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 트랩의 함정에 빠진 日 증시, “2만7000선 무너지면 장기 하락장 돌입할 것”

[글로벌 현장]
일본 도쿄의 증권사 앞을 한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일본 도쿄의 증권사 앞을 한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최근 골드만삭스와 모간스탠리 등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2022년도 유망 투자처로 일본 증시를 추천하고 있다. 글로벌 상승장에서 소외되다 보니 밸류에이션(가치)이 낮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 높아 경기 재개 효과가 클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일본 현지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2021년 일본 증시가 지지부진한 것은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기 부양책)라는 ‘모르핀’의 약발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21년 12월 27일 종가 기준 닛케이225지수는 2만8676으로 2021년 초 2만8139와 큰 차이가 없다. 11월 29일에는 2만8029로 2021년 시초가를 밑돌기도 했다.

실적은 최고인데 ‘어차피 안 돼 병’ 걸려

우량주(도쿄 증시 1부 시장)들로 구성된 토픽스지수의 주가수익률(PER)은 지난 5~6년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의 80% 수준을 유지했다. 하지만 2021년 4월 이후 미국과 유럽과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일본 증시가 저평가됐다고 보는 이유다.

일본 기업의 실적이 나쁜 것은 아니다. 토픽스 종목의 주당순이익(EPS)은 138엔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2019년 말 실적을 100으로 했을 때 일본 기업의 현재 실적은 115다. 124인 미국에는 못 미치지만 110인 유럽보다는 앞선다.

일본 전문가들은 일본 증시가 저평가돼 있다기보다 ‘밸류 트랩(가치 함정)’에 빠졌다고 분석한다. 밸류 트랩은 낮은 PER과 주가순자산배율(PBR)을 저평가의 근거로 보고 주식을 샀더니 주가가 줄곧 지지부진한 상황을 말한다.

일본 상장사들의 낮은 PER은 저평가된 게 아니라 일본 산업의 구조적인 약점이 노출되고 성장에 대한 기대가 낮아진 결과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아베노믹스’라는 모르핀을 장기 투여하는 사이 시장이 정책 의존 체질로 변하면서 투자자의 외면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일본 증시의 유행어는 ‘오와콘’이다. 오와콘은 ‘끝났다’라는 뜻의 ‘오왓타’와 ‘콘텐츠’의 앞 글자를 딴 일본식 조어다. 한마디로 일본 증시는 ‘한물갔다’는 의미다. 일본 증시가 ‘어차피 안 돼 병’에 걸렸다고도 한다.

2022년 일본 증시 전망도 밝지 않아 보인다. 일본 주식 전문가들은 2022년 시장에 대해 “삼존불이 쓰러지면 일본 증시의 10년 장기 랠리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삼존불 장세는 2021년 2월, 9월, 11월에 지수가 급등한 모양새가 절의 삼존불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1년 내내 주가가 급등락을 반복했다는 의미다. 시장 참가자들이 일본 시장을 떠나면서 투기 세력이 주식을 조금만 사고팔아도 지수가 롤러코스터를 탔다.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어차피 안 돼 병’에 걸려 일본 주식을 사지도 팔지도 않는다. 일본의 개인 투자가들도 한국의 ‘서학개미’들처럼 해외 증시로 떠나고 있다. 2021년 1~11월 해외 주식 펀드에는 7조3000억 엔(약 75조6192억원)의 자금이 유입됐다. 반면 일본주펀드에서는 400억 엔이 유출됐다. 일본 증시 매매량의 60% 정도를 차지하는 외국인 투자가들도 2021년 2000억 엔어치를 순매도했다.

코로나19 사태의 충격에서 일본 증시를 떠받친 주체는 일본은행과 일본 공적연금(GPIF)이 양대 큰손이었다. 하지만 일본 증시 시가 총액의 13% 정도를 보유한 두 큰손의 매수세도 멈춰 섰다.

GPIF는 2014년부터 일본 주식 운용 자산 비율을 12%에서 25%로 대폭 높였다. 아베노믹스 기간 동안 일본 증시가 크게 오른 것은 GPIF의 매수세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2021년 중반 GPIF의 25% 한도는 다 찼다. 일본 주식을 더 늘리기 어렵게 됐다는 뜻이다.

