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CEO 2년 연속 유일 여성 CEO…‘리스크+WM’ 전문가로 KB증권 도약 이끌어
[비즈니스 포커스] 한경비즈니스는 매년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역을 소개하기 위해 매출(연결 재무제표) 기준으로 100인의 최고경영자(CEO)를 선정해 발표한다. ‘100대 CEO’다. 올해도 1388호에서 ‘2022 100대 CEO’가 발표됐다. 내로라하는 기업인들이 총집결한 가운데 눈에 띄는 포인트가 하나 있다. 99인의 남성 CEO 사이에서 돋보이는 단 한 명. 100인의 CEO에서 나 홀로 여성인 박정림 KB증권 사장이다.‘2021 100대 CEO’에서도 유일했다. 조직 내 보이지 않는 남녀 간의 장벽 ‘유리 천장’이 깨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CEO의 세계에선 아직까지 예외인 것 같다. 그러면 박정림 사장은 어떻게 이 ‘보이지 않는 법칙’을 깨뜨렸을까.
증권사 여성 CEO, 최초를 쓰다
‘증권업계 최초의 여성 CEO’, ‘은행 출신 증권사 사장.’
박 사장을 따라다니는 꼬리표다. 박 사장은 2019년 KB증권 대표에 선임된 이후 한국 증권업계 첫 여성 CEO란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 은행에선 일찌감치 여성 부행장이 다수 발탁되거나 여성 행장이 등장하며 유리 천장을 깬 사례가 있다. 반면 증권업계에선 굉장히 드물다. 여의도가 여성에 배타적이란 말도 나왔다. ‘최초’가 주는 무게감은 상당했다. 박 사장 역시 취임 후 가진 인터뷰에서 “엄청난 영광이자 부담”이라고 말했다.
박 사장의 어릴 적 꿈은 ‘사장님’이었다. 그 시절 공부깨나 하던 친구들이 전문직을 꿈꿨지만 그는 달랐다. 그렇게 들어간 서울대 경영학과에서 금융학도의 꿈을 키웠다. 첫 직장은 체이스맨해튼은행(현 JP모간체이스은행) 서울지점이었지만 결혼과 육아를 하며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가 됐다.
현실의 벽은 높았다. 애널리스트가 되고 싶어 십여 곳에 지원서를 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수학의 정석’을 다시 꺼내 들고 수학 과외를 하며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버텼다. “다시 복귀할 수 있을까.” 확신이 흐려지던 찰나에 전혀 새로운 곳에서 기회가 왔다. 또 다른 여의도, 국회의원실이었다. 그는 1992년부터 2년간 정몽준 당시 통일국민당 국회의원의 비서관을 지냈다. 정밀한 자료 분석 능력 등으로 다른 여성 보좌진과 함께 매스컴도 탔다.
정책도 짜고 자료를 분석하는 일이 적성에도 맞았지만 원하던 삶은 아니었다. 다시 금융권으로 발길을 돌렸다. 1994년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이 설립한 조흥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다시 일을 시작해 1996년 종합기획부 리스크관리실 과장을 지냈다. 당시 외환 위기를 거치며 기업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이 커진 때였다. 리스크 관리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낸 박 사장의 몸값이 뛴 것은 당연지사였다.
삼성화재가 박 사장을 스카우트하며 1999년 자산리스크관리 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2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리스크관리전문가협회 임원에 당선될 만큼 자타 공인 ‘리스크 전문가’로 통했다.
그 무렵 솔깃한 제안이 왔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정태 전 KB국민은행장이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2004년 시장운영리스크부장으로 합류했다. KB금융그룹과의 첫 인연이다. 이후 재무보고통제부장, 제휴상품부장을 거쳐 WM본부장에 올랐다. 2012년 5월 아시아·태평양 지역 경제 전문지인 ‘아시안인베스터’가 아·태 지역 자산 관리 분야의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의 여성 중 한 명으로 박 사장을 뽑았을 만큼 WM 분야에 정통했다. 이후 KB국민은행 WM부대표, WM그룹 부행장, KB금융지주 WM총괄 부대표 등을 역임하며 WM 분야의 아이콘이 됐다.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박 사장의 노력은 남달랐다. 남성 중심적인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술자리는 물론 흡연 장소까지 따라다녔다. 중요한 얘기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나올까봐 모든 곳에 눈과 귀를 열었다. 임직원들 사이에선 그를 ‘형님’, ‘여장부’로 불렀다.
