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창 등 기술 리더가 끌고 든든한 정부 밀고…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핵심에 서다

“반도체 등에 업고 19년 만에 한국 추월”…대만 경제 이끄는 네 마리 용
1.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2. 국내총생산(GDP) 대비 무역의 비율이 높고 반도체가 수출 대들보 역할을 한다.
3.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지만 미국의 동맹국이다.
4. 곧 이 국가의 1인당 GDP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국이 아니라 대만 얘기다. 대만은 한국·홍콩·싱가포르와 함께 한때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렸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대만 경제는 한동안 지지부진했다. 국제 경제 시장에서는 신흥국의 꼬리표를 떼지 못했고 자국 젊은이들에게는 ‘귀신섬’이라는 자조 섞인 한탄이 나올 때도 있었다. 그러던 대만이 변했다. 몇 년 새 성장세가 심상치 않다.

2019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 TSMC는 삼성전자의 시가 총액을 앞섰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TSMC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TSMC를 앞세운 대만은 세계의 반도체 공장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대만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을 앞지를 수 있다는 예측이 나왔다(IMF).

경제성장률은 몇 년째 대만이 한국을 앞서 왔다. 그런데 한국이 대만에 1인당 GDP를 추월당하는 것은 19년 만이다. 대만 경제 부활을 이끈 주인공은 단연 반도체다. 반도체는 지난해 대만 수출액의 37%, GDP의 18%를 차지한 핵심 산업이다. 대만 반도체의 성장을 일군 ‘대만의 네 마리 용'을 분석했다. 1. 파운드리 창시자, 모리스 창
장중머우(모리스 창) TSMC 창업주 겸 전 회장.[로이터=연합뉴스]
장중머우(모리스 창) TSMC 창업주 겸 전 회장.[로이터=연합뉴스]
56세에 창업해 반도체 ‘파운드리’라는 사업 모델을 처음 만들었다. 74세에 은퇴했다가 금융 위기에 처한 회사를 위해 78세에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2018년 87세 나이로 은퇴할 때는 회사의 청사진을 짜고 나왔다. TSMC 창업자이자 전 회장인 장중마오(모리스 창)의 약력이다. 창 전 회장이 중년에 시작해 노년까지 키운 TSMC는 시가 총액 630조원에 달하는 세계 1위 파운드리 회사다.

모리스 창의 인생은 대만 반도체 산업의 역사 그 자체다. 창 전 회장이 회사를 설립한 것은 그가 56세던 1987년. 대만 정부가 반도체 사업을 키우기 위해 그에게 손을 내밀면서다. 창 전 회장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서 기계공학 학·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유명 반도체 기업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서 20년간 근무했다. 창 전 회장은 TI에서 글로벌 반도체 부문 최고 간부로 일했고 제너럴인스트루먼트(GI)로 이직해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지냈다.

그러던 중 대만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창 전 회장을 고국으로 불렀다. 1985년 대만에 온 창 전 회장은 반도체 사업의 분업화를 예견했다. 정보기술(IT) 기업이나 다른 반도체 회사에서 반도체 설계도를 받아 생산만 해주는 파운드리 사업 모델을 고안해 낸 이유다.

1980년대 반도체 산업은 지금처럼 분업화돼 있지 않았다. 설계·제조·패키징 등 모든 과정을 한 기업에서 진행했다. 일본과 미국 기업이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파운드리 모델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창 전 회장은 나이와 지위를 내려놓고 스타트업 최고경영자(CEO)의 모습으로 TSMC의 설립 자금을 빌리러 다녔다. 창업 당시 10여 통의 편지를 미국과 일본 대기업에 직접 보내기도 했다. 이때 인텔·미쓰비시·도시바에 거절당했고 필립스만 유일하게 투자에 동의했다.
TSMC는 지난해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53%를 차지하며 압도적 1위 자리를 유지했다.[한국경제]
TSMC는 지난해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53%를 차지하며 압도적 1위 자리를 유지했다.[한국경제]
정부 자금과 필립스 자금을 받아 1987년 TSMC를 창업한 후에도 한동안 대기업이 자체 생산하지 못하는 주문을 넘겨받아 생산하는 하청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은 설립 2년 후 세계 냉전이 종식되면서 급변했다.

