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현대重 상여금, 통상임금 인정” 파기환송
3만여 명에게 적용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소송 상고심에서 사측의 손을 들어줬던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원고 승소 취지로 2021년 12월 16일 부산고법에 돌려보냈다.
1심 “추가 임금 지급해야” vs 2심 “신의칙 인정해야”
이번 소송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모든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재산정한 법정수당·퇴직금 등과 과거 지급분의 차액을 2012년 회사에 청구하면서 시작됐다.
노동자 측은 “두 달마다 지급되는 정기 상여금 700%와 설·추석 상여금 100% 등 상여금 800% 전액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줄 것과 앞선 3년 치를 소급해 달라”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급심에서는 정반대의 판결이 나왔다. 2015년 1심은 상여금 800% 전액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했다. 또한 현대중공업이 주장한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받아들이지 않고 3년 치 임금 소급분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신의칙은 민법의 대원칙 가운데 하나로, ‘통상임금 소급분을 노동자에게 지급할 경우 기업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된다면 이를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에 적용되는 원칙이다.
현대중공업의 경영 상황은 유럽의 경기 침체에 따른 수출량 감소, 중국 경쟁사의 급격한 성장 등으로 2014~2015년 무렵부터 장기간 악화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추가 임금을 지급하지 못할 정도의 경영상 어려움은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다음 해 이뤄진 2심에서는 다시 현대중공업의 승소로 뒤집히게 된다. 2심 재판부는 “현대중공업의 상여금 800% 중 설과 추석에 지급되는 100%에 대한 고정성이 인정되지 않아 통상임금에 포함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노조가 요구한 3년 치 소급분에 대해서도 지급 의무가 없다며 신의칙도 받아들였다. 2015년 현대중공업의 연간 영업손실은 1조5401억원을 기록하는 등 심각한 경영 악화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대법 “기업, 경영 위기 예견해야”
대법원은 2심의 판단을 다시 한 번 파기했다. 대법원은 “현대중공업이 추가 법정 수당 지급으로 중대한 경영상 위기가 초래된다거나 기업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경영 악화를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신의칙을 들어 노동자의 법정 수당 청구를 배척해선 안 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국내외 경제 상황 변동에 따른 위험과 불이익은 기업이 예견하거나 부담해야 할 범위라는 것이다.
한때 조 단위의 영업이익을 내던 현대중공업은 여전히 적자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며 현대중공업의 2020년 영업이익은 329억원에 머물렀다.
2021년에는 3분기까지 총 누적 3200억원 수준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대법원은 “현대중공업의 기업 규모에 비춰 볼 때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2심에서 인정하지 않은 명절 상여금에 대해서도 통상임금으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현대중공업 2012년 급여 세칙은 명절 상여를 포함해 상여금을 지급일 이전 퇴직자에게도 근무 일수에 비례해 일할 지급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며 “명절 상여를 소정 근로 여부와 상관없이 특정 시점에 재직 중인 노동자에게만 지급하는 임금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재계 “현실 무시한 판결” 반발
현대중공업 측은 파기 환송심에서 다시 한 번 법리를 다퉈 볼 방침이다. 회사 관계자는 “이번 판결에 따른 충당금은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각 계열사 재무제표에 반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서 예측하는 통상임금 소급분 규모는 약 6000억~7000억원으로 실제 규모는 파기 환송심 결과가 나온 뒤 확정될 예정이다.
반면 현대중공업 노조는 “이번 판결을 적용받을 3만여 명의 노동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며 환영했다. 또한 “노조가 추정하는 추가 임금분은 4000억원대 정도”라며 “현대중공업의 경영 악화를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다”고 주장했다.
재계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을 두고 “현실을 무시한 것”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날 논평을 내고 “오늘날 산업은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고 코로나19 사태 등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위기와 변화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며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납득하기 어려운 판단으로 산업 현장에 혼란과 갈등만 초래할 우려가 크다”고 호소했다.
학계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한 노동경제학자는 “법원이 법적 판단이 아니라 경영·재무적 판단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경제 지표는 항목과 기간 설정에 따라 완전히 다른 통계나 결과가 나오는데 경제 전문가가 아닌 법관이 판단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돋보기]
정확한 기준 없는 ‘신의칙 오락가락 판결’에 혼란 가중
대법원은 2013년 전원합의체에서 “정기·일률·고정성 있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이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회사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는 추가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대한 단서를 함께 제시했다. 통상임금 소송에 신의칙이 중요 쟁점이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이나 ‘회사의 존립이 위태로운 경우’라는 추상적인 조건이다. 법관마다 다양한 해석을 내놓을 수 조건인 만큼 대법원의 판례가 ‘기준’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대법원조차 신의칙을 적용할 수 있는 기업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락가락 판결을 내리고 있다.
대법원은 2019년 신의칙 적용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던 시영운수 통상임금 사건에서 사실상 도산 위기가 아니면 신의칙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취지로 판결한 바 있다. 이에 반해 2020년해 6월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위기를 맞은 아시아나항공 통상임금 사건에선 다시 신의칙을 적용했다.
이후 한국GM과 쌍용자동차에서 제기된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각각 “공적자금 8100억원을 지급받았다”, “장기간 큰 폭의 적자로 회사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는 점을 근거로 신의칙을 적용했다.
그러다가 2020년 8월 이후 판결을 내린 기아·금호타이어 등의 통상임금 소송에서는 또다시 신의칙을 부정했다. 현대중공업과 같은 날 대법원 판단이 내려진 현대미포조선의 통상임금 소송에서도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이 명확한 법리 해석을 내놓지 않자 같은 사건을 두고 1, 2심에서 신의칙 적용 여부가 엇갈리는 일도 적지 않다.
법조계에서는 대법원이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판결을 통해 ‘신의칙 적용을 앞으로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영자가 경영 악화 가능성을 매번 정확히 예견하고 극복 가능성을 진단하는 게 현실에서 가능한가”라며 “사실상 신의칙 적용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계 역시 명확한 기준조차 없어 혼란스럽다는 반응이다. 추광호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정책실장은 “이번 판결로 통상임금과 관련해 소모적인 논쟁과 소송이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또한 “통상임금 논란의 본질은 입법 미비에 있다”며 “신의칙 적용과 관련해 구체적인 지침을 의회에서 마련해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오현아 한국경제 기자 5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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