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달러에 1350원 시대. 지난해 연말부터 치솟은 원·달러 환율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강달러·슈퍼달러를 넘어 ‘킹달러’라는 말까지 나온다. 원·달러 환율 상승세는 확연하다. 서울 외환 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8월 31일 장중 달러당 1352.3원까지 오르며 연고점을 경신했다(종가 1337.6원).
2008년 금융 위기 후폭풍이 한창이었던 2009년 4월 29일(장중 1357.5원) 이후 13년4개월여 만의 최고 수준이다. 지난 10년간 평균 환율이 달러당 1130원인 것과 비교하면 사실상 환율만 놓고 보면 ‘금융 위기’급이란 말이 나온다.
달러로 먹고사는 이들의 희비 또한 크게 엇갈리고 있다. 수입업자와 해외 유학생들은 울상인 반면 수출업자와 환테크 투자자들은 물 들어올 때 노 젓기에 바쁘다. 킹달러가 가져 온 요즘 풍경을 들여다봤다.효자 된 달러, ‘팔자’“달러가 효자가 될 줄이야….”
직장인 K 씨는 최근 치솟는 환율이 반갑다. 지난해 8월 직장 선배의 귀띔에 들어간 달러 어음이 다른 재테크 수단들을 제치고 유일하게 수익을 안겨주고 있다. 주식과 비트코인에서는 백전백패로 마이너스 수익률을 봤지만 달러 어음만이 유일하게 수익을 냈다. 무려 18%다.
최근 K 씨처럼 환테크로 수익을 보는 이들이 늘면서 외화 예금 유치가 크게 늘고 있다. 달러 강세에 개인은 물론 수출입 기업 등 법인들의 달러 예금을 예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 말 현재 외국환 은행의 거주자 외화 예금은 903억8000만 달러로 전월 말 대비 33억2000만 달러 늘었다. 이 가운데 달러화 예금이 28억6000만 달러, 유로화 예금이 5억7000만 달러 규모다. 한화로 셈하면 한 달 새 약 4조5000억원이 늘어난 것이다. 거주자 외화 예금은 내국인과 한국 기업, 한국에 6개월 이상 거주한 외국인, 한국에 진출해 있는 외국 기업 등의 한국 외화 예금을 말한다.
시중은행도 환테크 투자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상품 홍보에 적극적이다. NH농협은행은 8월 16일 법인 전용 입출식 외화 예금 상품인 ‘NH플러스외화MMDA’를 출시했다. 외화를 하루만 맡겨도 외화 정기 예금 수준의 금리를 주는 상품으로, 100만 달러 이상 예치하면 연 1.91%(세전)의 금리를 적용받을 수 있다. KB국민은행은 9월 말까지 외화 정기 예금을 특별 판매하고 있다. ‘굴리고 불리고 외화정기예금’에 처음 가입하는 사업자에 한해 90% 환율 우대 혜택을 제공한다. 이 밖에 우리은행의 ‘우리 더달러 외화적립예금’은 현찰 수수료를 면제해 주는 상품으로, 연말까지 환율 우대율을 기존보다 30%포인트 확대해 80%를 적용하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반대로 차익 실현에 나선 이들도 있다. 지난 3년간 ‘사자’ 행렬을 이어 갔던 ‘서학개미’들이 대표적이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미국 주식을 산 서학개미는 올 6월부터 매수 규모를 줄이더니 7월 들어 순매도로 돌아섰다. 2019년 8월 이후 2년 11개월 만에 첫 순매도 전환이다. 순매도 규모는 7월 368만 달러(약 49억원)에서 8월 6억5891만 달러(약 8856억원)로 급증했다. 금융권에서 근무하는 H 씨도 최근 보유 중인 빅테크 주식의 매도 시점을 고민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올해 초(1월 3일 기준) 달러당 1191.8원에서 8월 30일 장중 1352.3원까지 오르다 보니 미국 주식을 팔면 환차익이 13.5%에 달하기 때문이다. 김승혁 NH선물 이코노미스트는 “향후 조기 금리 인상 기대 일축과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의 의지에 강달러 흐름은 이어 가겠지만 차익 실현에 상승 폭은 제한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급여를 달러로 받는 이들도 웃음꽃이 피었다. 외국계 기업의 직원 또는 최근 급증한 유튜버들이다. 2년 전 유튜브에서 브이로그를 시작한 B 씨도 최근 생각지 못한 추가 수입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유튜브 애드센스 수익으로 매달 평균 600~800달러(약 80만~110만원)의 수입을 유지하고 있는데 올 1월과 비교해 약 10만원의 환차익이 발생한 것이다. B 씨는 “8월에는 이체하고 환전하는 동안 금액이 늘어날 정도로 환율이 크게 올랐다”며 “요즘처럼 환율이 높을 때 달러 수입이 있다는 것은 든든한 돈나무를 보유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강달러가 가장 반가운 것은 원래대로라면 수출업자다. 환율 상승은 수출 기업의 채산성 개선은 물론 가격 경쟁력 제고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 등 주요국에서 인기 있는 화장품 등 K-뷰티 제품은 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오히려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 만큼 시장 확대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실제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6월 수출입 중소기업 508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 조사에 따르면 환율 급등으로 이익이 발생했거나 영향이 없는 기업이 69.5%(이익 발생 19.1%, 영향 없음 50.4%)로 피해가 발생했다고 응답한 기업(30.5%)을 크게 웃돈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최근에는 환율 상승이 수출에 유리하다는 기초 공식에 균열이 가고 있다. 