1990년부터 IT가 발전하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엔비디아·퀄컴 등 반도체 웨이퍼 설계 능력을 갖춘 기업들이 등장했다. 창 전 회장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인건비가 비싼 미국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를 통해 생산 시설을 갖추는 대신 설계 능력 고도화에 집중했고 TSMC는 그 물량을 받아 생산에 집중하며 반도체 공정 능력을 고도화했다.

TSMC는 현재 애플·엔비디아·퀄컴 등을 포함한 500여 개의 고객사를 두고 있다. 창 전 회장은 2018년 87세의 나이에 TSMC를 내려놓았다. 창 전 회장 은퇴 이후에도 TSMC는 여전히 성장 중이다. 지난해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53%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1위 자리를 굳혔고 매출은 568억 달러(약 70조원)를 올렸다. 영업이익률은 분기마다 40~45%를 기록하고 있고 올해 설비 투자액으로 최대 440억 달러(약 53조3200억원)를 쓰겠다고 발표했다.

창 전 회장은 올해 대만 경제지와의 인터뷰에서 대만의 경쟁자는 한국밖에 없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에는 이건희가 있었지만 (일본) 히타치나 도시바·NEC에는 그런 인물이 없었다”며 한 국가의 반도체 산업 성장은 훌륭한 리더와 인재에게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창 전 회장은 “미국이나 일본이 반도체 제조에서 옛 지위를 회복할 수 있을지는 당연하게도 대만·한국·중국이 어떻게 되는지에 달렸다”고 예상했다. 2. ‘반도체 방패막’ 세운 정부, TSMC 직원은 예비군 훈련도 예외
2016년 당선된 차이잉원 대만 총통[연합뉴스]
2016년 당선된 차이잉원 대만 총통[연합뉴스]
대만의 반도체 산업 성장을 이끈 둘째 용은 정부다. 반도체 업계 전문가들에게 모리스 창에 버금가는 ‘반도체 위인’을 꼽아 달라고 하자 “모리스 창 말고는 신화적 인물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국은 대기업 오너의 리더십에 의해 반도체 산업이 성장했지만 대만은 철저히 국가 주도로 성장해 왔다.

대만 정부는 1973년 산업 발전을 위해 국책 연구 기관인 공업기술연구원(ITRI)을 세웠다. 지금은 연구원 6000명, 특허 3만 개, 1년 예산 1조565억원에 달하는 세계 최대 융합기술 국책 연구소다.

TSMC와 대만 파운드리 기업 UMC 역시 ITRI가 배출한 기업이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ITRI 회장으로 대만에 왔다가 정부를 설득해 투자금을 받고 민간 기업들을 모아 TSMC로 분사했다. UMC 역시 ITRI에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정부의 창업 지원을 받고 떨어져 나왔다.

이렇게 ITRI에서 분사한 기술 기업이 300여 개에 달하고 분사 기업으로 간 엔지니어가 2만여 명이다.
대만 국책 연구기관 ITRI는 TSMC, UMC 등 대만 하이테크 기업들을 배출했다.[ITRI 페이스북]
대만 국책 연구기관 ITRI는 TSMC, UMC 등 대만 하이테크 기업들을 배출했다.[ITRI 페이스북]
전황수 한국정보통신연구원(ETRI) 책임연구원은 “대만 정부가 1973년 신주과학단지에 ITRI를 설립한 이후 신주과학단지에 연구 인력과 기술·예산이 집중되고 있다”며 “국립칭화대·국립교통대·TSMC·UMC·미디어텍·리얼텍 등 연구 기관과 대학·기업의 산학연 협력이 활성화돼 대만 하이테크 산업 발전을 선도하며 실리콘밸리 다음의 성공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전 책임연구원은 TSMC가 정부 국책 연구원에서 출발한 만큼 지금까지도 세금 감면과 인센티브, 인재 육성 등 다양한 방면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TSMC가 1993년 민영화된 후에도 대만 정부는 국가개발기금을 통해 전체 지분의 6.4%를 소유하고 있다.

