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 와인 전문 매장 확대에 와이너리 인수까지 광폭 투자…초저가 대중화에 코로나19가 기름 부어

[비즈니스 포커스]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인근에 위치한 와인 전문 매장 '오비노미오' 매장 전경. 사진=서범세 기자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인근에 위치한 와인 전문 매장 '오비노미오' 매장 전경. 사진=서범세 기자
“맥주도 제쳤다.”

최근 와인 시장이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홈술’ 문화로 와인이 수입 주류의 대세로 부상했다. 유통업계는 홈술족을 잡기 위해 전국 각지에 와인 전문점을 개설하며 손님 모시기에 나섰다.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겨냥해 복합 문화 공간으로 공간 변화를 시도하거나 와이너리를 인수하며 와인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는 회사도 있다. 와인에 흠뻑 젖은 주류 시장을 살펴봤다.

유통사, 와인 전문 매장 출혈 경쟁

지난 4월 5일 점심시간,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인근에 있는 와인 전문 매장 오비노미오를 찾았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이곳을 찾는 직장인과 인근 거주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인 직장인들은 밝은 분위기의 와인 전문 매장에 관심을 보였다. 이 매장의 박윤희 점장은 “기존 와인 매장은 어두운 계열의 색채를 쓰거나 모던한 분위기가 많은데 좀 더 밝은 색채를 사용해 호기심을 끌고 접근성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며 “소주나 맥주처럼 와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주류라는 것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오비노미오는 와인 수입 사업을 하는 롯데칠성음료가 3월 28일 문을 연 와인 직영점이다. ‘내 와인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콘셉트로, 매장 전면에 통유리를 사용해 외부에서도 볼 수 있게 했다. 시음 공간을 마련했고 주변 레스토랑과 제휴해 콜키지 프리(개인이 가지고 온 주류를 개봉하거나 잔 따위를 무료로 제공) 서비스를 도입했다. 와인을 구매하는 것에서 나아가 복합 문화 공간으로의 기능을 제공하겠다는 구상이다.

롯데칠성음료는 기존 와인 전문 매장을 오비노미오 브랜드로 통합하는 등 연내 추가 출점을 계획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인근에 위치한 와인 전문 매장 '오비노미오'에서는 와인 구매뿐 아니라, 시음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사진=서범세 기자
서울 용산구 신용산역 인근에 위치한 와인 전문 매장 '오비노미오'에서는 와인 구매뿐 아니라, 시음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사진=서범세 기자
와인 전문점 출점에 계열사 간 경쟁도 한창이다. 또다른 롯데 계열사인 롯데마트(롯데쇼핑)는 최근 서울 잠실에 이어 경남 창원에 대형 와인 전문 매장인 ‘보틀벙커’를 열었다. 전체 매장 1층 면적의 70%를 보틀벙커에 할애할 만큼 와인이라는 킬러 콘텐츠를 신성장 동력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다른 유통 업체들도 적극적이다. 신세계는 최근 계열사 신세계L&B가 한국 와인 수입사 1위에 오른 여세를 몰아 신세계프라퍼티를 통해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고급 와이너리를 약 3080억원에 인수했다. 한국 유통 대기업이 미국 현지 와이너리를 인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마트도 와인 전문점 형태의 ‘와인앤리큐어’ 매장을 계속 확대할 방침이다.

와인 저변 확대에 큰 공을 세운 편의점도 이번 경쟁의 한 축이다. GS리테일·CU·세븐일레븐 등 주요 편의점이 자체 특화 매장을 확대하며 와인 고객 잡기에 혈안이다. 그중 GS25는 고급 와인부터 지역 명주까지 1000여 종의 주류를 준비한 주류 특화 매장을 전북 전주에 최근 개장하며 화제를 모았다.

편의점부터 백화점·와인 수입사까지 전 유통사가 와인 경쟁에 나선 것은 최근 와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1~8월 와인 수입액은 3억7045만 달러를 기록했다. 금액 기준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배 가까이(96.5%) 늘었고 전년 한 해 연간 수입액(3억3002만 달러)도 넘어섰다.

