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의 기술도, 품격도 실종…조롱 비아냥만 가득한 한국 정치판의 ‘막말 배틀’
홍영식의 정치판 ‘6·1 지방선거’ 뒤 정치권에서 험한 말들이 끝없이 오가고 있다. 대통령, 여야 지도부, 평의원 가릴 것 없다. 여기에 지지자들까지 가세하면서 정치판은 마치 ‘막말 배틀(전쟁)’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을 지경이다. 본질을 벗어난 조롱과 비아냥거림, 얕은 감정싸움, 온갖 비수들이 부딪치면서 정치판을 오염시키고 있다. 상대를 일방적으로 굴복시키려고 할 뿐 설득의 기술도, 품격도, 촌철살인의 재치도 기대하기 힘들다.그러니 대화와 토론, 숙의 민주주의는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투쟁과 갈등을 조정해 이견을 좁혀 나가는 정치의 기본은 아예 실종된 상황이다. 한국 정치판의 이런 풍토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유튜브·댓글 문화라는 매개를 업고 더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여권부터 살펴보자.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 출신 인사가 중용된다는 비판에 대해 “과거에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출신들이 아주 ‘도배’를 하지 않았나”라고 했다. 물론 전임 문재인 정권에서 민변과 참여연대 등 일부 시민 단체 출신들이 청와대와 행정부를 장악하다시피한 것은 사실이다. 문 정권은 이런 좁은 ‘인재 풀’에 기댄 이른바 ‘캠코더(대선 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인사에 치중하다 지난해 ‘4·7 재보선’과 대선, 지방선거에서 잇달아 민심의 심판을 받았다.
전임 정권이 그랬다고 이를 금융감독기관장까지 검사 출신으로 임명한 것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꼽은 것은 과도하다는 지적이다. 금감원장을 검사로 기용한 것을 두고 복잡다단한 금융 산업 전반에 대한 전문성 우려와 함께 경제를 범죄의 시각으로 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국가정보원 인사와 예산을 주무르는 기조실장과 국무총리 비서실장, 대통령실 비서관급에도 검찰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줄줄이 발탁된 것도 무리수다. 정부 인사를 총괄하는 인사기획관과 대통령실 살림을 책임진 총무비서관, ‘문고리 권력’으로 불리는 부속실장까지 검찰 라인으로 채운 것도 지나치다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도배’와 같은 대통령 말의 품격이다. 검찰 과잉 인사 지적에 대해 윤 대통령이 “권영세(통일부 장관), 원희룡(국토교통부 장관), 박민식(국가보훈처장) 같이 벌써 검사를 그만둔 지 20년이 다 되고 국회의원 3선, 4선 하고 도지사까지 하신 분들을 검사 출신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좀 어폐가 있지 않나”라고 반문한 것은 일리가 없지 않다. ‘도배’로 차단막 칠 게 아니라 유연한 리더십 필요
대통령실 법률비서관과 공직기강비서관은 역대 정부에서도 대부분 검사들이 가는 자리였고 법무부 차관도 과거 검사 출신들이 주로 임명됐다는 점에서 싸잡이 비판받는 것도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검찰 출신 인사들의 중용은 역대 정부들에 비해 과도한 측면도 있고 비판 민심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런 만큼 ‘도배’라는 표현으로 일도양단식 차단막을 칠 게 아니라 좀 더 설득력 있고 소통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아쉬움이 적지 않다. 대통령으로서 필요한 것은 검사 출신으로서 몸에 밴 직진 리더십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키는 유연한 리더십이다.
차기 당권 등을 겨냥한 국민의힘 내부 싸움도 기가 막혔다. 대선과 지방선거 승리에 취해 벌써부터 오만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당내에서도 나온다. 특히 이준석 대표와 당내 최다선 정진석 의원 간 감정싸움은 국민을 짜증나게 했다. 이 대표가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데 대해 정 의원이 ‘자기 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판한 이후 며칠 동안 지루한 입씨름이 이어졌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고 응수하는가 하면 ‘개소리’, ‘싸가지’, ‘나쁜 술수’ 등 온갖 험한 말들이 오갔다.