당시 어윤대 전 KB금융그룹 회장,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 등 그룹의 CEO들 또한 박 사장에게 거는 기대가 각별했다는 후문이 돌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다. 실제 2014년 말 윤종규 회장이 취임한 후 실시한 첫 인사에서 임원 물갈이가 진행됐을 때도 박 사장은 자리를 지켰다. 절반 이상의 부행장이 ‘KB 사태(KB국민은행 주 전산시스템 교체를 두고 KB금융 회장과 KB국민은행장 등 경영진 간 내홍을 겪은 일)’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박 사장은 유임됐다. 오히려 지주사 리스크관리책임자를 겸임하며 KB 사태 이후 제2의 KB를 만드는 데 역할을 했다. 박 사장은 지금도 윤 회장의 중용에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2019년 박 사장에게 또 다른 길이 열렸다. WM을 넘어 자본 시장으로 향한 길이었다. 2018년 말 KB금융지주 이사회는 계열사 대표추천위원회를 개최해 KB증권 신임 대표로 박정림·김성현 사장을 내정했다. 박 사장은 WM을, 김성현 사장은 IB 부문을 각각 맡아 이끄는 각자 대표 체제다. ‘증권업계 최초의 여성 CEO’, ‘은행 출신 증권사 사장’은 KB금융그룹으로서도 큰 도전이었다.
박 사장은 이미 2017년 1월부터 KB증권 WM부문 부사장을 겸하며 WM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받았지만 ‘뒷말’이 따랐다. 은행 출신 증권사 사장이란 점에서 노동조합 등으로부터 임기 초 낙하산 인사, 증권업을 잘 모르는 인사라는 부정 평가가 뒤따랐다. 박 사장은 맞서기보다 겸양을 택했다. 그는 최근 한경비즈니스 자매지인 한경ESG와 가진 인터뷰에서 “증권사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제일 잘한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며 “우리 회사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과 하모니를 낼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하고 조율하는 게 CEO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려는 성적표로 날려버렸다. 임기 첫해인 2019년 KB증권의 순이익은 2901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52% 이상 늘었다. 핵심 사업인 WM 부문과 투자은행(IB) 부문의 시장 지배력 강화가 그 배경이다. 성과의 대표적인 사례는 KB증권이 직접 발행하고 원금과 약정된 이자를 지급하는 만기 1년 이내의 단기 유동성 투자 상품인 ‘KB 에이블 발행 어음’이다. WM-홀세일(WS)-IB 등 유관 조직 간 조달과 운용 협업을 통해 2019년 출시 당일 1회차 목표였던 5000억원 규모의 발행 어음을 완판했고 그해 목표였던 2조원도 달성했다.
박 사장은 시장을 내다보며 고객 자산 포트폴리오 구성에서 글로벌 자산 배분의 중요성 또한 강조했다. 환전 없이 원화로 해외 주식을 거래하는 글로벌원마켓 서비스를 출시한 당시 “글로벌 투자 자산은 점차 고객의 포트폴리오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듬해 ‘서학개미’ 열풍이 불며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실적+리스크 잡고 연임 성공, 그룹 영향력 강화
사상 최대 실적 경신 등 회사의 호실적을 바탕으로 2021년 말 연임에도 성공했다. 당초 ‘2+1년’의 임기를 이미 채웠고 ‘라임자산운용 사태’가 박 사장 연임에 암초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그는 리스크 전문가답게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다. 박 사장은 라임펀드 환매 중단 사건 발생 이후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가 결정한 60~70% 비율의 배상안을 업계 최초로 받아들이는 등 발 빠른 사후 대처에 나섰다.
리스크 관리를 위해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에도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나섰다. 2020년 한국 증권사 최초로 이사회 내 ESG위원회를 설립하고 전담 조직을 신설해 ESG 경영을 내재화했다. 박 사장은 특히 여성 인재 육성에 관심이 높다. 그는 “기업에서는 여성의 유리 천장을 깨기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유리 벽을 깨뜨리기 위한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며 “KB증권은 부점장급 20%, 팀장급 30%, 팀원급 40% 이상을 여성 인력으로 확대할 목표로 다양한 분야에 여성 인력을 배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이 회사의 중간 책임자(부점장급) 여성 인력은 2018년 21명 (11%)에서 2019년 24명(14%), 2020년 27명(16%), 2021년 32명(17%), 올해 3월 기준 36명(19%)으로 늘었다.
박 사장의 임기는 올해까지다. 이제 그의 미션은 ‘다음’을 향하고 있다. 박 사장은 이번 그룹 인사에서 대표 연임과 함께 지주 내 자본 시장과 CIB 사업부문을 맡는 총괄부문장을 겸직하게 됐다. 이에 따라 윤 회장을 축으로 박 사장과 허인 KB금융지주 부회장·이동철 부회장·양종희 부회장이 4개 사업부문을 맡아 그룹을 이끈다. 업계에선 이번 인사로 박 사장의 그룹 내 영향력이 더 확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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