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생큐” 연발에 삼성·SK·현대차 수십조원 투자 발표
미국 우선주의·블록화 심화…현대차, 인플레 감축법에 뒤통수
미·중 사이 국익 위한 전략 고민할 때

[비즈니스 포커스]
최태원(오른쪽) SK 회장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2022년 7월 26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화상으로 면담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최태원(오른쪽) SK 회장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2022년 7월 26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화상으로 면담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삼성 170억 달러, SK그룹 290억 달러, 현대차그룹 100억 달러.

2022년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방한 이후 한국 대표 기업들이 미국에 신규 투자하기로 한 금액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 발표에 “생큐”를 연발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을 짓고 있고 SK그룹은 미국에서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분야 등에서 290억 달러를 신규 투자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은 100억 달러를 투자해 조지아 주에 연 30만 대 규모의 전기차 공장과 배터리 모듈 공장을 짓기로 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전략적인 비즈니스 외교의 성과다.


대미투자·경제 협력 모두 챙긴 세일즈 외교

바이든 대통령은 다양한 글로벌 전략 동맹을 발전시켜 중국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고 자국에 대한 투자를 끌어내는 비즈니스 외교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21세기는 비즈니스 외교의 시대란 것을 보여줬다. 미국·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반도체는 ‘전략 무기’다.

과거 군사 전쟁이 무역 전쟁과 기술 전쟁으로 탈바꿈한 상황에서 반도체는 미·중 패권 경쟁을 관리하는 가장 효율적인 외교 수단으로 부각되고 있다. 반도체는 미래 산업에서 없어선 안 될 필수재 중 필수재로 전 세계가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를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역대 미국 대통령의 단골 방문지인 비무장지대(DMZ) 대신 아시아 순방의 첫 행선지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을 방문했다. 반도체 공장은 21세기 진정한 격전지를 대표하는 곳이다. 미국 경제와 안보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5월 한국 방문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따로 만나는 등 한국의 1~3위 대기업 총수를 잇따라 면담하면서 미국 제조업과 일자리에 대한 투자를 끌어냄으로써 실리를 모두 챙겼다.

반도체 산업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외교가 중요한 상황이지만 정부의 외교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대미 투자와 관련 한국 기업들도 얻는 게 있다. 미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올라타 공급망 안정화를 꾀할 수 있고 반도체와 과학법, 인플레이션 감축법 등을 통해 보조금이나 세액 공제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의 대미 투자 규모 대비 한국이 얻는 국익의 효과에는 의문 부호가 그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외교의 기본은 기브 앤드 테이크다. 미국이 얻는 이익은 명확한 데 반해 한국의 이익은 명확하지 않다. 8월 16일 발효된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대표적이다. 현대차·기아는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 기조에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지난 5월 미국에 대한 ‘통큰’ 투자 계획 발표에도 불구하고 8월 16일(현지 시간) 발효된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인해 국내에서 생산한다는 이유로 현대차·기아가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돼 미국 시장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5월 22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정 회장은 이날 미국에 2025년까지 로보틱스 등 미래 먹거리 분야에 50억달러(약 6조3000억원)를 추가로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5월 22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정 회장은 이날 미국에 2025년까지 로보틱스 등 미래 먹거리 분야에 50억달러(약 6조3000억원)를 추가로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은 8월 9일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에 서명했다. 527억 달러의 보조금을 제공해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안보를 강화하고 반도체와 과학 분야의 경쟁력을 높여 중국을 견제한다는 내용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손가락보다 작은 반도체가 스마트폰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며 “30년 전에는 미국에서 전체 반도체의 30%가 만들어졌지만 현재는 10%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법에 따라 미국 텍사스 주에 반도체 공장을 증설하기로 한 삼성전자를 포함해 오하이오 주에 공장을 짓는 인텔, 대만 TSMC도 혜택을 받게 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와 과학법에 서명하면서 미국에 첨단 반도체 제조 공장을 짓는 삼성전자, 대만 TSMC와 같은 기업에 25%의 세액 공제를 지급하는 대신 해당 기업들이 10년간 중국 내 반도체 공장을 증설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가드레일 조항을 덧붙였다. 세액 공제 등 혜택은 공짜가 아니다.

이 법안의 주요 목적이 중국의 반도체 성장을 억제하는 데 있는 만큼 중국도 상응하는 대응을 할 가능성이 높아 미·중 간 패권 경쟁이 격화될 소지도 높다. 실제 중국은 미국의 압박에 반발하고 있다. 한국은 미·중 패권 경쟁의 격랑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은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후발 주자인 중국 메모리칩 제조 업체인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가 최근 232단 제품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전해지자 미국 정부는 중국에서 메모리칩을 생산하는 기업에 미국산 제조 장비의 수출을 통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미국산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 금지가 중국의 반도체 분야 발전을 막고 웨스턴디지털·마이크론테크놀로지 등 미국 기업을 보호하려는 시도다.

미국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이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게 네덜란드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ASML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최첨단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뿐만 아니라 구형 심자외선(DUV) 노광 장비까지 중국 판매 금지를 요구했다.

이런 와중에 최근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중신궈지(SMIC)가 초미세 공정으로 꼽히는 7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공정 개발에 성공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가 강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022년 5월 20일 한국을 방문한 조 바이든(왼쪽부터) 미국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경기 평택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2022년 5월 20일 한국을 방문한 조 바이든(왼쪽부터) 미국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경기 평택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미·중 줄타기 속 시험대 오른 尹 외교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용 반도체 공급망 동맹인 ‘칩(Chip)4’ 참여 결정을 앞두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칩4는 한국·미국·일본·대만 등 4개국을 가리킨다.

칩4 동맹에 참여하면 중국 내 반도체 생산 공장에 대한 투자가 제한된다. 한국의 칩4 참여가 중국을 자극해 중국 의존도가 높은 소재·원자재를 비롯한 다른 분야의 보복 대응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2021년 한국의 반도체 수출액 1280억 달러 가운데 대중 수출은 502억 달러로 약 39%를 차지했다. 홍콩을 더하면 60%에 이른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주요 생산 기지가 중국에 있고 최대 수출국인 만큼 칩4 가입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한국은 반도체 산업 구조상 생산에서는 미국의 반도체 기술이 필요하고 수요와 관련해선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한국은 급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아직까지는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권력 서열 3위인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이 최근 방한 때 윤석열 대통령이 휴가를 이유로 대면 면담을 하지 않은 것을 두고 일각에선 중국 눈치 보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오히려 민감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지 않았다는 평가도 상존한다.

정부는 오는 9월 칩4 예비 회의에 참여하기로 하고 예비 회의 결과에 따라 칩4 참여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윤 대통령은 칩4 참여 여부와 관련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관련 부처와 잘 살피고 논의해 우리 국익을 잘 지켜내겠다”고 밝혔다.

외교에선 국가의 이익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국가 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고 오로지 국익만 영원할 뿐이다’는 영국 정치가 헨리 파머스턴의 말이 회자된다.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할수록 미국의 반중 연대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중국과는 대중국 외교의 원칙으로 화이부동(和而不同 : 조화를 이루되 같아지지 않는다)을 추진하며 전략적 협력 관계를 다지고 있지만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현안들 속에서 정부의 외교 정책이 시험대에 오른 모양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