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반떼•그렌저 HEV 한 달새 2~3개월 더 밀려
연식변경 핑계로 차값은 수백씩 올라
출고 지연에 1억원대 포르쉐 ‘계약 권리’도 사고 파는 ‘넘버테크’ 뜨기도
“기존에도 오래 걸렸지만 최근 포르쉐에서 계약하면 인기 많은 카이엔 쿠페는 받기까지 2년 넘게 걸려요. 중고 가격도 높고 기다리다 지쳐 다른 차를 살까 고민했죠. 그러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계약을 취소하려는 회원에게 피(웃돈)를 주고 샀어요.”(소비자 B 씨)
돈이 있어도 원할 때 신차를 구하기 힘든 시대다. 자동차 공급 부족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혔던 반도체 수급난이 최근 어느 정도 풀리고 있지만 소비자들이 체감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일부 모델은 지금 당장 주문해도 2024년에야 받는다. 기다림에 지친 소비자들은 신차를 포기하고 중고차와 렌터카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최근엔 이 같은 현상을 재테크로 활용하는 사례도 생겼다. 여러 차종을 계약한 후 옵션을 정하기 전에 ‘번호표’를 웃돈 받고 되파는 것이다. 이른바 넘버테크(계약 번호표+재테크)다.
소비자 C 씨는 “수입차는 국산차와 달리 해외 공장에서 주문자의 요구에 맞춰 생산되는 만큼 긴 시간이 걸린다”며 “포르쉐는 계약(번호표 뽑기), 쿼터 배정(옵션 확정), 입항, 출고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계약금은 500만원, 1000만원인데 최근 공급망 문제로 1년 안쪽이었던 대기가 2~3년으로 늘어났다. 2~3개 차종을 동시에 계약하고 쿼터 배정 전에 웃돈 받아 팔면 쏠쏠하다”고 말했다.
내 차, 언제 나오나 ‘내 차는 언제쯤 나올까.’ 결론부터 말하면 한 달 이내에 받을 수 있는 신차는 거의 없다. 예년처럼 새 차를 바로 받는 환경이 갖춰지려면 최소 1~2년은 걸린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현대자동차와 기아가 딜러들에게 제공한 9월 납기표에 따르면 이달 기준으로 한 달 안에 나오는 소형차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차종은 기본 6개월, 차량용 반도체가 많이 들어가는 전기차(EV)와 하이브리드(HEV) 모델은 1년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인도 기간이 가장 짧은 모델은 지난해 9월 출시된 현대차 캐스퍼다. 계약하면 3주 만에 차량을 받을 수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캐스퍼는 다른 차량과 달리 광주글로벌모터스(GGM)에서 생산되고 있어 인도 기간이 비교적 이른 편”이라고 설명했다.
차량용 반도체 수급이 완화되고 있지만 현장에선 여전히 부품 공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연기관차보다 반도체 부품이 더 많이 들어가는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는 출고 일자가 더 걸린다.
현대차 아이오닉5, 기아 EV6 등 전기차는 각각 12개월, 14개월 이상이 소요된다. 인기 차종의 하이브리드의 납기 일정은 오히려 더 지연됐다. 현대차 아반떼 HEV는 올해 8월 주문한다면 인도 기간이 17개월로 예상됐는데 한 달 만에 20개월로 3개월 더 늘었다. 그렌저 HEV 역시 출고 기간이 2개월 더 길어져 10개월로 밀렸다. 투싼 HEV는 13개월 이상 걸린다.
기아 K8 HEV, 스포티지 HEV 등도 차량을 받기까지 각각 10개월, 18개월 걸린다. 현대차 쏘나타 HEV의 인도 기간이 6개월로 비교적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오래 걸리는 모델은 제네시스 GV80다. 출고까지 18개월 정도 걸린다. 2열 컴포트 패키지나 파노라마 선루프를 선택한다면 일정이 더 지연된다.
수입차업계도 신차 대기 기간이 1년을 넘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올해 상반기 볼보 전체 판매량의 21.4%를 차지한 XC60는 최소 10개월은 대기해야 하고 XC60 하이브리드는 1년 이상이 걸린다. 메르세데스-벤츠 가성비 전기차 EQA 250 역시 지금 계약해도 1년 안에 차량을 받기 어렵다. 서울 송파의 한 벤츠 딜러는 “비슷한 스펙인 EQB와 동시에 계약을 진행하고 먼저 나오는 차량으로 출고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소비자 D 씨는 “매장에 전화해도 딜러와 연결이 바로 안된다. 딜러가 전화해준다는 답변을 받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대기자도 많고 사려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연식만 바꿔도 신차 가격 수백만원씩 올라
“차량 수령과 잔금 정산까지 수개월 걸립니다. 우선 가계약하고 정확한 금액은 출고 시점에 다시 계산하시죠.”
기다리는 것도 힘든데 자동차 가격도 올랐다. 반도체와 철광석 등 부품과 원자재 비용 상승으로 생산 단가가 올라간 데다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면서 완성차 업체가 가격을 올리는 데 부담이 덜하다는 지적이다. 이전에는 부분 변경(페이스리프트)이나 완전 변경(풀 체인지) 이후 가격을 올렸다면 이제는 차량의 연식만 변경해도 가격을 올리고 있다.
