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기술로 경쟁 패러다임 바꾼 게임 체인저
[비즈니스 포커스]
자율 운항 선박이 친환경·스마트 두 축을 중심으로 한 조선·해양 분야의 패러다임을 바꿀 게임 체인저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한국을 비롯해 노르웨이·핀란드·미국·일본·중국 등 조선·해운 강국들이 자율 운항 선박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관련 기술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자율 운항 선박은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빅데이터·첨단 센서 등을 융합해 지능화된 시스템이 선박을 제어하고 사람 없이도 운항이 가능한 차세대 고부가 가치 선박을 말한다.
환경 규제 강화로 자율 주행 차량에 이어 자율 운항 선박에 대한 기술 개발이 가속화되고 있다. 조만간 100% 전기 동력을 이용한 무인 자율 운항 선박으로 저소음에 배기가스가 전혀 없는 해양 운송 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자율 운항 선박은 자율 운항 기술 수준에 따라 레벨 1~4단계로 분류된다. 국제해사기구(IMO)는 레벨 1은 자동화된 프로세스와 의사 결정 지원 선박, 레벨 2는 선원이 탑승하고 원격 제어가 가능한 선박, 레벨 3는 선원이 탑승하지 않고 원격 제어가 가능한 선박, 레벨 4는 선박 스스로 의사 결정하는 완전 자율 운항 선박으로 정의한다.
정부는 2025년 레벨 3에서 2030년 레벨 4 도달을 목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세계 자율 운항 선박 시장에서 50%의 점유율을 차지하겠다는 계획이다.

자율 운항 선박은 조선·해양업계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먼저 온실가스 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트럭 운송을 대체하면 도로에서의 질소산화물·이산화탄소 등 오염 물질 배출도 줄일 수 있다. 해운 분야는 온실가스 배출량의 13%를 차지한다.
국제해사기구(IMO)가 해상 온실가스 배출 저감을 위해 IMO 2020(IMO가 2020년 1월 1일부터 시행한 황산화물 함유량 규제 조치)을 시행해 환경 규제 기준을 강화하면서 액화천연가스(LNG) 추진선 도입이 늘고 있다. 향후에는 수소·암모니아 등 친환경 연료를 사용하는 친환경 선박으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된다.
강화되는 환경 규제에 맞추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율 운항 선박, 스마트 항만으로 대표되는 디지털화다. 조선·해운업계는 2050년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해 2008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40%, 2050년까지 70% 감축해야 한다.
선박 운용 비용도 전통 선박 대비 25% 이상 절감된다. 선박 운용에서 80%를 차지하는 것이 연료비와 인건비다. 자율 운항 선박으로 날씨와 운항 노선 등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 경제적인 항로를 찾고 최적 항로로 가게 되면 연료비와 인건비를 절감해 수익성을 개선할 수 있다.
완전 자율 운항 선박이 완성되면 선원 거주 공간, 이동 통로, 안전 장비 등이 필요없기 때문에 선박을 공기 저항이 적은 형태로 설계할 수 있고 사람을 위한 공간에 화물을 더 적재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중앙해양안전심판원에 따르면 한국의 해양 사고 발생 건수의 82%가 사람의 실수로 인한 운항 과실 때문에 발생한다. 자율 운항 선박이 상용화되면 인적 과실로 인한 해양 사고를 75% 이상 감소시켜 안전성을 크게 개선할 수 있다.
해상 비즈니스의 디지털화는 역설적으로 해킹 등 사이버 위협과 리스크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최근 정보통신기술(ICT)이 선박에 확대 적용되고 자율 운항 기술 개발이 본격화됨에 따라 해킹 등 각종 사이버 공격으로부터 선박 시스템과 데이터를 보호하는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해적에 의한 물리적인 공격, 해킹과 같은 사이버 공격을 모두 대비해야 한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해적이 배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거북선처럼 윗면을 둥글게 설계하거나 뾰족한 형태로 만들기도 한다.

