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 회장, 벤처·스타트업 키우고 M&A 광폭 행보
정유에서 바이오·모빌리티로 중심축 대이동

[스페셜 리포트]
허태수 GS그룹 회장이 2020년 1월 GS임원포럼에서 임원들에게 그룹의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GS 제공
허태수 GS그룹 회장이 2020년 1월 GS임원포럼에서 임원들에게 그룹의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GS 제공
허태수 회장 취임 이후 미래 먹거리를 찾기 위한 GS그룹의 투자 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GS그룹은 올해 대어급 매물이었던 요기요(배달)와 휴젤(바이오)을 연이어 품으면서 인수·합병(M&A) 시장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GS그룹은 그동안 대우조선해양·코웨이·아시아나항공·두산인프라코어 등 대형 딜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며 M&A 시장의 단골손님으로 불렸지만 번번이 인수가 불발되면서 그룹의 체질을 변화시킬 만한 ‘메가딜’이 없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급변하는 기업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주요 그룹이 신사업에 조단위 투자를 단행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GS그룹에서는 이렇다 할 빅딜 소식이 들리지 않아 대형 M&A에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 GS그룹의 투자 기조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GS그룹은 바이오·모빌리티·배달·반려동물 사업에 투자를 단행해 미래 성장 동력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GS그룹은 올해 휴젤·요기요뿐만 아니라 메쉬코리아(배달)·펫프렌즈(반려동물 서비스)·당근마켓(중고거래)·카카오모빌리티(모빌리티)에 투자했다. 주력인 GS칼텍스와 GS에너지 등 정유 업종은 성장 한계에 부닥쳤고 탈탄소 시대가 다가오는 만큼 신사업이 필요한 상황이다.

특히 GS칼텍스가 지난해 상반기에만 코로나19의 여파로 1조원이 넘는 적자를 내면서 그룹 전체가 흔들렸던 만큼 신사업 확장을 통해 전통 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할 필요성도 커졌다.
그래픽=배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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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수의 바이오 베팅…보톡스 1위 휴젤 인수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GS그룹의 지주회사 (주)GS는 싱가포르 바이오 전문 투자 기업 CBC그룹(C-브리지캐피털), 중동 국부펀드 무바달라인베스트먼트, 한국 사모펀드인 IMM인베스트먼트 등과 다국적 컨소시엄을 구성해 베인캐피털이 보유한 휴젤의 지분 46.9%를 전환사채 80만 주를 포함해 약 1조7000억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8월 25일 체결했다.

(주)GS는 약 1700억원을 투자했다. GS는 출자 금액이 총 인수 금액의 10% 수준인 점을 고려해 이날 공시를 통해 컨소시엄 참여를 통한 ‘소수 지분 투자’라고 밝혔다. 휴젤 인수에 성공한다면 2004년 LG그룹에서 분리된 이후 첫 조 단위 M&A가 된다.

업계에서는 이번 다국적 컨소시엄을 통해 향후 글로벌 보톨리눔 톡신 제제 시장을 공략하는 데 유리한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한다. 인수 후 휴젤의 경영은 컨소시엄을 중심으로 이뤄지며 GS도 이사회 멤버로 참여한다.

2001년 설립된 휴젤은 한국 보톨리눔 톡신 제제(일명 보톡스) 시장점유율 1위 기업이다. 2010년 보툴리눔 톡신 제제 ‘보툴렉스(수출명: 레티보)’를 출시했고 히알루론산(HA) 필러 ‘더 채움’, 바이오 코스메틱 ‘웰라쥬’ 등을 주요 품목군으로 두고 있다.

휴젤은 2020년 매출 2000억원을 돌파했다. 지난해 10월 한국 보톨리눔 톡신 제제 기업 중 처음으로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국(NMPA)에서 보툴리눔 톡신 제제 ‘레티보’의 판매 허가를 받았다. 레티보는 현재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미국·호주·캐나다 출시도 준비하고 있다.