원자재 수입 가격이 폭등하는 속도를 수출 증가가 따라잡지 못하면서 기업들의 수익성이 오히려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듯이 무역 수지(총수입과 총수출 간 차이) 적자도 확대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8월 1~20일 무역 수지는 102억17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연간 누계로 보면 올해 1월 1일부터 현재까지 무역 수지는 254억7000만 달러 적자다. 820원 된 신라면, 킹달러에 우는 사람들 수출 기업이 이럴진대 수입 비율이 높은 회사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해외 보트를 수입 대행하는 J 씨는 매일 환율 종가 들여다보기에 바쁘다. 7월 들어 가파른 오름세에 주문은 뚝 끊긴 지 오래다. 얼마나 더 오를지 예측하기조차 어려우니 값비싼 보트 매물을 잡아 놓기도 어렵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매물이 없어 2년간 때아닌 불황을 맞아야만 했는데 이제는 매물이 있어도 환율 때문에 물건을 잡을 수조차 없다.
식품업계도 줄줄이 가격 인상을 예고했다. 원재료 가격이 급등하고 원·달러 환율이 상승하면서 원가 부담이 커진 때문이다. 농심은 9월 15일부터 라면 제품의 평균 출고 가격을 11.3%, 스낵 주요 제품의 출고 가격을 5.7% 인상한다. 출고 가격 기준으로 신라면은 10.9%, 너구리는 9.9%, 새우깡은 6.7%, 꿀꽈배기는 5.9% 오른다. 대형마트에서 봉지당 평균 736원에 판매되는 신라면 가격은 약 820원으로, 새우깡은 1100원에서 1180원으로 조정되는 셈이다. 농심 관계자는 “원가 절감과 경영 효율화를 추진하는 등 원가 인상 압박을 감내해 왔지만 2분기 한국에서 적자를 기록할 만큼 가격 조정이 절실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농심은 올해 2분기 연결 기준 영업이익이 지난해 2분기보다 70% 넘게 급감했다. 특히 해외 법인을 제외한 한국 사업은 30억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하며 24년 만에 적자 전환됐다.
기러기 부모 J 씨도 느는 건 한숨뿐이다. 미국에서 유학 중인 남매를 생각하면 점점 기세를 더하는 강달러가 야속하기 그지없다. J 씨는 매달 2000달러를 송금하는데, 올 초와 8월 기준으로 30만원 정도를 더 보태야 한다. 이마저도 최근 미국 내 물가 상승으로 인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다. 그는 “환율이 조금이라도 낮을 때 환전하려고 내내 타이밍을 기다렸는데 내리기는커녕 치솟고 있다”며 “이쯤 되니 환율을 예측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해외여행객이나 직구족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환전 타이밍을 계산했던 이들은 ‘지금이 가장 빠를 때’라는 생각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환전 또는 상품 구매에 나서거나 아예 환율이 떨어질 때까지 보류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BC카드 신금융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BC카드 고객들이 해외 직구로 결제한 건수는 1.4% 줄었다. 그중 미국 직구 결제 건수는 1년 새 18.3%로 급감했다.
문제는 ‘바닥은 아직’이란 공포감이다. 8월 말 미국 와이오밍 주에서 열린 잭슨 홀 미팅에서 제롬 파월 Fed 의장은 금리 인상 의지를 강도 높게 밝히면서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350원대로 급등했다. 전규연 하나증권 이코노미스트는 “Fed가 (긴축) 스탠스를 전환하는 시점이 지금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라며 “하반기 미 달러는 Fed의 정책 기조와 미국과 유럽의 체력 차이를 반영해 강보합 흐름을 이어 갈 것이다. 원·달러 환율의 추가 상승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가 예상한 하반기 원·달러 환율은 3분기 달러당 1320원, 4분기 1315원 수준이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애널리스트 역시 “대외적 불안 요인들 속 고환율이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며 “향후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350원이 아니라 1400원이나 그 이상으로 계속 뛸 수도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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