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장 풀린 대기업 CVC
신기술 찾는 ‘뭉칫돈’ 투자 몰린다
제2 벤처 붐 기대감

[스페셜 리포트]
현대차그룹 ‘2020 오픈 이노베이션 라운지’에 참가한 현대차그룹 임직원이 국내외 스타트업의 유망 신기술을 체험하고 있는 모습.  /현대차 제공
현대차그룹 ‘2020 오픈 이노베이션 라운지’에 참가한 현대차그룹 임직원이 국내외 스타트업의 유망 신기술을 체험하고 있는 모습. /현대차 제공
2020년 말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일반 지주회사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보유가 가능해지면서 CVC를 통한 ‘제2 벤처 붐’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CVC는 비금융권의 일반 기업이 재무적 이익 추구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목적을 가지고 독립적인 벤처기업에 투자하기 위해 자회사 형태로 운영하는 금융회사를 뜻한다. 구글의 지주회사 알파벳이 100% 소유한 구글벤처스가 대표적이다.

구글벤처스·인텔캐피털 등 글로벌 CVC는 기술 기반의 스타트업에 전략적으로 투자한 후 인수·합병(M&A)을 통해 자사 사업에 적용하거나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 창출을 통해 수익을 얻는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금융과 산업 간 상호 소유나 지배를 금지하는 ‘금산분리’ 원칙 때문에 일반 지주회사는 CVC를 보유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일반 지주회사 체제 밖에 있는 계열사나 해외 법인을 통해 우회적으로 CVC를 설립해 왔다.

한국의 일반 지주회사들이 총 55조원이 넘는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이들 회사의 유보 자금이 벤처업계로 흘러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그래픽=전어진 기자
그래픽=전어진 기자
미국, CVC 투자 가장 활발
우버·에어비앤비도 CVC 성공 사례


해외에서는 일반 지주회사의 CVC 보유를 허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설립 방식과 펀드 조성에 규제가 없어 각 기업이 자사 상황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CVC와 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자율성을 기반으로 CVC가 혁신 스타트업을 키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구글·인텔· 바이두·텐센트·레전드홀딩스 등 글로벌 기업들은 CVC를 통해 전 세계 투자 시장을 이끌고 있다.

글로벌 시장 조사 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연간 글로벌 CVC 투자 규모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2020년 약 731억 달러 규모를 기록했고 CVC가 주도한 투자 건수는 3300여 건에 달했다.

CVC 투자가 가장 활발한 곳은 미국이다. 삼정KPMG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CVC 489개 중 43.5%(213개)가 미국에 설립됐고 미국 내에서도 벤처 생태계가 잘 형성돼 있는 실리콘밸리에 집중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 벤처 투자에서 CVC의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다. CVC 투자 분야에서 가장 앞선 미국은 전체 벤처캐피털(VC) 투자 중 CVC 참여 비율이 2004년 30%에서 2018년 51%로 높아졌다.

한국의 CVC 투자는 각종 규제에 막혀 있었다. 삼정KPMG는 한국 CVC 시장이 해외보다 활성화되지 못한 배경으로 규제 이슈와 기업의 보수적 투자 성향, 계열사 간 복잡한 의사 결정 구조 등을 꼽았다. 다만 지난해 말 일반 지주회사가 제한적으로 CVC를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올해부터 CVC 관련 시장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9년 가장 많은 벤처기업에 투자한 CVC는 구글벤처스다. 구글벤처스는 2009년 창업 후 지금까지 400여 개 기업에 투자했고 최근 5년(2015~2019년) 누적 투자 금액은 20조원이 넘는다.

구글벤처스는 현재 45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벤처에 투자하고 있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벤처기업 25개를 주식 시장에 공개(IPO)했고 약 125개 기업의 M&A에 성공했다. 구글벤처스가 초기 투자한 대표 기업은 우버·에어비앤비·슬랙·블루보틀·제트닷컴 등이다. 구글은 구글벤처스가 투자한 일부 벤처기업을 인수해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있다.

CVC가 주목받는 이유는 이를 통해 대기업과 벤처기업의 상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벤처기업은 대기업에 경영 노하우와 인적 네트워크 등을 지원받을 수 있고 대기업은 벤처기업과의 협업으로 혁신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전통적인 벤처캐피털은 투자를 통한 재무적 이익 추구가 목적이지만 CVC는 재무적 목적 외에도 전략적 투자자(SI) 관점에서 모기업의 사업 확장, 기술·인력 등 외부 자원 탐색·확보, 신시장 개척 등 전략적 이익을 추구한다.

