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소비국 미국 과잉 재고로 몸살…재고 증가→실적 악화→투자 감소 악순환 우려
유통업계는 ‘땡처리’에 나섰고 제조 업체들은 투자 계획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창고에 쌓인 ‘재고’가 문제다. 지난해까지는 공급망 대란으로 생산 차질을 빚었지만 올해는 재고가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가계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소비 여력이 크게 줄어든 때문이다.물가와 금리 상승으로 지갑이 얇아진 가계가 가장 먼저 줄인 소비는 가전·TV·IT 기기 등 고가 제품이다. ‘코로나 특수’로 지난 2년간 매출이 급증했던 상품들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지난해 나란히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지난해 폴더블폰 판매가 증가하면서 삼성전자 스마트폰 사업을 담당하는 MX(모바일경험)사업부는 영업이익이 18.9% 늘었다. LG전자는 가전 사업본부와 TV 사업본부를 합친 매출이 지난해 처음으로 40조원을 넘었다.
전자 기기 주문이 폭증하면서 반도체 수요도 급증했다. 장난감·밥솥·TV·스마트폰·자동차 등 모든 기기에는 반도체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글로벌 경기 회복에 힘입어 2018년 반도체 초호황기(슈퍼 사이클) 매출을 웃도는 매출을 기록했다. 미국 인텔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매출 1위에 올랐다.
올해는 상황이 정반대다. 한국 소매 판매는 3월부터 6월까지 4개월 연속 감소했다. 소매 판매가 4개월 연속 쪼그라든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금융 위기가 터진 1997~1998년 이후 약 24년 만이다. 물가·금리 상승에 가계 소비가 위축됐고 소비 패턴이 재화(소매 판매)에서 서비스로 일부 전환된 영향도 있다.
재고도 크게 늘었다. 올해 6월 한국 기업들의 생산은 늘었지만 판매가 되지 않으면서 재고율이 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이던 2020년 5월 수준까지 높아졌다. 재고율이 높아지면서 향후 생산이 위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특히 1차 금속(12.5%), 반도체(6.0%), 자동차(7.4%) 등에서 재고가 쌓였다.
쌓인 재고에 줄어드는 기업 투자 재고율이 증가하자 기업들은 투자 계획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기업의 투자가 줄어들면서 실업률이 증가하고 이는 다시 소비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2분기 실적 발표를 통해 하반기 경기 불확실성에 따른 재고와 투자 계획 변동에 대해 조심스럽게 밝혔다.
최근 증권가는 2분기 호실적을 낸 삼성전자의 실적 예상치를 하향 조정했다. 전자 제품 수요가 줄면서 주력 제품인 메모리 반도체 재고가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2분기 실적 발표에서 하반기 반도체 업황 불확실성을 인정했다.
삼성전자는 3나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게이트올어라운드(GAA) 2세대 공정 고객사 수주 논의 등 기술 경쟁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거시 경제 불확실성을 들며 연간 수요 전망을 제시하지 않았다. 글로벌 시장 조사 업체 DSCC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2분기 재고 회전 일수는 평균 94일이었다. 전년 동기 대비 2주 정도 더 길어져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SK하이닉스는 제품의 재고 상황을 보면 내년 투자 계획에 변수가 생길 수 있다고 밝혔다. 업황 악화가 지속돼 재고가 늘어나면 예정된 투자 계획을 축소하거나 미룰 수 있다는 의미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하반기에도 하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업계는 SK하이닉스의 이 같은 발언은 사실상 투자 계획 조정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6월에는 SK하이닉스가 청주공장(M17) 증설을 보류한다고 결정했다. 회사가 2분기 역대 최고 수준의 분기 매출을 기록하고 영업이익률도 30%대를 회복한 상황에서 이 같은 발표가 나왔다. 당초 청주공장은 충북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 내 43만3000여㎡ 부지에 4조3000억원 규모로 건설될 예정이었다.
가전 사업에 주력하는 LG전자 역시 “코로나 특수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LG전자는 출하량 조절을 통해 재고 관리에 나섰다. LG전자는 “금리 상승, 인플레이션으로 TV 수요 부진, 유통 재고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라며 “2분기에는 TV 출하량 조절을 통해 현재 유통 재고가 어느 정도 정상화됐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통업계는 재고를 털어내기 위해 할인 판매에 들어갔다. 특히 백화점과 달리 제품을 직매입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면세업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신세계면세점은 지난 7월 유통 기한이 임박한 화장품 70여 개를 온라인에서 40~70% 할인 판매했다. 화장품은 유통 기한이 있어 재고가 쌓이면 전량 소각하거나 폐기해야 한다.
롯데면세점은 지난 5월부터 세븐일레븐 편의점 애플리케이션에서 명품 브랜드 신발·지갑 등을 최대 50% 할인된 특가에 판매하고 있다. 편의점 고객의 약 60%가 20~30세대인 점을 고려해 편의점으로 내수 통관 면세품 판매 채널을 확대했다. 우주에서 보이는 물류 창고도 빈 공간 없어최대 소비국인 미국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미국 최대 창고 시장인 동부 물류센터 창고가 재고로 가득 찼다. 특히 우주에서도 관측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규모의 미국 리버사이드 카운티부터 샌버너디노 카운티까지의 물류 단지 역시 이미 빈 공간이 없다.
로이터는 “뉴욕 센트럴파크의 44배, 테슬라 공장보다 160배 큰 이 창고들이 꽉 찼다”며 “아시아에서 수입되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10만~20만 평방피트 공실이 나오면 순식간에 찬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재고 지수는 지난 6월 57.3으로 1984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월마트와 아마존 등 미국 유통사들 역시 과잉 재고로 몸살을 앓고 있다. 월마트는 1분기에 인플레이션과 물류 대란 재발생에 대비하기 위해 재고를 공격적으로 늘렸다. 이에 따라 1분기 재고 자산이 전년 동기 대비 33% 증가했다. 늘어난 재고는 고스란히 2분기 영업이익에 전가될 것으로 예상된다. 월마트는 최근 투자자들에게 “의류 마진을 줄여 재고 떨이를 하느라 2분기에는 영업이익이 13~14% 줄어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유통 업체들 역시 재고 회전 일수가 사상 최장일을 기록하고 있다. 세계 최대 가전 유통 업체인 베스트바이의 올해 1분기 재고 회전 일수는 74일로 예년(50~60일)보다 길어졌다. 베스트바이 매출 감소는 삼성전자나 LG전자의 가전 생산과 재고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세계 최대 이커머스 업체인 아마존도 지난 3월 기준 재고 회전 일수가 57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아마존은 재고량을 평균 30~40일 정도로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고가 쌓이면서 아마존은 7월에 이어 연말(10월)에도 재고 축소를 위한 프라임데이를 개최할 수도 있다고 미국 언론들은 전했다.
미국 의류업체 갭(GAP)은 지난 7월 실적 악화로 최고경영자(CEO)가 사임했다. 사무실 출근이 재개되면서 일상복 수요가 줄고 외출복 수요가 늘어나는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이유가 가장 컸다. 갭의 매출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브랜드 올드네이비가 지난해 여름 상품을 강화하겠다며 다양한 사이즈의 옷을 출시했지만 이후 너무 작거나 큰 사이즈의 옷이 팔리지 않고 재고로 남아 역풍을 맞기도 했다. 갭의 1분기 재고는 전년 동기보다 34% 급증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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