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증과 정보 공유 필수인 2030이 새 ‘큰손’

수요 늘었는데 공급 부족해 가격 껑충

30년 만에 ‘한국형 위스키’ 나올까…신세계‧롯데, 위스키 시장에 도전장

한경비즈니스는 1년에 두 번 합본호를 냅니다. 추석과 설날 2주치를 한꺼번에 낸다는 말입니다. 기자들은 이때 약간은 숨을 돌릴 여유를 갖습니다. 물론 온라인 기사도 써야 하기 때문에 마냥 맘이 편할수 만은 없지만요. 이 정도로는 좀 아쉽다는 독자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한경비즈니스 편집진은 올해 썼던 기사 가운데 ‘시간의 간섭’을 받지 않는 기사들을 추려봤습니다. 공부해두거나 읽어두면 상식이 되거나, 트렌드를 이해할 수 있는 10개의 기사입니다. 이를 한곳에 정리했습니다. 연휴 기간 영상에서 벗어나 활자의 세계로 눈을 돌린 독자분들께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편집자 주>

서울 남대문 주류도매상가에서 소비자들이 다양한 위스키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 사진=한국경제DB
서울 남대문 주류도매상가에서 소비자들이 다양한 위스키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 사진=한국경제DB
5월 13일 서울 홍대 거리는 그야말로 ‘불금’이었다. 거리에는 음악 소리가 울려퍼졌다. 술꾼들은 분위기 좋은 술집을 찾기 위해 레이더망을 켰다.

한 위스키바를 찾았다. 오후 8시께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위스키바 안은 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위스키=아재 술’ 공식을 성립시키는 테이블은 단 한 개. 퇴근길 위스키 한잔으로 1주일을 마무리하는 사회 초년생,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와 몰려온 대학생 등이었다. 그뿐이랴. 위스키가 참 독하다고 하던데 젊은 여성 손님도 곳곳에 보였다.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봤다. 가격은 예상보다 비쌌다. 한 잔에 가장 싼 게 1만4000원. 올해 최저 시급(9160원)으론 위스키 한 잔도 마실 수 없는 셈이다. 그나마 분위기 좋은 가성비 술집으로 알려진 곳인데도 이렇다.

위린이(위스키+어린이) 티가 났나. 바텐더가 입문자에게 권한다며 발베니 더블우드 12년을 내놨다. 향과 목넘김이 비싼 값을 하는듯 했다.

“많이 비싸죠? 원래도 고급 술인데 코로나19 사태 이후 위스키 값이 올랐어요.”

33세의 바텐더 김태규 씨의 설명이다. 그의 본업은 따로 있었다. 여행 사업을 하는 김 씨는 2018년 대만의 한 호텔에서 위스키를 처음 맛보고 싱글 몰트위스키 글렌피딕을 시작으로 덕질을 하는 중이다. “바에서 일한 지는 두 달 정도 됐어요. 위스키를 더 알고 싶어 매주 금요일에만 일하고 싶다고 사장님에게 부탁했죠. 왜 그렇게 하느냐고요? 맛있고 ‘힙’하잖아요!”
위스키 수입액 전년 대비 32.4% 늘어
위스키의 인기는 통계에서 확인된다. 지난해 위스키 수입액은 1억7534만 달러로 전년 대비 32.4% 증가했다. 위스키 시장이 2007년 2억6457만 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위축되다 지난해 반등했다. 올해도 위스키 수입은 늘고 있다. 1분기 위스키 수입액은 5219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1.7% 늘었다. 수입량도 4737톤으로 같은 기간 45.9% 증가했다.

통계를 해석하면 이렇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인한 경기 침체의 여파로 위스키 수입이 급감했고 일부 주류 도매상이 부도 처리되면서 시장이 쪼그라들었다. 2016년 김영란법(부정청탁금지법) 시행으로 주요 판매처인 유흥업소용 수요가 줄어든 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며 오히려 호황기를 맞고 있다.
그래픽=송영 기자
그래픽=송영 기자
그런데 코로나19 사태와 위스키의 인기가 무슨 상관일까.

우선 수요. ‘위스키=아재 술’은 이제 옛말이 됐다. ‘오픈런’, ‘클릭 전쟁’이 위스키의 연관 단어로 묶이고 있다.

예전엔 40~50대 남성들이 위스키의 주요 소비자였고, 유흥업소가 가장 큰 창구였다. 최근 위스키 소비층이 20~30대로 확대됐다. 대형마트나 편의점 등이 주요 채널로 부상했다. 또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홈술(집에서 마시는 술)’이 트렌드로 자리 잡았고 위스키에 음료를 섞어 하이볼이나 칵테일 등 취향에 맞게 직접 제조하는 문화가 퍼지면서 선호도가 올라갔다.

이마트 분석 결과 지난해 위스키 구매 고객 가운데 2030세대의 비율이 46.1%로 2019년(39%)보다 높아졌다. 홈플러스의 위스키 매출은 전년 대비 46% 증가했는데 그중 2030세대의 구매가 전년에 비해 71%나 늘었다.

