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주의 ‘글로벌 엔터 기업’ 비전 이어갈 듯…미디어 분야 투자 집중 예상

[비즈니스 포커스]
넥스트 넥슨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
“제가 어디까지 넥슨을 끌고 갈지는 잘 모르죠. 제가 10년쯤 더 하고 나서 회사의 주인이 바뀌고 그러면서 성장해 나갈지도 모르죠. 회사를 경영하면서 길을 몰라 어려웠던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답은 늘 있죠. 어떤 답을 선택할지가 고민이죠. 회사의 백년대계 큰 그림은 이미 다 있는 것 같아요. 제가 100년을 못 사니까 아쉬울 뿐인데 욕심은 나요.” (2015년 발간된 책 ‘플레이’의 ‘인터뷰 : 김정주에게 묻다’ 중에서)

넥슨의 백년대계를 꿈꾼 게임업계 대부 김정주 창업자가 지난 2월 말 영면했다. 그의 나이 향년 54세. 고인의 갑작스러운 비보에 게임업계는 큰 충격에 빠졌고 애도 물결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디즈니’를 꿈꾸며 가열차게 달려온 그는 이제 다음 세대에게 넥슨의 백년대계를 향한 그림을 넘겼다. 김정주 없는 넥슨의 넥스트는 어떻게 그려질까.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 완료

김정주 창업자는 지난해 7월 큰 결심을 한다. 1994년 넥슨 창업 후 27년 만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결단이었다. 당시 김 창업자는 “지주회사 전환 후 16년 동안 NXC 대표이사를 맡아 왔고 이제 역량 있는 다음 주자에게 맡길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며 “저는 보다 자유로운 위치에서 넥슨컴퍼니와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겠다”고 밝혔다.

NXC는 김 창업자 일가가 지분 98% 정도를 보유한 회사로 넥슨을 비롯한 관계사의 지주사다. 그의 자리를 대신할 NXC의 신임 수장에 이재교 당시 브랜드홍보본부장이 낙점됐다. 또한 글로벌 투자총괄 사장(CIO)에 다국적 투자은행 출신인 알렉스 이오실레비치를 선임했다. 김정주 원톱 체제에서 전문 경영인 투톱 체제로 NXC의 경영 체제를 전환한 것이다. 김 창업자는 “이 신임 대표는 넥슨컴퍼니의 역사와 DNA에 대한 이해가 높은 분이고 알렉스 이오실레비치는 글로벌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성장해 나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며 “각자 전문 영역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사업을 다양화하고 회사를 성장시켜 사회에 보탬을 주는 기업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선임 배경을 밝혔다.

당시 이 같은 결정으로 넥슨의 향후 경영 전략이 창업자의 부재에 흔들릴 가능성이 낮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일찍이 전문 경영인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투톱 체제가 자리 잡았고 자회사인 넥슨코리아 역시 이정헌 대표가 맡아 경영을 한 지 5년 차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창업자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지난 3월 1일 사내 게시판을 통해 “저와 넥슨의 경영진은 그의 뜻을 이어 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더욱 사랑받는 회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김 창업자 일가가 보유한 NXC 지분 98.28%는 변수다. 김 창업자는 NXC 지분의 67.49%를 보유하고 있고 그의 부인인 유정현 NXC 감사가 29.43%, 자녀인 두 딸이 각각 0.68% 등 전체의 98.28%를 보유하고 있다.

넥슨의 지배 구조는 NXC·NXMH→넥슨→넥슨코리아 등으로 이어지는데, NXC는 본사인 넥슨 일본법인의 지분 28.5%를 직접 보유하고 있다. 이어 100% 자회사인 벨기에 투자법인 NXMH를 통해 18.8%를 간접 보유하고 있다. 일본 법인 넥슨은 넥슨코리아를 계열사로 두고 있고 넥슨코리아는 넥슨지티와 네오플 등 8개의 주요 계열사를 두고 있다.

아직까지 유족은 어떤 얘기도 밝히지 않았지만 김 창업자의 지분(NXC 지분의 67.49%)은 부인인 유정현 감사와 두 자녀에게 상속될 가능성이 높다. 단, 경영 개입의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앞서 김 창업자는 2018년 5월 재산 중 1000억원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자녀들에게 본인의 재산을 상속하되 회사 경영권은 승계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당시 “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삶을 살 것이고 자녀에게 회사의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을 것”이라며 “저와 제 가족이 가진 재산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말했다.

김 창업자는 계획 발표 1년 후인 2019년, 경영에서 손을 떼기 위한 수순으로 그와 가족이 보유한 98.28%의 NXC 지분 전량 공개 매각을 추진했지만 적당한 매수자가 없어 성사되지 않았다.

이에 업계에선 지분 매각 재추진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김 창업자의 지분 평가 금액이 8조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돼 절반(30억원 초과 시 상속 세율 50%)에 달하는 상속세를 내며 지분을 물려받는 대신 지분 매각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로 넥슨코리아 본사. /사진=넥슨코리아
경기 성남시 분당구 판교로 넥슨코리아 본사. /사진=넥슨코리아
디즈니 향한 꿈 계속

넥슨의 향후 비전도 주요 관심사다. 창업자가 꿈꾼 넥슨의 넥스트는 ‘한국판 디즈니’였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디즈니처럼 모든 콘텐츠 분야를 다 아우르게 되려면 갈 길이 멀다”며 “제가 디즈니가 제일 부러운 것은 디즈니는 아이들을 쥐어짜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김 창업자는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넥슨을 ‘아시아의 디즈니’로 만들겠다는 포부에 따라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나지만 글로벌 투자 기회 발굴과 인재 영입에 매진했다. 이를 위해 지난해 7월 대표직에서 물러날 당시에도 등기·사내이사 직위는 유지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최근까지도 미국 현지에서 업계 관계자들과 일정을 잡으며 도전을 계속했다.