이런 특성에 따라 CVC는 벤처기업이 필요로 하는 장기 위험 자본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며 일반 금융회사가 투자 위험성이 높아 투자하는 것을 꺼리는 모험적인 사업 분야에 과감한 투자를 감행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픽=전어진 기자
그래픽=전어진 기자
한국판 구글벤처스 탄생할까
미국 혁신 스타트업 찾는 삼성·현대차·SK·LG


업계에서는 지주회사 CVC 허용으로 ‘한국판 구글벤처스’가 탄생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그룹은 벤처 투자의 메카인 미국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CVC를 운영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삼성벤처투자·삼성넥스트·삼성카탈리스트펀드 등 3개의 CVC를 운영하고 있다. 1999년 삼성그룹의 4개 계열사가 출자해 설립한 삼성벤처투자는 반도체·정보기술(IT)·소프트웨어·인터넷·바이오 등 스타트업 단계의 기업부터 주식 시장 등록 직전의 기업에 이르기까지 전 단계에 걸쳐 투자하고 투자 자금뿐만 아니라 경영 지원, 기술 지원, 시장 등록 등 전 과정에 토털 서비스를 제공한다.

삼성은 3개의 CVC를 통해 인공지능(AI)·디지털 헬스케어·블록체인·핀테크 등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신성장 산업으로 주목받는 분야의 신기술을 보유한 기업에 다수 투자했다.

삼성벤처투자를 통해 최근 홍콩의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 블록체인 게임 업체 애니모카브랜드에 투자했고 인도네시아 원격 의료 업체 알로독터에도 투자했다.
그래픽=전어진 기자
그래픽=전어진 기자
삼성넥스트를 통해 블록체인·AI를 융합한 플랫폼을 제공하는 스타트업 멀티버스에 1500만 달러를 투자했고 가상 자산 인프라 기업 프라임트러스트의 6400만 달러 규모의 시리즈A 투자 라운드에도 참여했다. 삼성카탈리스트펀드는 독일 AI 스타트업 에이다헬스가 진행한 9000만 달러 규모의 시리즈B 투자에 참여했다.

삼성넥스트와 삼성카탈리스트펀드는 한국을 비롯해 미국 실리콘밸리·뉴욕, 이스라엘 텔아비브, 독일 베를린 등 해외 각지에 거점을 두고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커넥티드카·자율주행, 보안, AI, 사물인터넷(IoT), 모바일 커머스 등 세계 곳곳에 있는 기술 혁신 기업에 대한 투자를 이어 가며 미래 먹거리 발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삼성은 CVC 투자를 통해 진행 중인 사업에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새로운 사업 가능성과 기회를 창출하기도 한다. 삼성전자 스마트 홈 시스템의 기반이 된 커넥티드 스마트 홈 기업 ‘스마트싱스’, 삼성의 모바일 결제 서비스 삼성페이 개발에 활용된 ‘루프페이’, AI 음성 비서 빅스비 개발을 주도한 ‘비브랩스’ 인수는 삼성넥스트의 대표작이다.
2017년 CES에서 삼성넥스트는 1억5000만 달러 규모의 자체 펀드를 조성했다. /삼성전자 제공
2017년 CES에서 삼성넥스트는 1억5000만 달러 규모의 자체 펀드를 조성했다. /삼성전자 제공
현대차그룹은 기존 벤처 투자를 담당하던 현대벤처스의 기능을 확대한 현대크래들을 2017년 출범시켰다. 현대크래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에 오픈한 후 한국(제로원), 중국 베이징, 이스라엘 텔아비브, 독일 베를린 등 5대 해외 거점에 오픈 이노베이션 센터를 구축해 운영 중이다.

