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D 등 대학 내 계약학과 개설로 자체 인재 양성…법 개정 필요성도
[비즈니스 포커스]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가톨릭관동대에는 특별한 강좌가 하나 있다. 비트코인의 기반 기술로 꼽히는 ‘블록체인’ 강좌다.일부 대학원에서는 블록체인 과정이 학점제 형태로 신설됐지만 학부 과정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학과 개설 시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해야 하고 강좌 개설에 따른 타 강좌의 폐강이 따르므로 신구 간 갈등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에 블록체인 강좌가 정규 과목이라니”라며 의아해 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어려운 여건 속에 이 학교는 지난해 3월 블록체인 강좌를 신설했다. 프로젝트를 주도한 원성권 경영학과 교수는 “블록체인은 4차 산업혁명의 기반 기술이 되는 핵심”이라며 “산업 생태계가 구축돼 개발·관리·기획 등 일자리 창출이 기대되는 상황에서 블록체인 교육은 시대가 요구하는 필수 교육이 됐다”고 말했다. 가톨릭관동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중심이 될 블록체인 기술을 지역 사회에서 심화 교육함으로써 핵심 인재를 양성, 배출하겠다는 목표다.AI, 차세대 통신 등 첨단 학과 속속 최근 대학에 반도체, 인공지능(AI), 차세대 통신, 실감 미디어, 블록체인 등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이른바 첨단 기술 관련 학과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대학들은 시대 변화에 발맞춰 관련 학과를 신설하거나 기존 학과를 탈바꿈하는 등 재정비에 나섰다. 기업이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학과 운영비를 지원하고 졸업생을 100% 채용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기업체 취업형 계약학과도 급증하고 있다. 이도 여의치 않으면 학과 신설 대신에 주말 집중 수업 등을 선택하는 등 시대가 요구하는 인력 양성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첨단 기술 학과의 대표적인 사례가 AI 학과다. 한국 최초로 인공지능학과를 개설한 학교는 가천대로 2020년부터 신입생을 모집했다. 이후 AI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면서 2021년부터 서울권을 비롯한 전국 대학으로 확대됐다. 현재 신설된 관련 학과는 대략 50개에 달한다.
숭실대는 기존 스마트시스템소프트웨어학과를 AI융합학부로 개편했다. AI융합학부는 전자공학과 소프트웨어학을 융합해 AI 융합 시스템을 교육하고 연구하는 학과다. 자율주행·사물인터넷(IoT)·빅데이터·시스템하드웨어·시스템소프트웨어 등으로 AI 맞춤형 교과 과정을 진행해 AI 핵심 분야의 필수 인재로 성장시킨다는 목표다.
서울과학기술대는 지능형반도체공학과·미래에너지융합학과 등 첨단 학과를 신설하면서 ‘첨단 인재 전형’이라는 특별 전형을 같이 신설했다. 지능형반도체공학과는 기존 설계 위주의 반도체 교육에서 탈피해 세계 반도체 시장의 약 80%에 달하는 비메모리 분야(LSI)의 시스템 반도체 기술 교육을 중점으로 한다.
이 학교의 미래에너지융합학과는 전통 에너지원보다 기후 변화 대응과 지속 가능한 에너지 부문을 위한 첨단 에너지 기술에 초점을 맞췄다. 미래 에너지 산업을 선도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이 목표다.
스마트 팜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학과도 있다. 경희대의 스마트팜과학과다. 기존 원예생명공학과에 스마트팜 공학 융합 전공을 더해 신설됐다. 스마트 팜 전문 경영인을 비롯해 농촌진흥청·산림과학원 등 국가 연구소에 인력을 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000만 반려동물 시대, 반려동물과 정보기술(IT)을 융합한 ‘펫테크’를 활용해 수의 분야의 다양한 의료를 표준화하고 빅데이터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정보들을 분석하는 동물바이오헬스학과도 지난해 전국 최초로 세명대에 신설됐다. 산학 연계로 우수 인력 양성 하지만 대학의 내부 신설만으로는 기업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 주요 대기업들은 첨단 산업의 우수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주요 대학과 협약을 맺고 계약학과 개설에 나섰다. 계약학과는 기업이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학과 운영비를 지원하고 졸업생을 100% 채용하는 방식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통신과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 7개 대학과 협력해 총 9개의 계약학과·연합전공을 지원하고 있다. 이 회사는 최근 고려대와 손잡고 6세대 이동통신(6G)을 포함해 차세대 통신 기술을 다루는 차세대통신학과를 전기전자공학부에 채용 연계형 계약학과로 신설하기로 했다. 이번 협약으로 고려대는 2023년부터 매년 30명의 신입생을 차세대통신학과로 선발할 예정이다. 양측은 이번 차세대 통신학과 신설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통신 시장을 선도할 전문 인력을 선제적으로 육성하고 국가 차원의 기술 인력 확대에도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카이스트와 포항공대 역시 삼성전자와 협약을 맺고 반도체 분야 인력 양성을 위한 계약학과를 신설한다. 카이스트는 반도체시스템공학과, 포항공대는 반도체공학과를 설립해 신입생을 모집할 계획이다.