특히 그는 콘텐츠 제작 투자에 재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6월 넥슨은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1조8000억원이란 대규모 투자를 예고하며 본업과 다른 사업에 진출해 외연을 확장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넥슨의 개발력에 지식재산권(IP)이 더해지면 IP 파워를 통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즉 한국의 디즈니를 꿈꿀 수 있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후 회사는 반다이남코홀딩스·세가사미홀딩스·코나미홀딩스·해즈브로 등에 총 8억7400만 달러(약 1조원) 투자를 단행했고 글로벌 IP 보유사들과 영화·드라마 제작에도 나섰다. 올해 초엔 세계적인 영화 감독 루소 형제와 프로듀서 마이크 라로카가 설립한 미국 AGBO스튜디오에 총 6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하며 콘텐츠 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인재 영입에도 공들였다. 디즈니의 최고전략책임자(CSO) 출신인 케빈 메이어를 신임 사외이사에 앉혔고 디즈니 출신이자 엔터테인먼트업계 전문가인 닉 반 다이크를 수석부사장 겸 CSO에 선임하며 글로벌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서의 변모를 꿈꿨다. 다이크 CSO는 디즈니에서 재직하는 동안 픽사·마블·루카스필름을 인수한 주역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향후 NXC가 글로벌 엔터테인먼트의 도전을 지속하며 미디어 분야에 투자를 집중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이크 CSO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미디어 협력 기회를 발굴하고 지난해 7월 선임된 이오실레비치 CIO가 미국 뉴욕에서 투자 기회를 꾀하는 그림이다.

[박스]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J의 꿈
넥스트 넥슨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
넥슨의 창업자. 넥슨에서는 J 사장으로 통했다. 1994년 스물일곱의 나이에 넥슨을 창업했다. 사명 넥슨은 ‘넥스트 제너레이션 온라인 서비스’의 준말이다. 다가올 미래의 온라인 콘텐츠 비즈니스에 대한 기대와 비전을 담았다.

비전을 담아 낸 세계 최초의 온라인 게임 ‘바람의나라’가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세계 최초 그래픽 기반의 온라인 게임이었다. 넥슨의 연매출 100억원 시대를 열게 한 대작으로, 김정주 창업자는 게임 산업의 불모지와 다름 없었던 한국에서 ‘온라인 게임 산업’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넥슨의 글로벌화를 통한 해외 시장 진출에도 성공함으로써 한국을 온라인 게임 종주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의 게임 신화를 새로 쓴 김 창업자는 2015년 그의 사실상 자서전과 다를 바 없는 책 ‘플레이’에서 넥슨의 다음 도전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다음은 책 ‘인터뷰 : 김정주에게 묻다’ 중에서 저자 신기주 씨와 김 창업자의 주요 인터뷰 부분을 발췌한 내용이다.

-넥슨이 디즈니 같은 회사가 되길 꿈꾸는 거죠.

“닌텐도도 아직 게임밖에 못 하고 있잖아요. 디즈니처럼 모든 콘텐츠 분야를 다 아우르게 되려면 갈 길이 멀어요. 제가 디즈니가 제일 부러운 것은 디즈니는 아이들을 쥐어짜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스스로 돈을 싸들고 와 한참 줄 서서 기다리며 디즈니의 콘텐츠를 즐기잖아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디즈니한테 돈을 뜯기죠. 넥슨은 아직 멀었어요. 우리 콘텐츠는 재미있는데 어떤 이들에겐 불량식품 같은 재미인 거죠.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해요.”

-‘테마파크’를 왜 안 짓죠. 디즈니 같은 기업을 꿈꾼다면서요.

“그게 역사책을 보면, 오늘 하면 안 된다고 적혀 있거든요. 앞으로 20년쯤 더 지나 더 많은 똘똘한 게임 지식재산권(IP)이 더 있어야 하는 거죠. 결국 절대 시간이 필요한 거죠. 10년쯤 더 넥슨을 튼튼하게 만들고 빠지면 또 다른 친구가 와서 다음 단계로 넥슨을 도약시키는 거죠. 닌텐도의 ‘슈퍼마리오’ 캐릭터와 우리가 가진 캐릭터 파워의 차이는 현격해요. 그런데 닌텐도도 아직 테마파크가 없잖아요. 디즈니 수준까지 넥슨을 키워 보고 싶은데 인간 수명이 길지 않다는 게 아쉽죠. 그래도 우리 세대에서 성급하게 굴지 않고 참고 가면 넥슨은 거기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땐 누가 넥슨을 이끌고 있을까요.

“모르죠. 사실 모든 회사는 결국엔 창업자가 한번은 잘리든 물러나든 하게 돼 있어요. 그러곤 다음 도약기로 넘어가는 거죠.”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