인기 위스키 종류도 달라졌다. 아재들이 즐겨 찾던 임페리얼·발렌타인 등은 여러 증류소의 술을 섞은 블렌디드 위스키다. 폭탄주 제조용으로 많이 쓰였다. 2030세대가 집과 바에서 ‘잔술’로 많이 즐기고 있는 술은 ‘싱글 몰트위스키’다. 인기 싱글 몰트위스키는 대형마트에서 품절되기도 했다. 코스트코에선 올해 1월 잔을 포함한 ‘발베니 12년 700mL’ 선물 세트를 얻기 위한 ‘오픈런(매장 문을 열자마자 달려가 구매하는 것)’ 풍경이 연출됐다. 2월엔 이마트가 애플리케이션(앱)에서 발베니 14년산을 스마트 오더(앱으로 주문하고 매장에서 픽업)로 500병을 판매했는데 2시간 만에 동이 났다.

2030세대가 싱글 몰트위스키에 열을 올리는 가장 큰 이유는 ‘힙’하다는 것이다. 싱글 몰트는 100% 보리만 사용하고 다른 증류소 술과 섞지 않은 위스키다. 블렌디드보다 맛과 향이 복잡하고 색깔이 고급스럽다. 인기 상품은 구하기도 어렵다. 이 부분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일상이고 플렉스 문화(과도한 자랑)를 즐기는 2030세대를 홀렸다. 이들은 네이버 ‘위스키 코냑 클럽’, 디시인사이드 ‘위스키 갤러리’ 등에서 오픈런과 득템한 위스키를 인증하고 ‘○○마트에 인기 위스키가 몇 개 진열돼 있다’는 정보까지 교환한다.

당근마켓·중고나라 등에서는 위스키 빈 병을 거래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인기 좋은 맥켈란 한정판 공병 등은 몇 만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네이버 '위스키 코냑 클럽'에서 위스키 애호가들이 판매 정보 등을 공유하고 오픈런을 인증하고 있는 모습. 사진=위스키 코냑 클럽 캡처
네이버 '위스키 코냑 클럽'에서 위스키 애호가들이 판매 정보 등을 공유하고 오픈런을 인증하고 있는 모습. 사진=위스키 코냑 클럽 캡처
세계 물류 대란에 위스키 품귀 현상
“남던도 예전 같지 않아요.” 남던은 ‘남대문 던전’의 준말이다. 시장 안에서 주류 상가를 찾고 가격 흥정을 하는 것이 게임 속 던전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과 비슷해서 붙여졌다. 2030 위스키 애호가들 사이에 남대문 시장 주류 상가는 ‘성지’로 불린다. 값싸고 구하기 힘든 위스키 종류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대문에서 인기 상품인 발베니와 맥캘란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스키 수요가 늘었지만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세계 물류 대란과 물가 상승이 위스키 공급 부족을 야기했다. 각국의 위스키 증류소 가동이 중단되고 화물차 운송량이 줄었다.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유리병 등 부속품 생산에도 차질이 생겼다. 발주하면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두 달 정도 걸리는데 이제는 서너 달 이상이 걸린다.

세계적인 위스키 열풍도 공급 부족의 원인이다. 특히 중국의 젊은이들이 위스키에 빠진 영향이 크다. 시장 조사 업체 유러모니터는 2020년 120억 위안을 밑돌던 중국 위스키 매출이 2025년 160억 위안으로 30% 정도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는 가격 인상으로 이어졌다. 2019년 7만원대였던 발베니 12년산은 12만원대로 올랐다. 같은 기간 맥캘란 18년산은 25만원대에서 35만원대로, 버번 위스키 러셀리저브 싱글 배럴은 7만원에서 15만원으로 뛰었다. 주류 상가나 암시장 등에서 형성되는 소매가는 부르는 게 값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스키의 원재료인 보리 가격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30% 넘게 올랐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코로나 이후 한국의 주류 시장은 주 소비층이 4050에서 2030으로 바뀌고 유통 채널과 정보 교류가 다양해졌다”며 “다만 당분간 위스키 품귀 현상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 홍대 인근 한 위스키바에서 손님들이 술을 주문하는 모습.
서울 홍대 인근 한 위스키바에서 손님들이 술을 주문하는 모습.
위스키 눈독 들이는 유통 공룡산다는 사람은 많은데 물건은 없다. 희귀 위스키의 가격은 수십억원까지 치솟는다. ‘한국형 위스키’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 신세계와 롯데가 했다. 이들은 한국형 위스키 준비에 들어갔다.

신세계L&B는 제주 위스키, 탐라 위스키, K위스키 등의 상표를 출원했다. 롯데칠성음료는 최근 스코틀랜드 위스키 제조 장인에게 자문하고 증류소 설립에 나섰다.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자체 경쟁력을 확보하는 게 목표다. 다만 실제 생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위스키 증류 전문 인력이 한국에 드물고 증류소 설립 이후에도 위스키가 충분히 숙성될 때까지 수년의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1980년대 한국은 순국산 위스키 제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당시만 해도 위스키뿐만 아니라 한국산 제품이 인기가 없었던 시절이다. 결국 순국산 위스키는 1990년 초반 사라졌다. 그로부터 30년 만에 대기업이 관심을 두고 김창수 위스키, 쓰리소사이어티스 등 수제 위스키 증류소가 등장했다. 이제는 한국산 물건이 좋다는 인식도 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세계인을 사로잡을 ‘한국형 위스키’가 나올지 기대해 볼 일이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