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에서는 9·11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하면 많은 일이 풀렸습니다. 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은 요즘 마법의 주문은 “이게 다 푸틴 때문이야”로 바뀌었다고 진단합니다. 미국도 프랑스도 다 마찬가지라는 지적이었습니다. 정부의 무기력증을 덮어버리는 수단입니다.
한국도 다르지 않습니다. 위기를 가리키는 각종 지표에도 정부는 심각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다 푸틴 때문이야”라고 외치는 것으로 정책을 대신 하는 듯합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세계 경제를 덮친 위기 상황을 짚어 봤습니다. 선진국은 주식·부동산 등의 가치가 하락하는 자산 시장의 위기를 겪고 있고, 일부 개발도상국은 국가 부도의 궤도에 얹혀졌습니다.
지난 30년, 길게는 40년간 선진국들은 저금리 시대를 살았습니다. 미국 금리가 이를 말해 줍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 폴 볼커가 1980년대 물가를 잡은 이후 미국 금리는 추세적으로 낮아졌습니다. 닷컴 버블 붕괴와 9·11 테러, 2008년 금융 위기 등 어려울 때마다 정부가 돈을 푼 결과입니다.
저가의 중국산 공산품도 선진국 물가안정에 기여했습니다. 그렇게 40년이 흘렀습니다.
코로나19 사태는 저금리 시대의 하이라이트이자 한 시대의 종지부를 찍는 변곡점이 됐습니다. 각국 정부는 시중에 풀어 놓은 돈을 거둬들일 사이도 없이 더 풀어야 했습니다. 이 유동성을 먹고 주식·부동산·스타트업의 가격이 치솟았습니다.
코로나19가 주춤해지고, 모든 상품의 수요가 늘자 문제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공급망 대란이 발생합니다. 코로나19때 줄여 놓은 설비와 인력이 문제였습니다. 공급난은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습니다. 중국은 인건비 상승으로 글로벌 물가 안전판 기능을 상실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경제의 정치화를 가속화하며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이 와중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쳐들어 갑니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정치 수단은 휘청거리는 세계 경제에 카운터 펀치와도 같았습니다. 곡물과 천연가스 가격까지 급등합니다. 자원민족주의 흐름까지 나타나며 각자도생의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때와 달리 요즘 국제 공조란 단어를 듣기 힘든 이유입니다.
물가를 잡기 위해 각국 정부는 금리를 올렸습니다. 유동성 회수에 나서자 주가는 급락했습니다. 그래도 미국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자 돈이 미국 국채와 달러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달러 대비 다른 화폐의 가치는 급락(환율 급등)했습니다. 각국 환율 차트가 외환 위기 아니면 잘 나타나지 않는 모양을 그리게 된 배경입니다. 물가 상승률도 낯설기만 합니다. 가장 안정적인 국가라는 독일의 9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10%를 기록했습니다. 1951년 이후 약 71년 만에 가장 높았습니다.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가 고물가·고환율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와중에 영국은 감세 정책을 발표했다가 파운드화 급락, 국채 금리 급등으로 이를 폐기하는 해프닝까지 벌였습니다. 영국 중앙은행(영란은행)은 코미디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이런 시기 자산 시장의 위기가 실물 위기로 전이되지 않게 하는 게 정부의 역할입니다.
과거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온갖 정책을 다 썼습니다. 외환 위기란 불을 끄기 위해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워크아웃이란 제도를 수입해 오고 대우그룹을 날려 버렸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는 한국은행이 나서 미국과 통화 스와프라도 얻어 냈습니다.
위기는 늑대처럼 다가오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이게 다 푸틴 때문이야, 이게 다 문재인 정부 때문이야”라는 마법의 주문만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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