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은 길지-흉지 분분…대통령 운명, 리더십·능력 문제이지 풍수와 연계는 억지

[홍영식의 정치판]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3월 20일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견장에서 대통령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는 것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며 이전 뒤 조감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3월 20일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견장에서 대통령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는 것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며 이전 뒤 조감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청와대 터가 역사서에 등장한 것은 1426년 경복궁 후원(後園 : 집 뒤의 정원)으로 활용되면서다. 1868년 경복궁 복원 뒤 북원(北園)으로 불렸다. 일제는 1939년 이곳에 총독 관저를 지었다. 조선 왕실의 기를 누르고 ‘용맥(龍脈 : 산의 정기가 흐르는 산줄기)’을 자르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 후 총독 관저로 이사하면서 경무대라고 이름 지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4·19혁명 뒤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꿨다. 경무대가 국민에게 좋지 않은 인식을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승만 지우기’의 일환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9년 청와대를 신축(준공 1991년)했고 웅장한 궁궐같은 본관이 들어섰다.

청와대 터를 두고 오래전부터 길지(吉地)-흉지(凶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풍수지리학자 지종학 씨는 청와대와 경복궁은 뒷산인 북악에서 좌우로 뻗어 낙산을 청룡으로 하고 인왕산에서 사직단에 이르는 산줄기를 내백호로 삼고 있다고 했다. 지 씨는 ‘청와대 입지의 재조명’이란 책에서 앞에 남산이 있고 그 사이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어 ‘장풍득수(藏風得水 : 바람을 가두고 물을 구하기 쉬운 곳)’를 이루고 있다고 평가했다. 좋은 터라는 얘기다.

반면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땅의 눈물 땅의 희망’이란 책에서 청와대 앞길을 경계로 사람의 공간과 신의 강림지로 나뉜다고 했다. 청와대 터는 신의 강림지로 죽음의 공간이라는 얘기다. 최 전 교수는 청와대를 경기 성남시 세종연구소 터로 옮길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는 ‘우리땅 우리풍수’에서 “북악산은 저 혼자 우뚝 서 있는 형상이어서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지 못한다. 혼자 오만불손하게 서 있으며 남의 의견을 듣지 않으려는 고집불통의 모습”이라며 청와대는 살 터가 되지 못한다고 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하야·시해·감옥행·탄핵 등 시련을 겪은 것도 흉지 사례로 거론된다.

13세기 몽골군 병참 기지 활용 이후 군사 주둔지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는 것을 두고 신구 권력이 힘겨루기를 벌인 끝에 3월 28일 만찬 회동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이전에)협조하겠다”고 하면서 가까스로 갈등은 봉합됐다. 용산은 어떤 곳일까. 풍수상 길지와 역사상 치욕이 엇갈린다. 조선 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는 ‘이곳 언덕에 용이 나타나 용산(龍山)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중기 인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화나루 동쪽 언덕의 산 모습이 용이 있는 형국이라 생긴 이름’이라고 적혀 있다.

용은 왕을 뜻한다. 이 때문에 많은 풍수지리가들은 이곳을 명당으로 꼽는다. 넓은 평지에 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있어 물자 수송에 편리하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 용산에는 군사용 물자 창고인 강창(江倉), 휼미와 대동미를 보관하던 신창(新倉) 등 각종 창고가 들어섰다. 북쪽엔 남산이 성벽 역할을 하고 있어 군사 요충지로도 꼽혔다.

이런 지리적 환경 때문에 용산은 아픈 역사도 갖고 있다. 13세기 말 몽골군이 일본 정벌을 위한 병참 기지로 이곳을 활용하면서 외국군 주둔의 역사가 시작됐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용산을 주둔지와 병참 기지로 삼았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가 지휘소로 이용했고 청·일 전쟁 때 일본군이 전초 기지로 삼았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후 본격적인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았다. 일본과 대륙 세력이 번갈아 가며 군사 기지로 활용한 상처 깊은 곳이다. 1945년 광복 뒤 미군 시대가 열렸다. 미군은 1949년 물러났다가 6·25전쟁 이후 다시 주둔한 뒤 최근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용산은 한국의 품에 안기게 됐다.