싸울 일이 있다면 마주 앉아 토론하며 이견을 좁히면 될 일이다. 그게 정상적인 민주주의다. 그런데도 개인 감정을 굳이 SNS를 통해 배설하며 국민 짜증지수를 높이는 이유는 뭘까. 친윤(친윤석열) 대 비윤 간 대결로 증폭시켜 당권 싸움의 전위대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김용태 청년최고위원을 비롯한 친이준석 청년 정치인들이 이 대표를 거들고 친윤 의원들이 반박한 것을 보면 그런 징후가 뚜렷하다.
더불어민주당도 가관이다. 대선과 지방선거에 연패(連敗)한 정당이 맞나 싶을 정도다. 반성은 찾아보기 힘들고 친문(친문재인), 친명(친이재명), 친낙(친이낙연), 중립파 등 계파 싸움이 날로 심화하고 있다. 거친 말들의 향연도 연일 이어지고 있다. 특히 21세기 정치판에 철 지난 수박 논쟁까지 끌어들이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수박은 광복 뒤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됐다. 겉은 초록색이지만 속은 빨간 공산주의자라는 뜻에서다. 최근엔 국민의힘의 당색이 붉은색, 민주당이 파란색이라는 것을 연결시켜 겉으로는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실제로는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변절자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용어다. 계파 간 싸움에서 상대 계파 의원들이 당론과 달리 행동하고 있다면서 공격할 때 ‘수박 의원’이라고 조롱하는 표현을 쓰고 있다. 민주당, 21세기 정치판에 철 지난 수박 논쟁
이재명 의원이 대선 경선 때 당내 경쟁 후보 측이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과 관련해 공격하자 “수박들이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취지의 글로 반박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최근엔 이상민 의원이 이재명 의원의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와 송영길 전 대표의 서울시장 출마에 대해 비판했다가 “수박 본색을 드러냈다”, “차라리 국민의힘으로 가라”는 등 친명 강성 지지자들의 문자 폭탄에 시달렸다.
친명과 반(反)명 의원 간 원색적인 공방은 끝이 없다. 친정세균계였다가 계파 해체를 선언한 3선 이원욱 의원과 친명 김남국 의원의 설전은 특히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원욱 의원은 지방선거 패배 이후 “이재명 친구, ‘상처뿐인 영광’ 축하한다”며 이재명 책임론을 거론한 뒤 이재명 의원 지지자들에게 ‘수박 의원’ 좌표가 찍히면서 비난의 표적이 됐다. 이에 이원욱 의원은 “수박도 여름에는 찾는다, 기꺼이 시원한 대표 수박이 되겠다”고 응수했다.
그러자 김 의원이 “모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또 한 마리가 날아다닌다”고 비난했고 이 의원은 “정치 훌리건을 방치하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이 의원이 SNS에 “수박 정말 맛있네요”라는 글과 함께 수박 사진을 올리자 김 의원이 ‘조롱’이라고 비판했다. 건전한 토론은 기대하기 힘들고 증오와 독기만 있을 뿐이다. 수박뿐만 아니라 똥파리, 박쥐, 치매, 한 대 맞자, X된다 등 적개심 가득한 저급한 용어들도 난무한다. ‘귀태(鬼胎)’, ‘공업용 미싱’, ‘노가리’, ‘쥐박이’ 등 역대 우리 정치판을 어지럽혔던 거친 언사들이 재현된 듯하다. 급기야 우상호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수박’이라는 단어를 쓰는 분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했지만 갈등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다.
외국 언론의 비판대로 한국 정치판은 여전히 ‘스프링 없는 마차’와 같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윤활유를 칠할 기술도, 의지도 없다. 이게 경제 선진국이라고 하는 대한민국에서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답답한 정치 자화상이다. 4류 정치에서 헤어나기는 여전히 요원한 것 같다.
홍영식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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