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시골 청년, 파리로 건너가 고급스럽고 화려한 ‘쿠튀르’ 익히고 돌아와 큰 성공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발렌티노①
발렌티노의 ‘레드 드레스’(사진 ①).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발렌티노의 ‘레드 드레스’(사진 ①).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발렌티노의 창립자인 발렌티노 가라바니는 1932년 5월 11일 이탈리아 보게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솔리니의 독재 정권과 제2차 세계대전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패션 디자이너인 이모 밑에서 일하며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키워 나갔다.

17세가 되던 해 대학 진학보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세운 발렌티노는 파리에서 패션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6개월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패션 디자인과 프랑스어를 배운 뒤 18세에 파리로 향했다. 1950년 파리 의상조합학교에 입학해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2년 뒤 파리 의상조합학교를 졸업했고 장 데세 밑에서 수습생으로 5년 동안 일했다. 1937년 조지 5세 거리에 패션하우스를 연 이집트 출신 장 데세는 장인 정신이 깃든 아주 섬세한 옷들을 만들었다.

그의 주 고객은 그리스 왕실, 이집트 왕실, 영국 윈저 공작 부인 등 상류층이 주를 이뤘다. 발렌티노는 장 데세에서 일하는 동안 부유한 왕족 고객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상류 사회의 생활 방식과 그들의 엄격한 에티켓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또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파리 쿠튀르 드레스의 섬세한 장식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발렌티노는 수습 기간 동안 취미로 오페라를 즐겨 봤다. 어느 날 무대 위 여배우가 레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에 반했다. 이 레드 드레스에서 영감을 받아 훗날 그의 디자인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발렌티노 레드(사진 ①. 강렬한 홍색에 주홍색의 기운이 살짝 감도는 발렌티노의 사치스러운 감성을 표현하는 색)’를 만들게 됐다. 1957년에는 장 데세의 패션 하우스에서 함께 일하다가 먼저 독립한 기 라로쉬의 밑에서 일하게 됐다.
기 라로쉬 밑에서 패션 운영 방법·지식 습득
기 라로쉬의 패션 하우스는 아주 규모가 작았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발렌티노가 많은 부분을 담당하게 되면서 패션의 전반적인 운영 방법을 배우게 된 좋은 기회가 됐다. 기 라로쉬가 밝은 색상을 사용한 디자인 방식은 훗날 발렌티노의 색상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줬다. 발렌티노는 1950년대를 파리에서 보내면서 디자인 하우스를 세우는 데 필요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습득했다.
1966년 로마에서의 발렌티노(오른쪽).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1966년 로마에서의 발렌티노(오른쪽).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그는 모국인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부모님의 후원으로 1959년 로마의 콘도티 11길에 자신의 이름으로 쿠튀르 하우스를 개점했다. 그의 나이 27세 되던 해였고 그해 11월 120개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영 능력의 부족으로 하우스는 위기에 직면했다. 재정도 어려워 파산 직전에 몰렸다.

하지만 1960년 지앙카를로 지아메티를 만나게 되면서 기사회생하게 되는 계기를 잡았다. 건축 공부를 하기 위해 로마에 머무르고 있었던 지아메티가 발렌티노의 쿠튀르 하우스에 합류해 경영 관리자 역할을 맡았다. 그는 뛰어난 경영 능력을 발휘했고 발렌티노의 디자인 하우스는 사업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는 1960년대 패션 산업이 성장하던 시기였고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충분히 깔려 있었다. 중세시대부터 이탈리아는 동방과의 교역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동방의 우수한 직물들이 대거 들어왔고 이탈리아는 자연스럽게 직물 생산과 기술을 갖추게 되면서 유럽 내 섬유 산업을 주도했다. 하지만 산업화가 늦어져 프랑스와 영국의 소재를 공급하는 수준에 머무르게 됐다.

그러나 점차 상황은 달라졌다.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킨 무솔리니 정권은 예술 수공업 산업 정책과 패션 산업을 부흥시켰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의 특색 있는 디자인 창작이 활성화됐고 패션 산업의 생산·판매도 촉진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았다. 1950~1960년대 미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이탈리아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됐고 섬유와 패션 산업도 크게 발전했다.

그 무엇보다 이탈리아 패션은 프랑스 패션의 하청 생산 기지 역할을 하면서 뛰어난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장점은 낮은 임금과 풍부한 노동력이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보다 많게는 50%의 가격에 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 미국은 이탈리아를 프랑스의 대안으로 찾게 됐다. 이탈리아의 우아한 패션 스타일도 미국의 젊은 여성들의 구미에 맞았다.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의 대미 의류 수출이 급증하게 됐다.
1968년 열린  발렌티노 화이트 콜렉션.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1968년 열린 발렌티노 화이트 콜렉션.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인 지오반디 바티스타 조르지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개최한 조르지니 패션쇼는 이탈리아가 단순 하청 국가에서 벗어나 세계 패션 시장에 등장하게 되는 신호탄이 됐다. 이탈리아 문화의 중심지였던 피렌체는 점차 패션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조르지니의 첫 패션쇼는 그의 자택인 빌라 토리자니에서 3일 동안 진행됐다. 조르지니 패션쇼에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디자이너인 폰타나·비스콘티·카로사·베네지아니·푸치 등도 참가해 자신들의 패션들을 선보였다. 미국 바이어들도 패션쇼에 대거 참석했고 언론계의 주목도 받았다.
발렌티노(오른쪽)와 엘리자베스 테일러(사진 ②).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발렌티노(오른쪽)와 엘리자베스 테일러(사진 ②). 사진출처 : instagram realmrvalentino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평생 친분 유지

발렌티노는 1962년 피렌체 조르지니 패션쇼에 참여하게 되면서 미국 진출의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마지막 날 진행된 발렌티노 패션쇼는 큰 성공을 거뒀다. 그의 패션쇼를 보기 위해 피티 궁전에 모여든 미국 바이어들의 주문들이 쏟아졌다. 언론의 큰 관심을 끈 것도 물론이었다.

무솔리니의 진흥 정책으로 시작된 이탈리아의 영화는 그 당시 절정기를 맞았다. 자국뿐만 아니라 외국의 유명한 영화 배우들이 모여들었다. ‘클레오파트라’ 영화 촬영 차 로마에 온 할리우드 스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발렌티노 디자인 하우스를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2011년 사망할 때까지 생일 파티를 같이하는 등 친밀하게 지냈다(사진 ②). 다른 유명 배우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발렌티노 디자인 하우스는 더 유명세를 탔다.

1963년 미국에서는 발렌티노 가라바니와 지앙카를로 지아메티가 ‘두 남자(due ragazzi)’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두 남자는 미국 주요 도시들을 순회하며 패션쇼를 열었다. 이듬해 9월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개최한 자선 행사 패션쇼에 참석한 재클린 케네디가 발렌티노의 주요 고객이 되면서 발렌티노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 갔다.

참고 자료 ‘발렌티노의 미적특성 계승에 관한 연구(최선영, 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