LG디스플레이스는 연세대와 협약을 맺고 채용 조건형 계약학과인 디스플레이융합공학과를 설립하기로 했다. 2023학년도부터 매년 30명씩 신입생을 선발한다.
SK하이닉스는 서강대와 지난 3월 차세대 반도체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을 통해 서강대는 전자공학과를 모체 학과로 공대 내에 시스템반도체공학과를 신설해 SK하이닉스와 공동으로 반도체 전문 인력을 양성할 예정이다. 정원 30명 규모로 올해 말 첫 신입생을 선발한다.
서강대 교수진은 SK하이닉스에서 필요로 하는 설계·반도체 소프트웨어에 특화된 커리큘럼으로 신설 학과를 구성해 기업 맞춤형 반도체 전문 인력을 중점적으로 양성하게 된다. 김동섭 SK하이닉스 사장은 “첨단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반도체 산업 전 영역에서 우수 인력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다”며 계약학과 개설 사유를 밝혔다.신설 놓고 갈등도 많아 첨단 기술 관련 학과가 대학의 환영만 받는 것은 아니다. 대학이 직업 교육의 장으로 내몰리면서 보편적 인간 교양의 함양과 앎을 통한 자아 발견이라는 숭고한 대학의 목적이 점차 퇴색되고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서울대는 최근까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굴지의 반도체 기업들이 치열한 구애 경쟁에 나섰지만 특정 기업의 계약학과 개설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가 특정 기업의 인력 양성소가 되어선 안 된다’는 학내 반대 여론에 따라 서울대는 한국반도체산업협회와 손잡는 방식을 택해 반도체학과 설립에 나서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기업을 위한 인재 양성이 아니라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위한 인재 양성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겠다는 것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기업뿐만 아니라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패키징 기업 등 다양한 기업이 회원사로 속해 있다.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 학부장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대학의 인재 양성이 시급한 시기가 됐다는 데 공감대를 얻고 있다”며 “그럼에도 국립대인 서울대가 특정 기업의 인력 양성소가 되는 것은 대학의 이념과도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일리가 있어 협회와 함께 반도체 산업 전체 인력을 양성하는 방향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업 현장에서는 학계가 첨단 인력 양성을 더 이상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미 첨단 인력을 양성해 실무에 투입한 미국과 중국(대만) 등에 비하면 한국의 경쟁력은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 미국 스탠퍼드대는 컴퓨터공학과 재학생을 2009년 150여 명에서 10년 새 750여 명으로 다섯 배나 늘렸다. 하지만 서울대는 2005년 이후 15년째 55명을 유지하다 2020년 16년 만에 정원을 70명으로 늘린 게 다다.
전문가들은 문제의 해법을 수도권정비계획법에서 찾는다. 현행법상 수도권 소재 대학은 ‘인구 집중 유발 시설’로 분류돼 정원을 늘리는 데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은 2020년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4차 산업혁명의 도래, AI와 빅데이터 분야의 급속한 확대로 대학 진학자들의 컴퓨터 공학 수요가 전 세계적으로 폭발하는 데도 대학 정원은 변동이 없다”며 “‘수도권정비계획법’ 때문에 대학의 총정원이 꽁꽁 묶여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급변하는 산업 지형 속에서 IT 전문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국가 수준의 인력 수급 불균형 등의 문제는 수도권 집중 방지라는 목표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쓴소리를 내기도 했다.
수도권 대학의 경영대 한 교수는 “청년 실업과 취업난, 학령 인구의 감소 등 대학이 겪고 있는 외적 위협과 대학이 가진 본래의 가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가 됐다”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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