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달콤한 슬픔이 어른대는 행복과 또렷한 희망이 감지되는 슬픔, 이것이 한국 문화의 본질이다.”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을 지낸 다니엘 튜더는 한국 문화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포장마차였습니다. 흐릿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사람 냄새가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공간, 소주 한잔으로 힘들었던 하루를 위로하며 느끼는 작은 행복, 술기운에 기분 좋게 헤어지지만 돌아선 동료의 축 처진 어깨에서 느껴지는 애잔함 같은 그런 것.

어쩌면 한국 드라마나 영화의 경쟁력도 이런 감성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나라 콘텐츠에서 찾기 힘든 섬세한 감정선의 처리는 다니엘 튜더가 말한 한국 문화의 본질과 닿아 있는 듯합니다.

최근에는 용산이라는 곳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다 다시 이 문장을 떠올렸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중층적 감정을 이끌어 내는 도시, 오래전 곡물과 자원이 모여들던 거래의 중심지였지만 그것이 훗날 비극의 조건이 되고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싹 틔우고 있던 그런 도시 말입니다.

얼마 전 서울은 물바다가 됐습니다. 하지만 광화문에서 용산으로 이어지는 강북의 중심 지역은 피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서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평평한 지형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 얘기입니다. 한양(서울)이 수도가 된 후 용산나루로 전국에서 쌀 등 각종 물자가 집결했습니다. 가장 큰 수요처인 왕과 귀족들이 모여 사는 4대문 안과 그 인근으로 향하는 물자였습니다. 용산나루에서 남대문 광화문까지 물자를 쉽게 옮기는 길은 더 평평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한강로입니다.

하지만 이런 지리와 지형의 혜택은 비극의 씨앗이 됩니다. 평평한 지대, 동서남북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입지는 군대가 주둔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광복 후 미8군사령부가 차례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땅을 다시 찾아오는 데 120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되찾은 ‘용산 주권’은 미래의 용산에 대한 기대감을 더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슬픈 역사도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가 비구니들이 거주하는 이태원에 있는 운종사라는 절에 쳐들어갔고 왜군의 아이를 갖게 된 비구니 등이 나중에 모여 살았다고 해서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공식적으로는 배나무가 많았다고 이태원(梨泰院)이라고 씁니다.

해방촌은 광복 후 미군이 일본 관사에 무단 점거해 살고 있던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을 트럭으로 실어 남산 기슭에 던져 놓으며 시작된 곳입니다. 해방촌의 볼거리 중 하나인 108계단은 일본이 지은 대형(경성호국신사) 신사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비극의 역사를 뒤로한 이태원은 이방인들의 공동체로 불리며 유행을 이끄는 음식점과 카페 등이 모여 있는 핫 플레이스가 됐습니다.

용산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미군 부대는 각 지역을 갈라 놓았습니다. 이는 비극적 역사의 상징이지만 용산이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게 만든 의도하지 않은 공로가 있었다고 하면 과언일까요. 실제로도 미군은 한국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8군 무대는 한국 대중가요의 요람이었습니다. 신중현·이남이·패티김·조용필 등이 이 무대 출신입니다. 한국 걸그룹 최초로 미국에 진출, 빌보드 차트에 오른 김시스터즈도 이곳에서 성장했습니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국민 가수 이난영의 딸과 조카로 구성된 이들은 1959년 미국에 진출, 높은 인기 덕에 당시 미국 최고의 TV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에 22회나 출연했다고 합니다.

삼각지에는 미군들에게 초상화 등을 그려 주는 화랑이 번창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 미술가 박수근은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렸고 이중섭도 미군을 대상으로 한 삼각지 화랑에 그림을 납품했습니다. 1970년대 미국에서 거래되던 그림의 상당수가 ‘메이드인 삼각지’였다고 합니다.

용산의 기업사에도 몰락과 미래가 공존합니다. 국제그룹·벽산·해태 등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아모레퍼시픽과 BTS의 하이브 등이 새롭게 둥지를 틀었습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팔색조 같은 용산에 대한 얘기를 다뤘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합니다. 이번 호가 그냥 지나다니던 용산을 다시 보게 하는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