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대까지 209만 대 판매
쇼퍼 드리븐→오너 드리븐→준대형차로 변신
1세대부터 6세대(가솔린‧하이브리드)까지 1986년부터 36년간 현대자동차의 그랜저 판매량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그랜저는 최고급 승용차로 분류됐다. 이를 감안하면 예상보다 많이 팔렸다.
그동안 그랜저의 위상은 변화를 거듭했다. 1980~1990년대 중반에 나온 1‧2세대 그랜저는 운전사가 운전하는 ‘사장님 차’로 일부 부유층 사이에서 인지도를 쌓았다. 하지만 1990년대 말 다이너스티와 에쿠스 등 현대차에 대형 플래그십 세단이 추가되면서 독주는 막을 내렸다. 그랜저는 이미지 변화를 시도했다. ‘고급’ 이미지에 ‘성공’ 이미지를 추가했고 고객층을 넓혔다. 2009년 당시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다”라는 광고 문구가 나온 배경이기도 하다.
2016년 출시된 6세대 모델부터는 본격적인 ‘국민 차’ 반열에 올랐다. 물론 “너 성공했구나” 이런 이미지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국민 소득 수준이 올라 차량 선택에 대한 소비자의 취향이 고급화된 데다 6세대 모델이 기존 대비 젊고 날렵한 디자인을 뽐내며 3040세대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실제로 6세대는 전체 모델 중 가장 많이 팔렸다.
그랜저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현대차 내에서 포지션은 달라졌지만 고객층이 넓어지면서 더 많이 팔렸다. 현재도 그랜저는 한국 승용차 중 판매 1위다.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그랜저는 올해 1~8월 4만5055대 판매됐다. 같은 기간 경쟁 차종인 기아 K8(2만9108대)과 비교하면 1.5배 더 팔렸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10년간 신규 등록된 그랜저는 총 101만681대로 연간 등록 대수가 10만 대를 넘었다.
현대차는 올해 안에 그랜저 7세대 모델을 내놓을 계획이다. 6세대 그랜저가 6년 만에 완전 변경(풀 체인지)된 모델이다. 일단 시장의 관심은 폭발적이다. 8월 말 기준 신형 그랜저 예약자 수는 6만 명. 7월 말 3만 명이었던 대기자가 한 달 새 2배 증가했다. 현대차는 대기 소비자가 원하면 순번을 유지한 채 7세대 그랜저로 계약을 전환해주고 있다. 신형 그랜저는 공식적인 사전계약 없이도 올해(1~8월) 그랜저 판매대수를 뛰어넘는 셈이다.
7세대 모델은 직선 형태의 디자인을 채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공개한 맛보기 사진(티저 이미지)에서 차량 앞쪽과 뒤쪽에 좌우를 수평으로 잇는 일자형 주간 주행등과 테일램프가 장착된 것 등이 알려지면서 ‘각 그랜저’로 불리는 1세대 디자인을 계승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1세대 그랜저는 당시 한국에서 최고급 세단으로 인기를 끌었다. 7세대 모델은 곳곳에 유선형 디자인을 적용한 6세대 그랜저와 확 달라진 모습을 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프레임리스(창틀이 없는 형태) 도어가 적용될 가능성도 있다. 포니 픽업 등 현대차의 레트로(복고) 차량이 대거 등장하는 넷플릭스 영화 ‘서울대작전’에선 등장인물 두 명이 1세대 그랜저 차량을 튜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문에 프레임 없애면 어때”라는 대사에서 신형 그랜저 디자인에 대한 힌트를 엿볼 수 있다. 3세대 그랜저(XG)가 프레임 리스 도어가 적용된 바 있다.
또 신형 그랜저는 출시 36년 만에 처음으로 사륜구동 옵션이 탑재될 것으로 전해졌다. 사륜구동은 네 개의 바퀴를 모두 굴리기 때문에 험로, 급경사 도로, 미끄러운 도로 등을 주행할 때 안정적인 주행 성능을 발휘한다.
각지고 웅장한 1세대 ‘그랜저’ ‘최고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한국 제일의 승용차.’ 1986년 7월 신문에 이같은 문구가 실렸다. 1세대 그랜저의 광고다.
당시 고급차를 만들 기술력이 없던 현대차는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와 손잡고 ‘L카 프로젝트’를 진행, 1세대 그랜저를 선보였다.
‘웅장·위엄·위대함’의 뜻을 담아 ‘그랜저(GRANDEUR)’로 명명된 1세대는 각이 지고 직선적인 외관 때문에 ‘각 그랜저’로 불렸다. ‘모래시계’ 등 인기 드라마에서 성공한 사업가와 정치인들이 타는 모습이 방영되며 일부 부유층이 타는 고급차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대형 세단=후륜구동’이란 공식을 깨고 국산차 최초의 전륜 구동 대형 세단으로 시장에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0·2400·3000cc급 모델로 구성된 1세대는 한국 대형 승용차 수요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총 9만2571대가 판매됐다.
쇼퍼 드리븐의 2세대 ‘뉴 그랜저’ 1992년 9월 출시된 2세대 모델 ‘뉴 그랜저’는 1세대와 달리 부드러운 곡선미를 살렸다. 유럽풍의 다이내믹 스타일에 중후한 이미지를 조화시켜 쇼퍼 드리븐(운전사가 따로 있는 차) 성격을 강조했다. 당시 한국의 시판 차종 중 가장 큰 차체와 실내 공간을 자랑했다. 또 국산차 최초로 전면 에어백이 장착됐다.
이 밖에 능동형 안전장치(TCS), 감광식 거울(ECM) 룸미러, 차체 제어 시스템(ECS), 4륜 독립 현가장치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첨단 안전‧편의 기능이 탑재됐다.