보툴리눔 톡신은 근육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미용 목적의 메디컬 에스테틱 분야뿐만 아니라 뇌졸중 후 상지 근육 경직이나 뇌성마비로 인한 첨족기형 등 난치병 치료제로도 사용되고 있어 치료용 의약품으로서의 성장 가능성도 높다. 앞서 삼성·SK·신세계 등 한국 대기업들이 바이오산업 진출을 위해 휴젤 인수를 검토한 것으로 알려져 주목받은 바 있다.

GS는 이번 컨소시엄을 통해 친환경 그린 바이오 플랫폼 구축을 목표로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나설 계획이다. GS그룹이 의약품 등에 사용되는 의료 바이오(레드바이오) 사업에 진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존에는 GS칼텍스가 바이오 공정을 이용해 세계 최초로 2,3-부탄다이올 상업화에 성공하면서 산업 바이오(화이트바이오) 사업을 하고 있었다. 허 회장은 “휴젤을 GS그룹의 바이오 사업을 다각화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육성해 미래 신사업인 바이오 사업을 더욱 확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배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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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 뒷심 부족했던 GS, 신사업 새판 짜기 속도

업계에서는 허 회장 취임 이후 GS그룹이 신사업 발굴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어 그룹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는 말이 나온다. 전임 허창수 명예회장이 에너지·유통·건설 등 3대 핵심 사업의 경쟁력을 구축했다면 허 회장은 지속 성장을 위해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를 통한 신사업 확장에 힘을 쏟고 있다.

그동안 GS그룹이 추진했던 주요 M&A 행보를 보면 재무 여력이 충분한데도 끝까지 완주한 것은 손에 꼽히는 정도다. 2008년 대우조선해양과 대한통운을 인수하려다 포기했고 2012년 코웨이, 2015년 KT렌탈 인수전에 참전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2019년 아시아나항공, 2020년 두산인프라코어 등에도 관심을 보였지만 결국 중도 포기했다.

GS그룹의 소극적이던 M&A 행보를 ‘가족 경영’ 체제에서 찾는 시각도 존재한다. GS그룹은 2004년 LG에서 계열 분리한 이후 17년째 50여 명에 달하는 오너 일가가 지주회사와 계열사 지분을 나눠 갖고 공동 의사 결정을 하는 가족 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언뜻 안정적인 경영 형태로 보이지만 주요 계열사를 오너 일가가 나눠 경영하고 있기 때문에 지분 구조가 복잡해 회장이 단독으로 대규모 투자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은 구조라고 볼 수도 있다. GS그룹의 계열 분리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는 배경도 가족 경영 체제에서 기인한 의사 결정 구조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번 휴젤 인수가 신사업 강화에 대한 허 회장의 의지가 강력하게 반영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향후 GS그룹이 신성장 동력 발굴에 더욱 속도를 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GS그룹이 한국무역협회와 2018년 10월 주최한 ‘스타트업 오픈 이노베이션’에서 참석자들이 한 스타트업의 수경재배 장치를 살펴보고 있다. /GS 제공
GS그룹이 한국무역협회와 2018년 10월 주최한 ‘스타트업 오픈 이노베이션’에서 참석자들이 한 스타트업의 수경재배 장치를 살펴보고 있다. /GS 제공
스타트업 투자로 신사업 발굴 박차
허 회장은 2019년 2월 취임 이후 신사업 발굴을 위한 벤처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허 회장은 “GS그룹의 각 계열사와 인적·물적 역량을 결합해야 하며 스타트업·벤처캐피털 등과 협력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찾고 GS의 투자 역량을 길러 기존과 다른 새로운 비즈니스를 발굴해 성장시키는 ‘뉴 투 빅(new to big)’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당부한 바 있다.

이를 위해 지난해 미국 실리콘밸리에 벤처캐피털(VC)인 ‘GS퓨처스’와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인 ‘GS비욘드’를 설립했다. 두 회사 모두 GS그룹의 주력 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벤처기업·스타트업을 발굴, 육성하는 역할을 한다. 유망 스타트업 발굴·육성 프로그램인 ‘더 GS 챌린지’도 진행하고 있다.