실리콘밸리의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해 투자할 뿐만 아니라 한국 스타트업의 실리콘밸리 진출을 돕는 역할도 하고 있다. 현대크래들은 혁신 기술 발굴과 전략 투자를 통해 모빌리티 서비스, 스마트 시티, 환경 기술 등의 분야에서 잠재력이 높은 스타트업을 발굴해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현대크래들은 미국 디자인 컨설팅 회사인 선드벅페라와 협업해 개발한 걸어 다니는 자동차 ‘엘리베이트 콘셉트카’를 2019년 세계 가전 전시회(CES)에서 선보여 미래 모빌리티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2011년 당시 현대벤처스 시절부터 투자했던 사운드하운드와 음성 인식 비서 서비스 관련 협업을 통해 선보인 차량용 AI 비서 서비스도 현대크래들의 투자 성과다. 아이오닉 머티리얼과 솔리드파워와는 전고체 배터리 관련 협력을 진행 중이다. 현대차의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 작업에도 현대크래들이 주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크래들 엘리베이트 콘셉트카 /현대차 제공
현대크래들 엘리베이트 콘셉트카 /현대차 제공
LG그룹은 2018년 LG전자·LG디스플레이·LG화학·LG유플러스 등 4개 계열사를 통해 4억 달러 규모의 벤처 투자 펀드를 출자해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설립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두고 있다.

구광모 LG 회장이 취임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첫 해외 출장을 갔을 때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찾아 운용 현황과 투자 포트폴리오를 점검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여 주목받았다. LG테크놀로지벤처스는 그룹 미래 먹거리 발굴과 신사업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구 회장이 미래 먹거리로 낙점한 AI·로봇·전장 등에서 혁신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을 찾아 투자하며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에서 다양한 사업 협력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모빌리티 공유 소프트웨어 플랫폼 라이드셀을 시작으로 AI 솔루션 스타트업 마키나락스, 딥러닝 보안 솔루션을 개발하는 딥인스팅트, 이스라엘 전장 스타트업 오로라랩스 등에 대한 투자를 이어 가고 있다.

미국의 가상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분야 스타트업 웨이브에 투자하며 메타버스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LG CNS를 통해 산업 보안 시장도 공략 중인 만큼 최근에는 이스라엘 보안 솔루션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스타트업) 클라로티의 시리즈D 투자 라운드에도 참여했다.

SK그룹은 2008년 SK텔레콤의 미국 법인 SK텔레콤아메리카스(SKTA)에 SK텔레콤벤처스를 설립해 초기와 중기 단계의 벤처 스타트업에 중점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모회사인 SK텔레콤이 5세대 이동통신(5G)·AI·빅데이터·양자 암호 통신 분야에서 미래 먹거리를 육성하고 있는 만큼 모회사 사업과 시너지가 높은 모바일 플랫폼·클라우드·IT·데이터센터·IoT·센서 등 신기술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LG는 그룹 차원에서 인공지능(AI) 기술 역량을 높이기 위해 오픈 이노베이션을 강화하고 있다. LG AI연구원 내부. /LG 제공
LG는 그룹 차원에서 인공지능(AI) 기술 역량을 높이기 위해 오픈 이노베이션을 강화하고 있다. LG AI연구원 내부. /LG 제공
지주사 벤처 투자 길 열려…
신세계·GS도 CVC 설립 추진 속도

그동안 불가능했던 지주회사의 기업형 벤처캐피털인 CVC 보유가 가능해지면서 기업들이 CVC를 통해 벤처 투자 생태계에 참여하는 사례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신세계·GS·이랜드그룹 등이 CVC 설립 추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신세계그룹은 2020년 7월 신세계인터내셔날·신세계백화점·센트럴시티 공동 출자를 통해 시그나이트파트너스를 설립했다. 신세계그룹의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그룹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에 투자하기 위해 설립됐고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의 배우자인 문성욱 신세계톰보이 대표가 이끌고 있다.

시그나이트파트너스는 동남아시아 최대 차량 공유 기업인 그랩, 한국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 푸드 스타트업 쿠캣, 자동차 기반의 라이프스타일 스타트업 피치스그룹코리아 등에 투자했다.

GS그룹도 2020년 7월 미국 실리콘밸리에 GS퓨처스를 설립해 디지털 분야와 친환경 에너지 분야 등에서 GS그룹과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스타트업을 찾고 있다.

이랜드그룹은 올해 1월 지주회사 산하 자회사로 이랜드벤처스를 설립했다. 새로운 수장에 이윤주 이랜드그룹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선임해 패션·유통·서비스·IT 분야의 스타트업을 찾아 나섰다.

넥센타이어는 타이어업계 최초로 올해 3월 CVC 자회사인 넥스트센추리벤처스를 미국 실리콘밸리에 설립했다. 기존 타이어 사업에 한정하지 않고 미국 실리콘밸리와 이스라엘·독일 등에서 자동차 센서·AI·전기차·자율주행 등 모빌리티 사업 분야의 혁신 신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그래픽=전어진 기자
그래픽=전어진 기자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