와인은 수입 주류 1위 자리마저 꿰찼다. 2019년까지 주류 수입 1위는 맥주가 차지했지만 2020년 와인 수입액이 27% 증가한 반면 맥주는 19% 줄면서 처음으로 역전됐다. 격차는 더 벌어졌다. 와인은 2021년 1~7월 전년보다 102.4% 늘어난 반면 맥주는 4.8% 감소하며 홈술·혼술 대명사의 지위마저 위태롭게 됐다.
맥주 제친 와인, 홈술 문화가 바꾼 ‘와인’ 지형도
2000년대와 다른 와인 열풍

사실 와인 열풍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4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의 효과로 와인 가격이 떨어지고 와인을 소재로 한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이 큰 화제를 모으면서 와인의 몸값이 뛰었다. 삼성전자는 와인 잔의 모습을 형상화한 LCD TV ‘보르도’를 내놓았을 정도다. 이 영향으로 2007년 와인 수입액이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돌파했고 와인 시장의 장밋빛 예측이 가득했다. 인기는 얼마 가지 못했다. 수입 맥주의 인기에 와인 수입액은 주춤했고 10년 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와인 수입 업체는 폐업하기도 했다.

수입 맥주의 공세에 밀려 주춤하던 와인은 2019년을 기점으로 다시금 성장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대형마트에서 초저가 와인을 선보이며 와인 대중화의 포문을 연 것이다. 2019년 당시 이마트는 와인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깨기 위해 4900원짜리 칠레산 와인을 선보였다. 이마트 관계자는 “와인 입문자들이 느끼는 가격 저항선을 당시 인기였던 수입 맥주 2캔 가격 수준인 5000원으로 보고 그 이하로 가격을 설정했다”고 말했다. 가격은 초저가지만 품질에는 공을 들였다. 산지에서 판매하는 가격이 2배가 넘는 다른 1만원 중·후반대 와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수준으로 품질을 갖췄다. 이마트는 와인 가격을 낮추기 위해 일반적으로 와인 수입 시 개런티하는 3000병의 300배가 넘는 100만 병을 한 번에 기획해 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었다. 고객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판매를 시작한 지 100일 만에 84만 병이 판매돼 곧바로 100만 병 추가 물량을 기획할 정도였고 구매 고객의 55%가 지난 6개월간 와인을 한 번도 구매한 적이 없는 신규 고객이었다.
이마트 Wine&Liquor(와인&리쿼) 매장. 사진=이마트 제공
이마트 Wine&Liquor(와인&리쿼) 매장. 사진=이마트 제공
와인 시장을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한 번 더 폭발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회식과 모임이 줄었지만 홈술·혼술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고도주보다 저도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주류가 인기를 끌었다. 소비자의 선택은 와인이었다. 김유미 GS리테일 음용기획팀 매니저는 “기존 와인은 프리미엄 인식이 강했는데 코로나19 사태라는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 회식 문화의 변화, 홈술·혼술 트렌드, 최근 MZ세대의 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큰 몫으로 작용했다”며 “최근에는 와인 가격대 스펙트럼이 넓어지면서 초저가 와인과 가성비 와인 등이 많아져 고객 선택의 폭이 확장됐다”고 말했다.

특히 2020년 4월 3일부터 정부 규제가 완화돼 주류의 ‘스마트 오더’가 허용됨에 따라 전국 어디서든 5000여 종의 와인을 포함한 다양한 주류를 구매할 수 있게 됐다.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오프라인 매장에서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편의점이 와인의 성지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전국 오지에도 점포가 있는 편의점을 통해 다양한 와인을 구매할 수 있는 채널이 생긴 것이다. 김 매니저는 “코로나19 사태와 MZ세대 소비 문화의 변화, 술에 대한 인식과 정부의 스마트 오더 허용 등 복합적인 원인이 긍정적인 시너지를 내고 있다”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주류 열풍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