙2 사업은 상대국 정부와 사업 파트너들과의 관계, 한국 기업의 동반 진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나머지 2건인 필리핀 팡가시난 화력 발전 사업과 남아프리카공화국 타바메시 사업은 중단을 검토하고 있다. 2050년 이후 한전이 운영하는 해외 석탄 화력 발전 사업은 모두 종료될 예정이다.

문 대통령이 4월 22일 기후정상회의에서 신규 해외 석탄 발전 사업에 대한 공적 금융 지원 중단을 천명함에 따라 석탄 발전 회사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글로벌 기관투자가들로부터 투자 배제 대상에 오를 수도 있다.

한전은 해외 석탄 화력 발전 사업에 대규모 투자하고 있다는 이유로 네덜란드 공적연금을 비롯한 글로벌 주요 연기금이 투자금을 잇달아 회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도 이 같은 이유로 투자 중단을 경고한 바 있다.

ESG를 도외시하면 사업은 물론이고 자금 조달도 불가능해질 수 있다. ESG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서는 투자를 배제하거나 투자 기업에 대한 주주권 행사도 느는 추세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ESG 투자 자산 규모는 지난해 40조5000억 달러(약 4경6020조원) 수준으로 2012년 대비 약 3배 넘게 증가했다. 유럽과 미국이 각각 46%, 39%를 차지해 글로벌 투자의 85%를 점유하고 있다.

한전은 석탄 발전의 대안으로 가스 복합 사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한전은 필리핀 일리한(1200MW), 아랍에미리트 슈웨이핫S3(1600MW) 등 해외 가스 복합 발전소를 다수 운영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풀라우인다(1200MW)는 2024년 1월부터 상업 운전을 개시한다. 한전과 발전 자회사들은 2023년까지 기술을 개발해 2024년부터 실증 시험을 거쳐 신규 액화천연가스(LNG) 복합 화력에 적용하거나 기존 설비를 대체할 계획이다.
전북 부안군 위도 고창 구시포 인근 해상의 전북 서남권 해상풍력 실증단지  /한국경제신문
전북 부안군 위도 고창 구시포 인근 해상의 전북 서남권 해상풍력 실증단지 /한국경제신문
③ 신재생에너지 보급 확대
‘해상 풍력’에서 미래 먹거리 창출


한전은 정부 정책에 따라 신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를 주도하는 첨병 역할을 해야 한다. 한전이 신사업으로 키우고 있는 전기차 충전 인프라 구축 사업도 신재생에너지 보급의 일환이다.

한전은 전국 9800여 개의 충전 인프라를 바탕으로 민간 기업과 협업해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있다. SK에너지·SK렌터카·티맵모빌리티·GS칼텍스 등과 전기차 충전 편의를 개선하고 전기차 보급을 활성화하기 위한 서비스 개발을 위해 협력하고 있다.

정부의 ‘2050 탄소 중립’ 정책에 발맞추기 위한 전기사업법 개정안 통과도 정 사장의 손에 달렸다. 정부는 ‘재생에너지 3020’ 정책에 따라 2030년까지 해상 풍력 비율을 12GW까지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전은 정부의 그린 뉴딜 정책과 에너지 전환 흐름에 발맞춰 해상 풍력 발전을 새로운 수익원으로 키우고 있다. 한전은 2001년 전력 산업 구조 개편과 함께 발전과 전력 판매를 동시에 할 수 없게 됐다. 2020년 7월 송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전기사업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한전이 태양광·풍력발전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 시설을 직접 운영하면서 전기 생산도 할 수 있게 된다.

2001년 전력 산업 구조 개편에 따라 전력 판매와 전력망 사업만 해온 한전은 해상 풍력 등 대규모 신재생 발전 사업에 직접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망 중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시민사회 단체의 지적에 따라 이 법은 1년 가까이 국회에 계류돼 있다.

한전은 민간이 참여하기 어려운 공공 주도의 대규모 해상 풍력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한전이 2020년 9월 해상풍력사업단을 출범하면서 재생에너지 발전 사업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업계에서는 전기사업법 개정안 통과를 염두에 두고 한전이 전담 조직을 꾸린 것이란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한전은 그동안 한국에서 재생에너지 발전 사업에 직접 참여할 수 없어 특수목적회사(SPC) 출자·설립 방식으로 재생에너지 사업을 해왔다. 현재 한전은 신안 해상 풍력 사업(1.5GW), 전북 서남권 해상 풍력 사업(1.2GW)과 제주 한림 해상 풍력 사업(100MW)을 개발하고 있다. 2025년 제주 한림 사업, 2028년 전북 서남권 사업, 2029년 신안 사업의 개발과 건설을 완료하고 상업 운전을 개시할 계획이다.

최근 한전은 해상 풍력 발전의 공사 기간을 90일에서 10일로 단축할 수 있는 신기술 ‘해상 풍력 일괄 설치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안전한 항구에서 발전기 하부 기초와 상부 터빈을 모두 조립한 후 발전기 전체 구조물을 들어 올려 바다로 운송해 설치하는 공법이다. 특수 제작된 선박인 일괄 설치선(MMB)이 활용된다.

MMB는 한전의 서남권과 신안 해상 풍력 사업의 하부 기초 운송 설치에 적용할 수 있다. 민간을 중심으로 추진되는 소규모 해상 풍력 단지와 다목적 해양 작업에도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전은 MMB를 활용하면 2050 탄소 중립의 핵심인 해 상풍력 발전 확대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전은 신재생에너지의 간헐성과 변동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혁신 기술 개발에도 매진하고 있다. 한전은 최근 태양광·풍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발전량을 예측해 전력 계통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시스템 개발에 성공했다.

신재생 발전량이 날씨의 영향으로 급격하게 변화할 때는 전력 설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사전 대처가 중요한데 이번에 개발한 신재생 발전량 예측 기반 전력계통 운영 시스템을 통해 신재생 발전의 변동성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전력 계통 신재생에너지 수용 능력 향상으로 2025년까지 약 250억원의 계통 보강 비용이 절감될 것으로 예상된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