허 회장은 취임 직후 신사업 발굴과 미래 전략 등을 담당하는 미래사업팀을 꾸렸는데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의 장남이자 GS그룹 4세 경영인인 허서홍 전무가 이 팀을 이끌고 있다. 허 전무는 허 회장의 5촌 조카다. 이번 휴젤 인수전에서 허 전무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GS그룹에서 허 회장은 디지털 혁신의 전도사로 유명했다. GS홈쇼핑에서 디지털 혁신 전략을 통해 내수 산업에 머무르던 홈쇼핑의 해외 진출을 이끌고 모바일 쇼핑 사업으로 확장해 TV에 의존하던 사업 구조를 다변화했다.

실적 성장도 눈부시다. GS홈쇼핑 대표이사 취임 직전인 2006년 연간 취급액 1조8946억원, 당기순이익 512억원에 불과했던 GS홈쇼핑 실적을 2018년 취급액 4조2480억원, 당기순이익 1206억원 규모로 성장시켰다. 최근에는 GS리테일과 GS홈쇼핑 합병을 통해 그룹 유통 사업 혁신을 도모하고 있다.
GS그룹 계열사 임직원들이 서울 GS타워 23층 웰컴라운지에 모여 다양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다. /GS 제공
GS그룹 계열사 임직원들이 서울 GS타워 23층 웰컴라운지에 모여 다양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다. /GS 제공
허 회장은 GS홈쇼핑 대표이사 때도 다양한 분야 스타트업들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주목받았다. 텐바이텐(디자인 소품 전문 쇼핑몰)·에브리봇(물걸레 로봇청소기)·빙글(관심사 기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버즈니(홈쇼핑·티커머스 메타 서비스)·펫프렌즈(반려동물 전문 몰)·도그메이트(펫시터 중개 서비스)·헬로마켓(중고 거래)·NHN페이코(간편 결제 전문 서비스) 등은 모두 허 회장이 GS홈쇼핑 시절 직간접적으로 투자했던 스타트업들이다.

‘증권맨’ 출신의 허 회장은 LG투자증권 시절의 투자 감각을 발휘해 GS홈쇼핑을 투자 전문회사로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허 회장이 이끌던 기간 동안 GS홈쇼핑의 펀드 투자 금액은 3300억원 규모, 투자한 벤처·스타트업은 580여 개에 이른다. 허 회장이 2019년 12월 허 명예회장에 이어 GS그룹 회장에 오른 배경에는 적극적인 벤처 투자를 통해 외부 환경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서울 강남구 GS강남타워 전경.  /한국경제신문
서울 강남구 GS강남타워 전경. /한국경제신문
휴젤 인수 이후 GS그룹의 차기 신사업으로는 전기차 배터리 소재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허 회장이 올해 5월 초 그룹의 최고경영진과 함께 배터리 소재 중 하나인 양극재를 생산하는 코스모신소재의 충주 공장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GS그룹이 배터리 소재 사업에 재진출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GS칼텍스가 에너지 산업 생태계 전반의 패러다임 변화에 맞춰 전국 주유소 내 전기차 충전 서비스 등 미래 모빌리티 관련 사업을 하고 있어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을 전망이다.

코스모신소재는 코스모그룹의 주요 계열사로, 2차전지용 양극활 물질, 적층세라믹콘덴서(MLCC)용 이형 필름 등 정보기술(IT) 관련 소재를 생산한다. 코스모그룹은 고 허만정 GS그룹 창업자의 4남인 허신구 GS리테일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허창수 GS그룹 명예회장의 사촌 동생인 허경수 회장이 이끌고 있다. 이 때문에 GS그룹의 방계 기업으로 분류된다.

업계에서는 GS그룹이 M&A 또는 조인트벤처(JV) 설립, 지분 투자 등의 방식으로 코스모신소재와 배터리 사업에서 협업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허 회장은 2021년 신년사에서도 “디지털 기술이 접목된 친환경·모빌리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GS그룹이 양극재 사업에 진출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은 과거에도 GS그룹이 코스모신소재 인수를 검토한 적이 있고 배터리 소재 기업 지분을 인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2014년에는 GS에너지가 배터리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코스모신소재 인수를 검토하다가 인수 의사를 철회한 바 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