용산을 청와대 이전 후보지로 꼽은 것은 윤 당선인 만이 아니다. 문 대통령의 경남고 동기이자 절친인 건축가 승효상 씨는 국방부를 외곽으로 옮기고 그 일부를 청와대로 활용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그는 2016년 11월 CBS와 인터뷰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지은 지금의 청와대 본관에 대해 “전형적인 봉건 왕조 건축의 짝퉁 같은 모습이고 내부 공간이 너무 넓은 게 문제”라며 “봉건 왕조의 허위의식을 빌려 만든 것이어서 사람도 허위적 위세를 갖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청와대 이전 후보지로 “한강변이라도 좋고 용산공원이라도 좋고 갈 데는 굉장히 많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를 광화문으로 옮기겠다고 공약했지만 경호 등 현실적 이유로 접었다.

“청와대 한 번 들어가면 불통과 부정부패 생겨”

윤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는 데 대한 의지는 확고하다.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여론 조사에서 이전 반대가 많이 나오는 것에 대해 “지금 여론 조사에서 몇 대 몇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강조했다. 윤 당선인은 “많은 전직 대통령이 선거 때 청와대에서 나온다고 했고 국민께서 지지해 주셨다”며 “문 대통령도 두 번이나 (이전을) 말씀하셨던 사안”이라고도 했다.

윤 당선인이 이전을 고수하는 이유로 청와대의 불통 구조를 꼽고 있다. 윤 당선인 측 김용현 ‘청와대 이전 태스크포스(TF)팀’ 팀장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윤 당선인은 “나도 거기에 들어가면 눈치 안 보고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고 얼마나 좋겠나. 그러나 국민을 위한다면 내가 불편하더라고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다. 청와대에 한 번 들어가면 국민의 감시가 없어지고 거기서부터 불통과 부정부패가 생긴다는 것이다. 최순실 씨 관련 의혹 수사를 하면서 이런 인식을 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이 참모들과 바로 옆에서 수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고 원활한 대국민 소통을 위해서도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는 탈피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하다. 이를 위해 기자들과도 수시로 만날 수 있는 구조를 원하고 있다.

실제로 청와대는 대통령이 나 홀로 근무하는 구조다. 대통령 집무실과 부속실이 있는 본관과 비서실장·수석비서관 등 참모들이 근무하는 여민관은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도보로는 10분 정도 걸린다. 문 대통령은 여민관에 집무실을 따로 마련했지만 이전 정권들에선 대통령과 참모들 간 대면 접촉이 힘들어 전화 통화나 서면 보고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역대 정권에서 이 500m가 ‘불통’과 ‘인(人)의 장벽’을 만들어 낸 셈이다.

참모들이 대통령을 한 번 만나려면 일정을 관리하는 부속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다른 참모들의 감시가 힘들다 보니 ‘문고리 권력’의 힘이 커지는 부작용도 생겼다. 지금의 청와대는 대통령 집무실과 기자들이 상주하는 춘추관과는 한참 멀다. 도보로 15분 정도 소요된다. 공식 기자 회견이 아닌 한 대통령이 이곳을 자주 들르기는 매우 어렵다.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에 대해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이 큰 틀의 접점은 찾았지만 난관은 많다. 이전 시기를 두고 윤 당선인은 취임 전을 고수하고 있지만 이에 반대했던 청와대는 특별한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다. 마냥 충돌하는 모양새가 바람직하지 않아 문 대통령이 한 발 물러섰지만 청와대와 여당의 반대 기류는 여전하다.

그렇더라도 여당에서 윤 당선인을 향해 ‘레임덕이 아니라 취임덕’, ‘윤석열 씨’, ‘칼사위를 들이민다’, ‘망나니’ 등을 언급하며 공격하는 것은 당선인을 인정조차 않겠다는 것으로 들린다. 특히 확인되지도 않은 풍수지리·무속까지 거론하며 용산 이전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면 말고’식, ‘괴담’식 여론전과 다를 바 없다. 대통령의 운명은 결국 개인의 리더십과 능력의 문제일 뿐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풍수와 연계하는 것도 억지가 아닐 수 없다.

홍영식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