대만 정부는 반도체 인재 육성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대만도 한국처럼 반도체 인재난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나섰다”며 “각 대학이 반도체 전공 신입생을 1년에 2번 뽑을 수 있게 하고 정원을 10%씩 늘릴 수 있게 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며 반도체 인재난에 맞서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만 반도체 산업의 가장 큰 지원자는 정부다. 특히 2016년부터 대만을 이끌고 있는 차이잉원 총통은 2019년 초부터 금융·세제 지원·용수·전력·인력 등 인프라 지원을 묶은 패키지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대만 반도체 기업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대만 정부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인식은 최근 국방부 발표에서도 알 수 있다. 대만 국방부는 최근 중국의 군사 위협이 커지자 올해부터 예비군 훈련을 강화하기로 했다. 2년에 한 번 하던 예비군 훈련에 더해 1년에 1번 14일에 걸친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TSMC 직원에게는 예외가 적용된다. 대만 정부가 TSMC를 ‘군수 산업’으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타이완타임스에 따르면 최근 대만 국방부는 “병역법상 군수 산업 출신의 ‘특수 기술자’가 징집을 연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TSMC는 군수 산업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의무 군복무를 마치고 1년 이상 근무한 직원은 예비군 소집 연기를 신청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반도체를 산업이 아니라 국가 안보로 여기는 대만 정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3. 대만의 ‘깐부’ 미국과 일본
반도체를 경제 안보로 여기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올리고 있다.[연합뉴스]
반도체를 경제 안보로 여기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올리고 있다.[연합뉴스]
TSMC는 군사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대만의 가장 큰 방패막이다. TSMC의 주요 고객은 미국 기업이다. 애플·엔비디아·퀄컴·인텔 등 미국 IT 산업을 주무르는 기업들이 모두 TSMC의 고객이다. TSMC 매출의 60% 이상이 미국에서 나온다.

엔비디아와 퀄컴의 반도체 칩은 다시 전 세계 기업의 IT·전자 기기에 들어간다. 중국의 군사적 위협으로 TSMC 공장이 멈추면 세계 경제가 멈출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대만과 미국의 동맹 관계는 더욱 끈끈해지고 있다.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 미국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지정학적으로도 대만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에 섰기 때문이다.

중국 역시 TSMC를 포기하기 어렵다. 중국이 몇 년 전부터 반도체 굴기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TSMC의 기술력을 따라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TSMC는 반도체 제조 공정 중에서도 가장 앞선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수율 역시 대체 불가능한 수준이다.

미·중 패권 갈등이 심해질수록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상승하는 이유다. 현재 TSMC는 미국이 짜고 있는 반도체 동맹의 굳건한 축이다. 미국의 ‘반도체 내재화’ 전략을 위해서도 TSMC는 미국에 중요한 기업이다. TSMC는 미국 애리조나 주에 120억 달러(약 15조원)를 투자해 5나노미터(1nm은 머리카락 굵기의 10만 분의 1미터) 공정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다.

TSMC는 이 공장에서 2024년부터 12인치 반도체 웨이퍼를 월 2만 장 양산한다. 앞으로 10~15년에 걸쳐 공장 5개를 더 지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 TSMC는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독일에 반도체 공정 시설을 건설하며 대만판 반도체 동맹을 짜고 있다.

TSMC는 일본 구마모토현에 9800억 엔(약 10조원)이 투입되는 반도체 공장을 착공했다. 일본 정부가 투자금의 절반 가까운 4000억 엔(약 4조원)을 보조금으로 지원한다. 일본 국회는 작년 12월 첨단 반도체 공장 신·증설 때 비용의 절반을 지원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기도 했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AMD]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AMD]
글로벌 팹리스 꽉 잡은 대만계 CEO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엔비디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엔비디아]
글로벌 반도체 네트워크를 주무르는 대만계 파워 역시 대만의 반도체 성장과 뗄 수 없는 사이다. 특히 미국 팹리스(반도체 설계·개발 전문 회사) 공룡인 엔비디아와 AMD CEO가 모두 대만계 미국인이다. 엔비디아와 AMD는 TSMC의 가장 큰 고객이기도 하다.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 겸 CEO는 창 전 회장에게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작은 회사의 사장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엔비디아와 TSMC는 팹리스·파운드리로서 함께 성장해 왔다.

전 책임연구원은 “모리스 창 역시 미국 기업에서 오랫동안 반도체 사업을 이끌어 왔고 미국 팹리스 산업과 TSMC는 함께 성장했다”며 “글로벌 대만 반도체 생태계에서 대만 출신 기업인들이 TSMC의 든든한 우군이 돼 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