아이오닉 5는 지난 7월 연식 변경을 하면서 소비자 부담 금액이 500만~600만원 정도 늘었다. 배터리 용량을 늘리고 레인센서(빗물 양을 감지해 와이퍼 속도를 제어하는 장치)를 추가하는 등 트림(동일 모델 내 등급) 별로 일부 품목을 조정했다. 최근 2023년형 QM6를 내놓은 르노코리아도 차종별로 최대 수백만원까지 가격을 인상했다. 한국GM은 주력 차종인 트레일블레이저의 2가지 하위 트림을 없애고 연식 변경 모델에 대해 90만원 정도 가격을 올렸다. 신차 대기 장기화에 계약 시점과 결제 시점의 가격 차이가 커지면서 소비자들의 주머니만 가벼워지고 있는 셈이다.
카플레이션(자동차+인플레이션)의 쓰나미는 중고차 시장도 덮쳤다. 한 자동차 판매 사원은 “신차 대기에 중고차도 품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며 “중고차가 ‘귀한 몸’이 되면서 중고차를 파는 손님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높은 가격 아니면 팔려고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중고차 판매업자들에게 넘어가는 가격이 올라가자 여기에 이윤을 붙인 중고차 판매 가격은 더욱 올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설명이다.
차량용 반도체 공급, 왜 문제인가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이 문제야.’ 자동차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는 사실이다. 신차 출고 지연은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자동차가 이동에 충실한 기계 장치에 불과했다면 현재는 각종 전자 장비가 탑재된 생활 공간으로 변모했다. 변화의 중심은 반도체다. 차량용 반도체는 차량 내 부품과 전자 장비의 두뇌 역할을 한다. 온도·압력 등 각종 정보를 측정하는 센서와 엔진 제어 등 장치에 사용된다. 다시 말해 반도체가 들어가지 않은 자동차는 ‘깡통’ 차량인 셈이다.
최근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이 다소 완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런데 ‘내 차’는 왜 늦게 받는 걸까. 스마트폰 등이 반도체 공급난으로 물량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왜 유독 자동차에 들어가는 반도체 부품만 공급난이 발생한 것일까.
시발점은 코로나19 사태다. 2020년 3월 이후 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신차 판매가 급감했다. 주요 완성차 업체들은 반도체 부품 수요를 선제적으로 줄였다. 같은 이유로 재택근무가 증가하면서 정보기술(IT) 제품과 가전제품의 수요가 늘었고 차량용 반도체 업체들은 스마트폰·PC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 부품 생산에 치중했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NXP반도체·인피니온·르네사스 등 7개 기업이 세계 생산량의 80%를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자동차 수요가 빠르게 회복됐고 덩달아 차량용 반도체 주문이 늘어나면서 공급난이 빚어진 것이다. 정리하면 주요 완성차 업체들의 수요 예측이 빗나가면서 ‘신차 대기 현상’이 발생했다는 얘기다.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차량용 반도체의 평균 재고량은 2019년 40일이었는데 2021년 3~5일로 확 줄었다. 같은 기간 자동차 수요는 17% 증가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 2월 미국 텍사스에선 30년 만의 한파와 폭설로 정전 사태가 발생, 인피니온·NXP 등 반도체 기업의 공장들이 줄줄이 가동을 멈췄다. 일본 지진과 화재로 르네사스 제품 생산이 중단됐고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말레이시아의 차량용 반도체 후공정 시설마저 마비됐다. 한 번 중단되면 재가동까지 최소 3개월이 소요된다. 공장이 멈춰 선 동안 자동차 주문이 계속 쌓였고 밀린 주문을 해소하면서 신규 발주에 대한 반도체 수급이 더 늦어지게 된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도 발목을 잡았다. 우크라이나는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네온가스의 70%, 크립톤의 40%를 공급해 왔던 국가다.
자동차와 반도체의 생산 방식 차이도 공급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완성차 업체의 생산 방식은 필요한 부품을 적기에 주문하는 방식인 반면 반도체 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필수다. 즉 반도체는 6개월 정도의 생산 리드타임(주문 뒤 제품을 받기까지 시간)이 소요돼 자동차의 갑작스러운 수요 증가에 즉각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다.
김준성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한 중국 락다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이슈가 해소되면서 일부 부품 보급 문제는 해결됐지만 차량용 반도체는 여전히 부족하다”며 “내년 중순은 돼야 수급난이 조금 풀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반도체 수급난의 반복을 막기 위해 한국에서 차량용 반도체를 제조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그는 “내연기관차는 반도체 부품이 200~300개 들어가지만 미래 모빌리티인 전기차는 500여 개, 자율 주행 차량은 800~1000개 이상 필요하다”며 “차량용 반도체 부품은 3%만 자체 조달하고 있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셈인데 차량용 반도체 부품이 고부가 가치로 변하고 있고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최소 10% 정도는 자체 조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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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팔았지만, 더 벌었다
국내외 완성차 업체들은 부품 수급난으로 차량을 덜 팔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돈은 더 잘 벌었다. 비밀은 상품의 마진(원가와 판매가 차액)에 있다. 고급차·스포츠유틸리티차(SUV)·친환경차의 마진이 더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하게 말해 비싼 차 위주로 제품이 팔리며 짭짤한 수익이 난 것이다.
올해 2분기 현대차의 전체 판매량은 97만6350대로, 1년 전보다 5.2% 감소했지만 SUV와 제네시스의 비율은 5.2%포인트 높아졌다. 현대차의 2분기 매출은 35조9999억원, 영업이익은 2조9798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2분기 대비 매출은 18.7%, 영업이익은 58%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8.3%를 기록했다. 2014년 2분기(9.2%)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기아 EV6의 인기도 매섭다. 기아는 사상 최초로 분기 영업이익이 2조원을 넘어섰다. 매출도 처음으로 20조원을 돌파했다. 영업이익률은 10.2%로 처음으로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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