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안전 조치 의무 다하지 않은 삼성중공업에 유죄 취지 파기 환송
[법알못 판례 읽기] 중대재해처벌법(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2021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중대재해법은 산업 현장에서 반복되는 인명 사고 등을 줄이겠다는 취지로 올 초 국회를 통과한 법률이다. 사망 사고가 발생한 경우 대표이사 등 경영 책임자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경영계에선 “의무 내용이 모호하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지만 곧 법률이 시행되는 만큼 기업들은 대형 로펌(법무법인)에 자문을 의뢰하는 등 대비 작업에 들어간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상 사업주의 안전 조치 의무에 대해서도 넓게 해석한 대법원 판결이 나와 법조계가 주목하고 있다.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사업주는 사고 예방과 관련해 구체적인 조치 의무가 있다고 반복해 강조했다. 기존 판례를 인용하지 않고 새로운 법리를 판시했다는 평가다. 법조계는 “기업들이 산업 재해 예방을 위해 더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원심, ‘안전 대책 마련 의무 위반’ 일부 무죄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9월 30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삼성중공업 법인과 협력업체 대표 A 씨의 상고심에서 일부 무죄 판결을 유죄 취지로 깨고 사건을 창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사건은 2017년 5월 1일 발생했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800톤급 골리앗 크레인과 지브 크레인이 근처에서 작업하던 다른 크레인과 충돌한 것이다. 이 사고로 크레인이 흡연실과 화장실로 떨어져 직원 6명이 숨지고 25명이 다쳤다.
크레인 신호수와 운전수 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현장 노동자들이 작업 내용을 잘 확인하지 않아 사고가 발생했다는 게 수사 당국과 노동청의 결론이다. 검찰은 삼성중공업 직원과 협력 업체 대표·직원 등 15명을 업무상 과실 치사상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삼성중공업 법인 등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재판에 넘겨진 11명에 대해 금고형 집행 유예나 벌금형을 선고했다. 2심은 나머지 4명에 대해서도 무죄 판결을 뒤집고 금고형 또는 벌금형을 선고했다. 삼성중공업과 협력 업체 대표 A 씨도 벌금형과 금고형 등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 대책 마련 의무 위반 등에 대해선 무죄가 선고됐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가 산업안전보건법과 그에 따른 명령으로 정하는 산업 재해 예방을 위한 기준에 따라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한다.
각종 기계 장치나 설비 등에 의한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하고 중량물 취급 등 작업을 할 때 불량한 작업 방법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또 이 법에 따르면 사업주는 작업 중 물체가 떨어지거나 날아올 위험이 있는 장소에는 그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할 의무도 있다.
하지만 원심은 삼성중공업과 A 씨의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 대책 마련 의무 위반 혐의에 대해선 일부 무죄 판결했다. 이들의 혐의에는 크레인 간 중첩 작업으로 인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 방법이나 크레인이 쓰러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안전 대책을 작업 계획서에 포함하지 않은 점이 포함됐다.
원심은 크레인 간 충돌로 인해 크레인 자체가 전도되거나 낙하하는 경우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 대책까지 포함해 작업 계획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명시적인 규정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원심은 크레인 간 중첩 작업에 따른 충돌 예방을 위해 신호 방법을 제대로 정하지 않아 안전 조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구 안전보건규칙 제40조에 의하더라도 ‘일정한’ 신호 방법을 정해야 한다는 것일 뿐 크레인 중첩 작업 시 별도의 신호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규정은 없다”며 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원심은 삼성중공업과 A 씨가 크레인 간 중첩 작업에 따른 충돌로 물체가 떨어지거나 날아올 위험이 있는 구역에 출입 금지 구역 설정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출입 금지 구역의 설치 반경 내지 범위에 관한 구체적인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 등을 들어 이들이 안전 대책 마련 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 “크레인 사고 반복…예방 의무 있어”
이 같은 판결은 대법원에서 정면으로 뒤집혔다. 대법원이 사업주의 안전 조치 의무에 대해 원심보다 더 넓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사업주가 사고 예방을 위해 각종 구체적인 조치를 다했어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대법원은 “이 사건 산업 현장은 수많은 노동자가 동시에 투입되고 다수의 대형 장비가 수시로 이동 작업을 수행하며 육중한 철골 구조물이 블록을 형성해 선체에 조립되는 공정이 필수적이어서 대형 크레인이 상시적으로 이용되고 사업장 내 크레인 간 충돌 사고를 포함해 과거 여러 차례 다양한 산업 재해가 발생한 전력이 있는 대규모 조선소”라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특히 사고 2개월 전 거제조선소에서 크레인 충돌 사고가 발생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점을 토대로 “사업주로서는 합리적으로 필요한 범위 내의 안전 조치를 보강함으로써 크레인 간 충돌에 따른 대형 안전사고의 발생을 예방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작업 계획서에 크레인 충돌 예방 대책까지 포함돼야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원심 판결과 달리 크레인이 상시적으로 이용되고 충돌 사고까지 발생한 현장 특성을 감안하면 이를 방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조치’까지 작업 계획서에 포함할 의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또 “이 사건 산업 현장의 특성 및 이 사건과 유사한 안전사고 전력에 비춰 보면 구 안전보건규칙 40조가 정한 일정한 신호 방법에는 크레인 중첩 작업에 따른 충돌 사고 방지를 위한 것도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크레인의 단독 작업을 위한 신호 방법을 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충돌 방지를 위한 별도의 신호 방법까지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이 화장실과 흡연 장소가 사고 위험 지역에 설치된 점도 삼성중공업과 A 씨가 안전 대책 마련 의무를 다하지 않은 근거로 제시됐다. 특히 이들이 별도의 신호 방법을 정하지 않아 크레인 간 중첩 작업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경우라면 최소한의 조치로라도 위험 지역에 출입 금지 구역 설정 등을 했어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에는 구 산업안전보건법 제23조에서 정한 사업주의 안전 조치 의무 및 같은 법 제29조에서 정한 도급 사업주의 산업 재해 예방 조치 의무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며 사건을 창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돋보기]
산재로 사망하면 경영자 처벌…중대재해법 내년 시행
앞으로 이 같은 산업 재해가 발생하면 책임자는 더 무겁게 처벌받을 수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내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 시행되는 중대재해법은 노동자 사망 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할 경우 대표이사 등 경영 책임자가 안전 보건 확보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에선 대표이사가 사업장 단위로 안전보건관리책임자를 선임하고 관련 업무를 위임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경영 책임자가 처벌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중대재해법에 따르면 노동자 사망 사고가 발생할 경우 대표이사 등 경영 책임자는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 다칠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정부는 지난 9월 말 국무회의에서 중대재해법 시행령 제정안을 의결했다. 이날 확정된 제정안에선 그동안 경영계에서 모호하다고 지적돼 온 조항이 일부 수정됐다. 특히 경영 책임자의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의무가 보다 구체화됐다.
안전보건관리책임자에게 △업무에 필요한 권한과 예산을 주고 △업무 수행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반기 1회 이상 평가·관리할 것이라는 의무가 부여됐다. 또 안전 보건 분야에 대한 예산 편성 및 투입과 관련해서는 △재해 예방을 위해 필요한 안전·보건에 관한 인력, 시설 및 장비 구매 △확인된 유해·위험 요인의 개선에 필요한 예산을 편성하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최한종 한국경제 기자 onebell@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