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성장의 신화 쓴 주역…독보적 해외 건설 수주 1위 기업으로 ‘우뚝’

[비즈니스 포커스]
서울 종로 현대건설 계동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종로 현대건설 계동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현대건설은 그들 스스로 ‘열고 짓고 이어 가는 기업’이라고 말한다.

현대건설은 공장 한쪽에서 출발했다. 1947년 5월 서울 중구의 현대자동차공업사 공장의 한구석에서 시작한 현대건설은 어느덧 창립 75주년을 맞이했다. 광복 직후 국가 전체가 혼란했던 시기였지만 현대건설은 전쟁의 폐허 위에 도로를 닦고 끊어진 다리를 연결하고 건물을 세웠다.

빈곤하고 궁핍했던 시대에 오일 달러를 벌어들여 국가 재정에 보탰다. 또 국토 개발의 최선두에서 한국의 성장을 이끌었다. 성장 연대의 일등 주역에서 현재는 글로벌 건설 리더로 한국을 넘어 세계 무대에서 활약 중이다. 현대건설은 한국 건설사(史)의 ‘산증인’이자 주역이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서산 간척지 물막이 공사를 지휘하는 모습 사진=현대건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서산 간척지 물막이 공사를 지휘하는 모습 사진=현대건설
신화의 시작, 정주영과 현대토건
#장면 1. 1937년 스물셋의 청년, 정주영은 점원으로 일하던 ‘복홍상회’를 매입해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1939년 일본의 갑작스러운 쌀 배급제 실시로 잘나가던 경일상회는 폐업했고 자동차 수리업을 시작했다.

#장면 2. 청년 사업가 정주영은 1947년 5월 25일 서울 중구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 입구에 ‘현대토건사’라는 사명이 새겨진 간판을 내걸었다. 은행에서 거액의 돈을 빌리는 이들 중 건설업자가 많은 모습을 보고 건설사를 세웠다.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와 현대그룹, 현대건설의 시작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장면들이다. 정주영 창업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낼 줄 아는 인물이었고 쌀로 시작해 자동차·건설로 이어지는 사업 구조를 만들었다. 자동차와 건설은 여전히 현대그룹의 핵심 사업이다.

현대토건은 ‘기술력을 확보하고 신뢰를 쌓으면 언젠가 반드시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정주영 창업자의 신념에 따라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토건업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이를 통해 창립 1년 후인 1948년 112만원, 1949년 200만원 등의 계약액을 달성하며 착실하게 성장의 발판을 다져 갔다.

다만 광복 직후 미군정의 공사 발주가 폭주하면서 호황을 맞는 듯했던 건설 경기는 기대 만큼 성장세를 지속하지 못했다. 1946년 미군 관계 공사는 △토목 6600만원 △건축 5억5700만원 △기타 1억7700만원 등 총 8억원 규모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947년 5억7000여만원 수준으로 줄었다. 더욱이 1948년 5월 미군 부대에 전면적인 공사 중지 명령이 내려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하지만 현대토건은 1947년부터 3년간 총 465만원의 계약액을 올려 신생 업체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실적을 기록했다. 이는 1950년 1월 이뤄진 현대자동차공업과 현대토건의 합병, 현대건설의 설립, 사업 규모 확대 등의 핵심 배경이 됐다.

손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3년 수주한 고령교 복구 공사는 현대건설에 가장 혹독하고 비싼 수업료는 낸 경험이었다. 공사를 따내는 데 급급한 나머지 기초 조사와 전쟁 후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인식 없이 일괄 계약한 탓에 공사는 결국 엄청난 빚으로 돌아왔다.

정주영 창업자 일가는 고령교 공사에서 입은 손실을 만회하는 과정에서 사재를 대부분 정리했다. 그에게 이 공사는 ‘고령교 악몽’을 꿀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고령교의 악몽은 결과적으로 현대건설에 큰 도움이 됐다. 미국의 원조 자금을 재원으로 한 정부의 복구 공사를 대부분 현대건설이 따냈다. 고령교 공사 당시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성실하게 공사를 완수한 현대건설의 열정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은 6·25전쟁을 기점으로 뚜렷한 회복의 길을 걸으며 전후 복구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1954년 1억5800만원이던 계약액은 1959년 20억800만원으로 5년 만에 12.7배 늘었다.
현대건설의 대륙별 해외 수주액 자료=현대건설
현대건설의 대륙별 해외 수주액 자료=현대건설
“한국 넘어 해외로” 독보적 해외 수주 1위

현대건설의 한국에서의 성공은 해외에서 꽃을 피웠다. 이 역시 정주영 창업자의 기업가 정신이 큰 역할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주영 창업자의 한 대화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1977년 9월 청와대에서 무역 진흥 확대 회의가 열렸고 회의가 끝난 후 박 전 대통령과 경제인, 경제 단체장 등이 오찬을 열었다. 중동 진출 성과가 예상을 뛰어넘는 호조를 보이자 박 전 대통령이 정주영 창업자에게 “중동에서 성공을 거둔 이유가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정주영 창업자는 “각하, 제가 공부를 제대로 했습니까, 대학을 나왔습니까, 영어를 할 줄 압니까. 현대 간부가 세계 일류 외국 회사와 비교해 기술이나 경영 면에서 우수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적으로 근로자의 공입니다”라고 답했다. 박 전 대통령도 정 창업자의 말이 맞다고 맞장구쳤다.

노동자의 중동 진출 러시가 시작된 지 50여 년, 한국의 건설사가 해외 시장에서 따낸 계약 금액은 올해 초 기준 9000억 달러(약 1110조원)를 넘어섰다.

이 중 현대건설이 따낸 공사는 총 842건, 수주액은 1361억 달러(약 170조원)다. 2위인 삼성물산(750억 달러)과 3위 삼성엔지니어링(716억 달러)의 해외 수주액을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다.

현대건설은 정주영 창업자의 기업가 정신과 이념을 이어 받아 ‘함께 내일을 창조하는 기업’을 목표로 한다. 또 해외 수주 1등 기업인 만큼 현재 기세를 이어 가 조만간 누적 수주액 2000억 달러를 돌파한다는 각오다.

현대건설은 “시공 위주의 사업을 넘어 기획·엔지니어링·운영 등 전 부문의 역량이 결합된 종합 건설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로 변화하고 있다”며 “적극적인 시장 개척으로 해외 수주 다변화를 추구하고 최적화된 경영 인프라 구축으로 한국을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글로벌 건설 기업으로 자리 잡겠다”고 밝혔다.

유호승 기자 y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