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 올해 12개 개도국 디폴트 경고
위기 국가에 대한 韓수출액도 감소
美 ‘킹달러’에 中 ‘부채 덫’, 자국우선주의까지…각자도생 시대
일각 “아랍의 봄 재연 가능성”
유엔 산하기구 “과거 금융 위기 때보다 피해 더 클 수 있어” 경고
개발도상국이 부도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세계은행은 올해 12개의 개발도상국이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스리랑카는 지난 5월 일시적 채무 불이행(디폴트)을 선언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주 수익원인 관광 수입이 끊기면서 외환 보유액이 바닥났다. 외화 부족으로 해외에서 물자를 사올 수 없게 되자 기름·식품·비료·의약품 등 생필품이 부족해졌다. 스리랑카는 생필품과 연료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다. 여기에 지나친 감세 등 재정 정책 실패까지 겹쳤다. 경제난에 허덕이는 국민들은 수도 콜롬보를 비롯해 각지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대통령궁까지 점령당하자 고타바야 라자팍사 전 대통령은 해외로 도피했고 지난 7월 사임했다.
파키스탄·이집트·엘살바도르·페루·가나·튀니지·레바논 등도 조만간 백기를 들 위기에 처했다.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 화폐로 채택했던 엘살바도르는 최근 가상자산 가격이 급락하며 재정 상태에 빨간불이 켜졌다.
파키스탄은 최근 대홍수까지 겪었다. 평년 대비 두 배는 많은 비가 내렸고 빙하가 녹은 물까지 더해지면서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재정도 넉넉하지 못한 데다 경제의 핵심 축인 농업 시설이 대부분 파괴돼 스스로 재건에 나서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인 섬유 생산에 차질이 생겨 외화벌이도 어렵다. 파키스탄 정부는 급한 불부터 끄기 위해 지난 8월 국제통화기금(IMF)에서 11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았다. 최근에는 아시아개발은행(AD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세계은행에서도 40억 달러를 빌려오기로 했다. 하지만 디폴트 위기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잠비아·스리랑카·가나·이집트 등도 IMF에 도움을 요청한 상태다. 골드만삭스는 이집트의 구제 금융 규모가 15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IMF가 올 들어 지난 8월까지 세계 각국에 빌려준 돈(차관)은 1400억 달러다. 역대 최대 규모다.
초인플레이션·킹달러에 개도국 휘청 인플레이션(지속적 물가 상승)은 개도국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은 언제 페소화 가치가 더 내려갈지 몰라 돈을 버는 족족 물건을 사들이고 있다.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년 전보다 78.5% 폭등했다. 30년 만의 최고치다. 시장에선 연말 인플레이션이 94.5%까지 치솟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선 세 자릿수가 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이런 와중에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지난 9월 기준금리를 5.5%포인트 인상해 75%까지 끌어올렸다. 기준금리 인상은 물가를 잡기 위한 고육책이다. IMF의 요구사항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올해 들어서만 아홉 차례 기준금리를 올렸다. 지난 7월 말 이후엔 더 가팔랐다. 불과 45일 만에 23% 뛰었다. 최근 두 달 사이 경제 수장이 3번이나 교체됐다. 1827년 이후 9차례 디폴트를 선언한 아르헨티나는 오랜 기간 부실했던 경제 체력, 살인적인 물가 상승 등으로 10번째 디폴트를 향해 가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전 세계적 현상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각국 정부가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시중에 막대한 돈을 풀었다. 올해 초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기름·원자재·식량 등 가격이 모두 올랐다. 세계 각국이 4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뛴 물가를 겪으며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의 물가 상승률도 가팔라졌다. 지난 8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8.3%를 기록했다. 전망치를 웃도는 결과다. 지난해까지 “인플레이션은 일시적(transitory)”이라는 방침을 고수했던 미국 중앙은행(Fed)은 올해 들어 방침을 선회했다. 세 차례 연속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금리 인상)을 결정했다. 연말까지 미국 기준금리는 4.4%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킹달러(달러 초강세)’ 시대가 도래했다.
경제 체력이 취약한 개발도상국들에 달러 초강세는 위협적이다. 이들은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수년간 저금리·저물가가 이어지자 무리한 인프라 투자를 진행했다. 대외 부채는 꾸준히 쌓였다. 달러 가격이 치솟으며 달러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독일 시장 조사 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의 국내총생산(GDP)에서 기업 부채가 차지하는 비율은 2000년 51.2%에서 2020년 119.8%로 두 배 넘게 증가했다.