‘뉴 그랜저’는 3500cc급 모델을 추가했다. 세계적으로 배기량 3500cc 차는 찾기 힘든 시절, 현대차의 모험이었다. 당시 고급차 시장에서 점유율 80%를 차지했다. 총판매량은 16만4927대다.
독자 개발하고 수출도 한 3세대 ‘그랜저(XG)’ 1998년 10월 출시된 3세대 ‘그랜저(XG)’는 일본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현대차가 독자 개발한 모델이다. 또 처음으로 해외에 수출했다.
196마력의 시그마 3.0 V6 DOHC 엔진을 장착하고 한국 최초로 수동 겸용 5단 H-매틱 자동 변속기를 적용했다.
다만 포지셔닝을 바꿨다. 젊은 감각의 디자인으로 타깃 연령층을 낮췄다. 쇼퍼 드리븐에서 오너 드리븐(차주가 직접 운전하는 차)으로 성격을 전환했다. 1999년 현대차가 그랜저의 상위 모델인 에쿠스를 선보이면서 발생한 위치 조정이다. 타깃층을 넓힌 그랜저(XG)는 한국에서 총 31만1251대가 판매됐다.
연간 10만 대 돌파한 4세대 ‘그랜저(TG)’ 2005년 5월 공개된 4세대 ‘그랜저(TG)’는 보다 젊고 역동적인 이미지로 대중성을 강조하면서 ‘돈 잘 버는 40대’를 공략했다. 이는 광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다’는 광고에서 등장인물은 더 이상 50~60대 사장님들이 아니다. 40대의 젊은 주인공이 등장해 성공과 그랜저의 이미지를 연결했다.
당시 광고에 대한 시장의 반응도 뜨거웠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선 ‘중산층을 타기팅한 적절한 광고’라는 의견과 ‘그랜저를 못 타면 실패한 인생이냐’라는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다. 해당 광고를 비꼬아 패러디가 나오기도 했는데, ‘그랜저로 대답했다’는 광고 사진 뒤에 ‘그러자 친구는 람보르기니로 대답했다’는 글과 함께 성인 남성 두 명이 람보르기니 앞에서 대화하는 사진이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왔다. 어쨌든 현대차는 ‘그랜저=성공’이라는 공식을 소비자들에게 확실히 각인한 셈이다.
그랜저(TG)에는 그룹이 독자 개발한 6단 자동 변속기를 적용하는 실험을 했다. 또 버튼 시동 장치, 블루투스 핸즈프리 등 당시 수입차에서만 볼 수 있던 기술을 적용했다. 출시 다음 해인 2006년 연간 처음으로 10만 대 돌파에 성공했다. 출시 이후 2011년까지 한국 시장에서 총 40만6798대가 판매됐다.
준대형차로 전환한 5세대 ‘그랜저(HG)’ 2011년 1월 출시된 5세대 신형 ‘그랜저(HG)’는 하이브리드·디젤 모델이 대형 승용차에 적용된 첫 사례다. 또 한국 최초로 최첨단 주행 편의 시스템인 ‘어드밴스트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ASCC)’을 적용했다. 출시 후 2017년까지 한국 시장에서 총 51만5142대가 판매됐다.
다만 2015년 현대차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가 출범했다. 이는 그랜저가 또다시 포지셔닝을 조정해야 함을 의미했다. 그랜저가 대형과 중형의 중간인 ‘준대형차’로 자리 잡은 것도 이때부터다.
또 짚고갈 점. 그랜저(HG)는 정의선 회장(당시 부회장)의 경영 능력 시험대였다. 정 회장은 기존 그랜저의 마케팅 기준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과거 정장을 쫙 빼입은 대기업 임원 또는 고위직 공무원 등 성공한 40~50대가 그랜저에서 내리는 모습이 광고 화면에 그려졌다면 그랜저(HG)의 구매층은 40대 일반 가장으로 한층 넓혔다. 광고의 메시지는 현 세대가 공감하는 ‘인정의 순간’을 주제로 했다. 조진웅·이성민 씨 등 배우를 발탁해 여러 역경을 딛고 지금의 위치에 오른 40대에게 위로·공감의 메시지를 전했다.
‘국민 차’로 부상한 6세대 2016년 11월 선보인 6세대 ‘그랜저(IG)’는 30대 고객 유입이 크게 늘었다. 사전 계약 개시 첫날에만 총 1만 5973대가 계약돼 2009년 YF쏘나타가 기록했던 1만827대를 제치고 역대 최대 기록을 달성했다. 2017년에는 국산차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이후에도 5년 연속 1위 자리를 놓지 않으면서 ‘국민 차’ 반열에 올랐다.
3년 후 현대차는 6세대의 부분 변경(페이스 리프트) 모델 ‘더 뉴 그랜저(IG)’를 내놓았다. 신규 그래픽과 사용자 인터페이스(GUI)를 적용해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탑재했다. 쉽게 말해 내비게이션·오디오 등 각종 잡다한 기능들을 디스플레이 하나에 넣어 편의성을 높였다.
또 현대차는 ‘2020 성공에 관하여’라는 광고 캠페인을 진행하며 성공을 느끼는 대상을 더 확대했다. 다니던 회사를 박차고 나온 스타트업 창업자, 치열한 사회 경쟁을 이겨낸 직장 여성, 승진한 아버지, 성공한 유튜버 등이다. 이때부터는 30대 여성이 그랜저를 타도 더 이상 위화감을 느껴지지 않게 됐다.
6세대 그랜저(가솔린‧하이브리드)는 2016년 출시 후 현재까지 한국 시장에서 약 60만 대가 판매됐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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