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불 함락 전부터 은행 인출·송금 시스템 마비…비트코인이 유일한 가치 전달 수단으로 부각
[비트코인 A to Z] 몇 주 동안 전 세계의 이목이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집중됐다. 비행기에 매달린 난민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 한편 8월 21일 CNBC는 흥미로운 기사를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아프가니스탄이 혼란에 빠져들고 있는 와중에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에 대한 기대가 치솟고 있다는 것이다.외신은 가족들을 외국에 도피시키기 위해 비트코인을 사용하는 청년과 1년 전부터 국제기구의 도움으로 비트코인 지갑을 만드는 법을 익힌 여성들, 터키에 일하러 갔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과 함께 찾아온 터키 리라화 폭락 때문에 비트코인을 알게 된 젊은이들을 소개했다.
카불이 탈레반의 손에 넘어가기 전부터 은행들은 인출을 중지했고 웨스턴유니언이나 하왈라(민간 환치기 서비스) 서비스도 무기한 중지됐다. 이런 상황에서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에 대한 관심이 치솟았다. 체인어낼리시스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은 2021년 암호화폐 채택지수가 154개국 중에서 20위다. 제대로 된 거래소가 없지만 개인 간 거래(Peer to Peer)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외와 연결해 주는 신뢰의 동아줄
기사는 카불공항의 비극이 발생하기 직전에 취재됐지만 향후 탈레반 치하에서 아프가니스탄 청년들이 암호화폐 기술로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암시한다. 휴대전화 보급률이 70%에 달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아프가니스탄의 청년들은 20년 전 탈레반 치하로의 회귀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서 비트코인과 암호화폐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비트코인의 용도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정부나 약탈자로부터 자산의 은닉, 외국 친척들로부터의 원조 수령, 해외 탈주 시 비상금, 이슬람법에서 금지한 여성의 경제권 확보, 혁명 정부가 남발할 종이돈으로부터의 인플레이션 헤징 등이다.
비트코인을 한낱 투기로 보는 회의론자들은 메인 스트림에 해당하는 CNBC가 비트코인을 아프가니스탄 청년들의 희망으로 묘사하는 기사를 내보냈다는 사실 자체에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 월가의 큰손들이 또다시 비트코인 가격을 펌프질하려고 한다는 음모론이 오히려 수긍하기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전통적인 금융이 하지 못하는 일을 비트코인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새로울 것이 없다. 주류 미디어와 금융권 엘리트들과 통화 당국의 핵심 관료들은 비트코인에 기존 금융 시스템이 범접하기 어려운 속성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국경이 폐쇄되고 공항이 마비되고 금융 자산이 동결된 사회에 있는 친척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서는 변제의 최종성이 있는 가치물을 보내야 한다. 변제의 최종성이 있는 가치물은 현금과 금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라면 달러와 금이다. 금융 시스템을 이용해 전자적으로 송금하면 변제의 최종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특수한 상황에 처한 정부가 가장 먼저 차단하는 게 바로 금융망이다.
CNBC 기사가 묘사하고 있는 풍경이야말로 변제의 최종성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설명이다. 은행과 신용카드와 웨스트유니언이 서비스를 거부한 곳에도 비트코인은 위험 없이 가치물을 전달할 수 있다. 비트코인이 다시 0원이 된다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몇 달 사이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는다. 그들조차 탈레반 치하의 친척들을 도우려면 비트코인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자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청년들에게는 현대 문명을 송두리째 거부하고 중세로 되돌리려는 정부를 우회해 자신들을 국외와 연결해 주는 든든한 신뢰의 동아줄이 바로 비트코인이다.