글로벌 시장 조사 업체 어큐트마켓리포츠에 따르면 전 세계 자율 운항 선박의 시장 규모는 2021년 95조원에서 2025년 180조원 규모까지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조선 빅3와 해운 강국들이 모두 뛰어든 이유다.
현대중공업그룹 조선 중간 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은 최근 디지털 트윈 기술로 가상 공간에서 자율 운항 여객선을 시운전하는 데 성공했다.
가상 공간에서 이뤄지는 사이버 시운전은 실제 시운전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극한의 조건에서도 시뮬레이션이 가능하고 해상에서 이뤄지는 시운전 기간을 줄여 비용도 최대 30%까지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선박 자율 운항 전문 회사인 아비커스는 5월 대형 선박의 대양 횡단 자율 운항에도 도전한다. 아비커스는 AI가 선박의 상태와 항로 주변을 분석해 증강현실(AR)로 보여주는 하이나스(HiNAS)와 선박이 항구에 접안·이안할 때 지원하는 하이바스(HiBAS) 등 자율 운항 핵심 기술도 자체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총길이 10km의 경북 포항 운하에서 세계 최초로 자율 운항 2단계 기술을 적용한 12인승 크루즈로 40분간 완전 자율 운항에 성공했다. 핵심 기술을 레저 보트에도 적용, 세계 최초 자율 운항 레저 보트 상용화도 목표로 삼고 있다. 레저 보트 시장에서 ‘바다 위 테슬라’가 된다는 목표다.
삼성중공업은 지난해 9월 세계 최초로 두 척의 대형 선박이 해상에서 자동으로 충돌을 회피하는 기술 실증에 성공했다.
신안군 가거도 인근 해역에서 목포해양대의 9200톤급 대형 실습선인 ‘세계로호’와 삼성중공업의 300톤급 예인선 ‘삼성 T-8’이 각자 지정된 목적지를 향해 최대 14노트 속력으로 자율 운항했고 마주 오는 상황에서 최소 근접 거리(DCPA)인 1해리 이상 차이로 안전하게 회피했다. 두 선박에는 삼성중공업이 독자 개발한 자율 항해 시스템(SAS)이 탑재됐다.
대우조선해양은 2025년 출시를 목표로 대형 자율 운항 상선을 개발하고 있다. 이를 위해 스마트십 플랫폼인 DS4를 기반으로 자체 개발된 기술을 시험하기 위한 단비(DAN-V)호를 건조했다.
실제 해역에서 장비 연동, 원격 조종 등 운항 시험을 통해 자율 운항 선박에 대한 단계별 실증을 진행할 계획이다. 대우조선해양은 한국선급과 협력해 단비호에 대한 검증·인증을 진행할 예정이다.

자율 운항 선박은 전통적 노동 집약적 산업인 조선 산업의 경쟁 패러다임을 친환경과 자율 운항으로 바꾸고 있다. 이에 따라 가격 경쟁에서 기술 경쟁으로 경쟁의 판도도 전환되고 있다.
그동안 가격 경쟁력을 기반으로 한 중국 조선 업체들의 저가 수주 공세에 어려움을 겪었던 조선업계에 자율 운항 선박은 위기이자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노르웨이 등 해운 강국에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뒤처져 있어 기술 개발에 더욱 속도를 내야 한다. 자율 운항 선박 기술은 유럽이 가장 앞서 있다. 글로벌 연구·개발(R&D)을 주도하는 곳은 노르웨이 콩스버그, 영국 롤스로이스 마린, 핀란드 바르질라, 스위스 ABB 등이다.
특히 콩스버그는 스마트 선박 개발에서 가장 앞서 있는 기업 중 하나인 롤스로이스 마린을 2018년 인수해 선박 자동화와 항해 컨트롤 시스템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뽐내고 있다. 콩스버그는 세계 최초로 완전 무인 자율 운항이 가능한 100TEU급 소형 컨테이너선을 발주하기도 했다.
업계에선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면 한국 조선사들이 하청 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김용균 정보통신기획평가원 수석은 “자율 운항 선박으로 조선 산업의 경쟁 판도가 가격 경쟁에서 기술 경쟁으로 전환된다는 점은 한국 조선업계에 나쁘지 않은 소식”이라면서 “다만 원천 기술이 부족한 만큼 기술 개발에서 경쟁국 대비 뒤처지면 핵심 기술을 외산에 의존하고 선박 껍데기만 제조하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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