그나마 있던 외국 자본은 금리가 높은 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해외 투자자들은 개발도상국의 주식이나 부동산을 무서운 속도로 팔아 치우고 있다. IMF의 문을 두드리는 나라가 급증하고 있는 배경이다. 파키스탄·네팔·미얀마 등 일부 국가들은 술·담배·자동차·의약품 등의 수입을 제한하며 달러를 아끼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달러 강세로 통화 가치도 크게 떨어졌다. 수입 물가 부담이 커졌다는 의미다. 일부 개발도상국들은 생필품이나 원자재를 외국에서 사와야 한다. 브라질·인도네시아 등 신흥국과 달리 자국 내에서 충당할 수 있는 자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높은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아르헨티나 외에도 스리랑카와 파키스탄의 지난 8월 물가 상승률은 각각 70.2%, 50%였다. 레바논은 올 들어 150%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도 했다. 튀르키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지만 9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83.4%로, 1998년 7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밥상 물가도 하루가 다르게 널뛰고 있다. 세계은행의 식량 안보 보고서에 따르면 레바논의 지난 6월 식량 가격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32% 뛰었다. 물가 인상률에서 식량가 상승률을 뺀 실질 식량가 상승률은 지난해 대비 122%였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레바논은 화폐 가치도 하락하면서 식량 가격 부담을 거의 4배나 짊어졌다고 세계은행은 분석했다. 같은 기간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식량 가격 상승률도 1년 전보다 255% 급등했다. 이어 베네수엘라 155%, 튀르키예 94%, 이란 86% 등이 뒤를 이었다. 과거와 다른 디폴트 위기
킹달러로 불리는 달러 초강세의 여파는 개도국뿐만 아니라 영국 등 선진국에도 매서운 칼날이 되고 있다. 주요국은 금리를 인상하고 미국 국채를 팔며 자국 통화 약세를 막고 있다. ‘역환율 전쟁’이다. 당장의 수출 경쟁력보다 인플레이션을 잡고 금융 시장을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란 얘기다.
또 세계화가 종식되고 자국 우선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위기에 쫓긴 유럽 선진국들도 각자도생으로 접어들었다. 전 세계 물가가 치솟고 개발도상국이 부도가 나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고 있다.
일각에선 중국의 ‘부채 외교’가 개발도상국 경제 위기의 트리거로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은 미국에 맞서 개발도상국에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2013년부터 ‘일대일로’ 사업을 추진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의 개발도상국에 도로·항만·공항·발전소 등 사회 기반 시설을 건설해 주고 해당 국가와 경제·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프로젝트다. ‘육·해상 실크로드’라고 불린다.
하지만 일대일로 사업으로 중국은 해당국에 수익 전망이 거의 없는 프로젝트를 요구했고 최근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아 채무국들은 빚더미에 앉았다. 중국으로선 자금 회수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국가부채를 연구해 온 세바스찬 혼, 카르멘 라인하트 등 서방 경제학자들은 2010년 5%에 불과했던 중국의 해외 부실 대출액 비율이 현재 60%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2년까지 최빈국 74개국이 갚아야 할 채무 규모는 350억 달러에 달하는데 이 중 40% 이상이 중국에 상환해야 하는 부채다.
채무국들이 부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항만·공항 등의 운영권이 중국에 넘어갈 수 있다. 스리랑카는 14억 달러가 투입된 함반토타 항구 운영권을 중국 업체에 넘겼다. 이집트·우간다·캄보디아도 주요 자산에 대한 운영·소유권을 잃었다. IMF의 도움을 받는 곳 중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관련 깊은 국가들이 많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일대일로를 공격하는 이유다.
개발도상국의 국가 부도 위험이 고조된 요인은 복합적이다. 수년간 쌓아 온 대외 부채 속에 감염병·초인플레이션·전쟁 그리고 주요국의 금리 인상 행렬 등이 숨 고를 새 없이 이어지면서 디폴트 위험에 빠졌다.
개도국 파산, 세계 경제 영향은?
세계 경제에서 개발도상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낮다. 70여 국가의 비율은 전 세계 GDP의 2%도 되지 않는다. 자원도 풍부하지 않아 공급망에 문제가 생기지도 않는다. 연쇄 국가 부도가 발생해도 세계 경제에 끼치는 영향은 미미한 셈이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 동안 전 세계적으로 부채가 크게 늘었고 경기 침체 위기도 커졌다. 초인플레이션 상황 속에 개발도상국이 연이어 국가 부도에 내몰린다면 2010년 튀니지를 기점으로 확산됐던 ‘아랍의 봄’이 개발도상국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이미 일부 국가에선 식량과 에너지 가격 폭등을 견디다 못해 시위대가 거리로 나선 사례가 있다.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남수단, 예멘 등 6개국은 현재 식량 위기의 수준이 ‘최고 경계’ 상황이다. 레바논, 앙골라, 시리아 등 점점 더 많은 국가가 식량 위기를 겪을 것으로 전망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최근 무역 개발 보고서에서 “주요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은 개발도상국에 피해를 주고 세계적인 경기 침체를 유발해 2008년 금융 위기나 2020년 코로나19 사태보다 더 큰 피해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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