일본은행은 주요국 중앙은행 가운데 유일하게 상장지수펀드(ETF)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주식 시장에 개입한다. 연간 6조 엔, 최대 12조 엔까지 ETF를 매입한다는 목표를 세워 두고 있다. 현재 일본은행의 ETF 보유 금액은 55조 엔으로 일본 증시 전체 시가 총액의 8% 정도로 추산된다. 일본은행이 간접적으로 최대 주주인 상장사가 20%에 달한다.

일본은행이 ETF를 얼마나 대규모로 매수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2% 룰’이다. 닛케이225지수가 오전장에서 2% 이상 하락하면 일본은행이 ETF를 매집하기 시작한다는 불문율이다. 이론상 오전장이 2% 이상 빠질 때 단타 매매를 하면 무조건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다.

시장을 왜곡한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일본은행은 2021년 3월 연간 6조 엔의 ETF를 매입한다는 목표를 철회했다. 실제 2021년 4월 이후 지금까지 ETF를 2800억 엔어치밖에 사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일본 주식을 사 줄 세력이 사라진 것이다.

삼존불 이론에 따르면 2021년 닛케이225지수가 아무리 급락하더라도 2만7000선의 지지선은 굳건히 지켜졌다. 2022년 ‘삼존불 지지선’ 2만7000선이 무너지면 지난 10년 동안의 오름세가 끝나고 장기 하락 장세가 시작될 것이라는 게 일본 증시 전문가들의 우려다.

증권사들의 예상치도 엇갈린다. 일본 최대 증권사인 노무라증권은 2022년 6월 말 닛케이지수가 3만2000까지 오른 뒤 12월 말 3만1000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도요증권은 2만6500~3만3500을 전망했다. 경제 전문 주간지 다이아몬드의 조사 결과 주식 애널리스트 100명은 2022년 닛케이225지수가 2만7501~3만2840에서 움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닛케이지수 사상 최고치는 버블(거품) 경제 막바지인 1989년 12월 말 기록한 3만8915다.

총리가 日 증시 회복에 찬물

가뜩이나 일본 증시의 펀더멘털(기초 체력)이 약해져 있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의 규제도 시장을 휘청거리게 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2021년 12월 14일 국회에서 “지속 가능한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을 위해 상장사의 자사주 매입을 규제하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배당과 함께 상장사들의 주요한 주주 환원 수단인 자사주 매입을 규제할 수 있다는 총리의 발언에 닛케이225지수는 이틀 동안 1000포인트 폭락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를 ‘기시다 쇼크 시즌2’로 묘사하고 있다. 총리에 취임한 2021년 10월 금융 소득세를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주가에 충격을 준 게 ‘기시다 쇼크 시즌1’이었다.

총리의 인식과 달리 일본 상장사는 미국과 유럽보다 소극적인 주주 환원 때문에 오랫동안 글로벌 투자가들의 비난을 받아 왔다. 글로벌 자금의 외면이 심각해지자 일본 상장사들은 최근 들어서야 주주 환원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2021년 도쿄 증시 1부 시장 상장사의 총 환원액은 25조3000억 엔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2022년부터는 연 10%대의 증가율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골드만삭스는 “일본 상장사의 절반이 무차입 경영을 하는 데다 미국과 유럽에 비해 여전히 총 환원 성향이 낮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으로 주주 환원에 나설 여지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총리가 자사주 매입을 규제하겠다며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기시다 총리가 민간 기업의 자사주 매입을 규제하려는 것은 임금 인상을 독려하기 위해서다. 기업이 내부 유보금을 자사주 매입에 쓰지 말고 임금 인상에 투입하라는 것이다. 기시다 쇼크 시즌2가 주식 시장에 주는 충격은 시즌1 이상일 것이라고 일본 증시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일본은행, GPIF, 해외 투자가, 일본 금융사, 개인 투자가들의 외면을 받는 일본 시장에서 마지막 남은 큰손이 자사주 매입에 나서는 일본 기업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총리가 자본 시장을 적으로 돌릴 셈인가”, “정부가 실제로 자사주 매입을 제한하면 일본 주식에 치명상을 입힐 것”이라는 경고를 내놓고 있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