이를 거의 최초로 언급한 규제 당국자는 제이 클레이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전 의장이다.그는 비트코인·암호화폐 열풍과 함께 규제 논란이 뜨겁던 2017년 12월 월가 투자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비트코인과 암호화폐의 4가지 특성을 열거하면서 변제의 최종성을 콕 집어 명시했다. 비록 비트코인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빌렸지만 이 주장에 대해 반론하지 않음으로써 중립적인 모양새를 지키면서 비트코인 기술의 잠재적 폭발성을 최대한 암시했다. 국가에 의해 변제의 최종성이 훼손되기 일쑤인 전통적인 금융 전산망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당국자로서 비트코인 시스템의 속성상 변제의 최종성을 갖는다는 언급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전통 금융의 규제 책임자가 비트코인이 기존 금융망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암시했다는 오해를 사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재임 중 대부분의 암호화폐 공개(ICO)를 무면허 증권 발행으로 유권 해석하고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의 허가를 불허해 관련 산업의 발전을 지연한 책임자의 생각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해석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클레이튼 전 의장은 현직에 있을 때도 비트코인과 암호화폐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발언한 적이 없다. 오히려 대학 강연에서 “(ICO가) 지금 금지됐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퇴임 이후 그의 행보를 고려할 때 그는 현직에 있을 때부터 비트코인과 암호화폐가 이미 다가온 미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보는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는 퇴임한 지 두 달이 안 돼 비트코인 ETF를 신청한 펀드와 변호사 계약을 체결했다. 즉 자신이 규제하던 업종의 변호사로서 자신이 이끌던 조직을 설득하는 것이 주업인 법률 자문 계약을 수락했다. 8월에는 20억 달러 규모의 암호화폐 수탁 펀드와 계약하기도 했다. 클레이튼 전 의장의 친비트코인 행보에 대해서는 SEC와 소송 중인 리플이 전형적인 ‘이해상충’에 해당한다고 법원에 탄원할 정도다.
암호화폐를 규제하는 책임자였다가 암호화폐업계를 위해 뛰는 전직 관료들은 클레이튼 전 의장이 처음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미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의장을 지냈던 지안 카를로는 리플을 위해 일한다. 미국 법무부 최초로 암호화폐 태스크포스를 이끌었던 캐서린 혼 검사는 비트코인과 관련해 굵직한 사건을 마무리한 뒤 비트코이너로 변신했고 스탠퍼드대와 코인베이스 이사를 거쳐 22억 달러 규모의 암호화폐 전용 펀드의 대표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 사업자 면허 법안’을 초안하고 통과시킨 벤저민 로스키 뉴욕 주 전 금융감독국장은 퇴임 이후 자신이 만든 규제에 걸리지 않고 사업을 하는 방법에 대해 관련 사업자들에게 자문해 주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판 뒤엎기’
비트코인이 0원이 된다거나 암호화폐나 블록체인이 한낱 유행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눈에 관료들의 이런 재빠른 변신이 돈을 위해서라면 공직의 명예 따위는 안중에 없는 변절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2008년 비트코인의 발명이 돌이킬 수 없는 ‘판 뒤엎기’라는 사실을 인지했다고 가정하면 이들의 선택도 이해할 수 있다. 대중의 현실 인식에 영합해야만 하는 언론과 시대에 뒤처진 정치의 칼날 앞에 서야만 했던 현직에서는 최대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해 새로운 산업의 생태계가 형성될 시간을 벌어 줬지만 퇴직 이후에는 자신의 여생을 시대에 뒤처진 관직이나 정치 혹은 학계 대신 빠르게 부상하는 산업에 투신하는 선택을 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카불과 같은 상황에 처할 나라들은 지구상에 많다. 그들에 대한 뜨거운 가슴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금융망이 마비되는 비상시에 살아남기 위해 비트코인을 준비하라는 메시지 정도는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수많은 은행에 둘러싸여 살면서 지갑 안에 몇 장의 신용카드가 있는지도 모르는 산업 국가의 국민들로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 메시지였다면 어땠을까. 비트코인은 산업 국가에는 하등 필요가 없지만 위기에 처한 사회의 개인들에게는 한시적으로는 매우 요긴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회의론자들도 그렇지만 출세를 우선시하는 신중한 이들도 그들의 뛰어난 머리에 비해 가슴의 온기는 무참할 정도로 냉랭할 때가 많다.
오태민 ‘비트코인은 강했다’, ‘비트코인 지혜의 족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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