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시 부족해 글로벌 시장에서 외면 받는 일본 증시…기업들은 핑계에만 ‘급급’

[글로벌 현장]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의 니케이지수가 적힌 전광판 앞을 지나는 시민들.(AFP 연합뉴스)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의 니케이지수가 적힌 전광판 앞을 지나는 시민들.(AFP 연합뉴스)
2012년 11월 세계 금융 시장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던 전자 기업 샤프가 발표한 공시 한 통에 패닉이 됐다. 샤프가 영어판 결산 보고서를 통해 ‘회사의 존립을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 상황’이라고 공시한 것이다.

2011년 3760억 엔(약 5조원)의 순손실을 기록한 샤프는 그해에도 적자 규모가 6조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회사의 존속 여부가 불투명해지면서 샤프에 투자한 전 세계 투자자들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던 시점이었다. 그때 회사가 스스로 “곧 망하게 생겼다”고 만천하에 공표해 버린 것이다.

‘할지도 모른다’를 ‘했다’로 번역해 낭패 본 샤프
해외 투자가들이 앞다퉈 샤프의 주식과 채권을 내던지자 샤프는 허겁지겁 영어판 공시를 수정했다. 알고 보니 일본어판 공시의 ‘회사의 존립을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대목을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로 잘못 번역한 것이었다.

샤프의 영어 공시 소동은 지금도 일본인의 영어 실력이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의 존립마저 휘청거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경영난에 시달리던 샤프는 결국 2016년 대만 폭스콘에 매각된다. 일본 대표 전자 업체가 한 수 아래로 여겨지던 해외 기업에 팔린 첫 사례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21년 일본은 30조 달러(약 3경4000조원)로 추산되는 세계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투자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필사적이다. 30년째 계속되는 저성장의 늪에서 탈출하려면 글로벌 ESG 투자 자금을 유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내각은 디지털화와 함께 탈석탄화를 양대 정책으로 내걸고 ESG 투자 자금을 일본으로 빨아들일 수 있는 통로를 적극적으로 개설하고 있다.

일본 금융청은 이르면 올해부터 일본의 모든 상장사가 유가 증권 보고서에 매년 기후 변화에 따른 사업 위험을 명시하도록 의무화할 계획이다. 일본 상장사는 매년 사업 연도 종료 후 3개월 내에 유가 증권 보고서를 공시해야 한다. 한국의 사업 보고서에 해당한다.

실적만 공개하는 결산 보고서와 달리 유가 증권 보고서는 사업 내용과 경영 활동의 위험 요소까지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이 보고서에 기후 변화에 따른 실적 변동 가능성, 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신설되는 환경 규제에 따른 손실 규모를 정확히 공개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영어 보고서 제출하는 상장사 비율 겨우 8.5%
내년 4월로 예정된 도쿄 증시의 재편도 글로벌 투자가들에게 일본 시장을 보다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조치로 평가된다. 일본 금융청과 도쿄증권거래소는 현재 1부·2부·마더스·자스닥 등 4개 시장으로 나뉘어 있는 도쿄 증시를 프라임·스탠더드·그로스 등 3개 시장 체제로 재편한다.

상장사 수(약 4000개)는 미국과 비슷한데 시장 구분이 뚜렷하지 않아 옥석 가리기가 쉽지 않다는 글로벌 투자가들의 지적을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최상위 시장인 프라임 시장 상장사에는 글로벌 기관투자가들의 까다로운 투자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여러 조치를 취했다.

이사회 멤버의 3분의 1 이상을 외국인과 여성이 포함된 사외이사로 채워야 하고 주요 공시 사항을 영어로도 제출해야 한다. 지난 6월 11일 금융청과 도쿄증권거래소가 개정한 ‘기업 지배 구조 지침(코퍼릿 거버넌스 코드)’은 프라임 시장 상장사에 ‘필요한 정보는 영어로 게시,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현재 일본 기업의 영어 실력으로는 쉽지 않은 요구 사항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본 금융 당국이 수년째 영어 공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재 1부 시장 상장사 2186곳 중 결산 보고서를 영어로도 공시하는 기업은 1214사에 그친다. 주주 총회 소집 통지(1100사)와 기업 설명회(IR) 자료(1006사)를 영어로 제공하는 1부 상장사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의 정보를 가장 상세하게 담은 유가 증권 보고서까지 영어로 제출하는 상장사는 187곳으로 8.5%에 불과하다.

지난 5월 한 정보기술(IT) 상장사가 발표한 결산 보고서를 보면 일본어판은 9페이지인데 영어판은 2페이지였다. 2페이지 분량인 회사 현황 설명이 영어판에는 통째로 생략됐기 때문이었다. 일본어 공시의 ‘인재에게 적극적으로 투자한다’는 대목도 회사의 성장 전략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 사항이지만 영어 공시에는 빠졌다.

이 회사는 요미우리신문에 “결산 보고서를 담당하는 직원이 1명뿐인데 이 직원이 번역까지 담당하고 있어 어쩔 수 없다”고 설명했다.

영어로 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인색하기는 일본 대표 기업도 마찬가지다. 지난 1월 도호쿠 신칸센의 게시판에는 열차 지연 정보가 일본어와 영어로 제공됐다. 일본어로는 ‘조반센 신치~사카모토역 구간에서 열차가 동물과 충돌…재개 예상 시간이 22시 30분 무렵으로 변경됐습니다’라고 71글자로 안내됐다. 반면 영어 안내는 ‘조반선 공지(Joban Line Notice)’라는 3단어가 전부였다. 영어만 봐서는 열차가 지연된다는 것인지, 취소됐다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불친절한 안내였다.

전광판 안내는 영어 실력뿐만 아니라 전광판 기능의 한계가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다. JR동일본은 제대로 된 영어 안내를 제공하려면 신칸센 전체 전광판을 교체해야 하는데 비용 문제로 당장 개선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일본 기업에 대한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의 개입이 잇따르자 이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영어 공시를 하지 않는 상장사도 있다. ‘영어 공시를 안 하는 것이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에 대한 최선의 방어책’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대기업도 공시 관련 서류를 100% 자체적으로 번역할 수 있는 상장사가 많지 않다는 게 일본 재계의 자체 분석이다. 위험한 수준이라고까지 평가되는 일본인의 영어 실력 때문이다.

일본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60~70%에 달한다. 하지만 일본의 현실은 외국인 투자자가 영어 공시와 안내만 봐서는 중요한 투자 정보를 놓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일본 증시가 글로벌 시장에서 외면받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라는 분석이다.

2017년 조사에서 해외 투자가들의 72%가 일본 기업의 영어 정보 제공이 ‘불만스럽다’고 답했다. ‘만족한다’는 응답은 7%에 불과했다.

영어 공시에 대한 압박감이 커지면서 번역 회사들은 특수를 누리고 있다. 영어 공시 번역 요금은 1자당 12엔이다. 회사로서는 엄청난 부담이다. 번역을 위해 발표 전의 실적 정보를 외부에 내보내는 것을 꺼리는 기업도 적지 않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번역 서비스가 등장했지만 실용화까지는 개선할 점이 많다는 평가를 받는다.

샤프의 영어 공시 사태에서 보듯이 공시 오류는 기업의 주가는 물론 신뢰성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다. 대책 마련이 시급하지만 일본 최대 경제 단체 게이단렌 관계자는 “글로벌화의 진전으로 영어 능력이 필수가 됐는데도 일본 기업의 상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