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감염병‧전쟁 겹치며 몰락하는 영국
중소기업 유럽으로 러시
기업 투자는 감소, 노동력 부족도 심각
고공 행진하는 에너지 요금에 저소득층 타격
물가>임금, 거리 나온 영국인들

파운드화 폭락 의미는
“英 경제 충격 흡수 능력 저하”

[비즈니스 포커스]
영국 런던, EU 재가입 위한 집회. 사진=연합뉴스
영국 런던, EU 재가입 위한 집회. 사진=연합뉴스
“물가가 너무 치솟고 있어요. 전등을 끄거나 식사 횟수를 줄이고 있습니다. 이제 겨울인데 난방 켜는 것도 미루고 있어요.”

개발도상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거느리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영국의 이야기다.

영국의 9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지난해 같은 달 대비 10.1% 올랐다. 7월에 이어 또다시 40년 만에 최대 폭 상승률을 기록했다. 식품 가격이 급등하며 물가를 끌어올렸다. 영국 소비자 단체 위치(Which)가 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80%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약 50%가 경제 위기 전에 비해 건강하게 먹는 것이 어렵다고 응답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끼니를 거르는 아이들도 늘었다. 90만 명의 어린이가 정부 무료 급식에 추가로 등록했다. 2020년 말엔 유니세프(UNICEF : 유엔아동기금)가 굶주리는 영국 어린이들을 위해 긴급 대응에 나섰다. 유니세프가 영국을 지원한 것은 1946년 설립 이후 처음이다.

영국 전국교장협회(NAHT)은 에너지와 위기와 인플레이션 여파로 영국 학교 10개 중 9개가 내년 예산 고갈 위기에 처했다고 호소했다. 올해는 50% 정도가 적자 예산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 전기‧가스 요금은 4월에 54%, 8월에 다시 80%가 올랐다. 1년 새 3배 가까이 뛰었다. 영국 공영방송 BBC가 41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10명 중 9명은 전등을 끄거나 난방을 켜는 것을 미루고 있다고 답했다.

고공 행진하는 전기·가스 요금에 견디다 못한 영국인들은 10월 1일(현지 시간) 50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잉글랜드 남부 플리머스에서 스코틀랜드 애버딘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이 참가한 이날 시위는 최근 몇 년 동안 영국에서 발생한 시위 중 최대 규모였다.

노동자들도 거리로 나왔다. 임금 인상률(4%)이 물가 상승률에 못 미치면서다. 지난 6월 철도 노동자 약 4만 명이 임금 인상과 구조 조정 철회를 요구하는 파업에 나섰다. 철도 노조는 1일 근무표를 조정하고 평상시의 11%로 근무 일정을 축소하며 10월에도 파업을 이어 갔다. 지난 8월에는 항구 노동자들이 인플레이션에 따른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지난 2분기 영국의 실질 임금은 전년 동기 대비 3% 떨어졌다. 2001년 기록을 시작한 이후 최대 하락 폭이었다.

영국의 적색 신호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영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내년 초 22%를 넘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의 에너지 비용이 현재 속도로 계속 상승하면 국내총생산(GDP)은 3.4%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씨티그룹도 영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내년 초 19% 가까이 뛸 것으로 내다봤다. 영국 경제가 위기의 파도 앞에 서 있다.
그래픽=송영 기자
그래픽=송영 기자
◆브렉시트의 저주?
영국의 물가 상승률은 미국·프랑스·독일 등 주요 7국(G7) 가운데서도 최고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영국을 G7 중 내년 경제성장률이 가장 나쁠 국가로 꼽았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코로나19 사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상승 등이 겹친 결과다.

우선 브렉시트.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로 촉발된 유럽 재정 위기가 계기가 됐다. 영국이 내야 할 유럽연합(EU) 분담금 부담은 계속 늘어났다. EU 탈퇴 목소리도 비례해 커졌다. 2015년 말 시리아 등으로부터의 난민 유입이 계속되자 EU 탈퇴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가속화됐다. 대영제국에 대한 강한 자부심도 영향을 줬다.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에서 51.9% 찬성으로 EU 탈퇴를 결정했다. 2020년 1월 31일 브렉시트를 단행했고 1년의 전환 기간을 거쳐 2021년 1월 1일 EU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영국 경제의 기초 체력 자체가 크게 약화하고 있다. 영국 중소기업이 가장 큰 경제적 손실을 봤다. 과거 이들은 유럽 시장 진출을 발판으로 기업 규모를 확대했다. 그런데 EU 국가들과의 무역 장벽이 세워졌다. 그간 면제돼 왔던 통관 절차를 시행하게 됐다. 더 이상 과거처럼 내국에 파는 것과 같은 세율을 적용받을 수 없다는 의미다. 영국 기업은 EU에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수출’을 하게 됐다.

EU 27개 회원국은 국경도 규칙도 달랐다. 유럽에 보낸 제품이 수개월간 세관을 통관하지 못하거나 몇 주 뒤에 물건이 고객에게 도착했다. 유럽 고객들은 영국 중소기업에 통보했다. “EU 내에서 비슷한 제품을 찾았다. 더 이상 영국과 거래하고 싶지 않다.”

런던정경대(LSE)는 브렉시트 협정(무역협력협정·TCA협정) 발효 후 첫 6개월 동안 영국과 EU 간의 교역이 약 3분의 1로 줄어든 것으로 추산했다. 장기적으로 1인당 470파운드의 임금 타격을 받을 것으로 추정했다.

생존을 위해 영국 중소기업들은 유럽 내 법인을 설립하고 별도의 물류 창고를 만들었다. 또 통관 수수료 등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한 번에 많은 물품을 유럽에 전달했다. 이후 유럽 내 창고에서 EU의 모든 고객에게 배달했다. 영국보다 독일과 폴란드 등에서 더 많은 직원을 고용하고 더 많은 화물 업자와 파트너를 맺었다. 세금도 영국보다 유럽 국가에 더 많이 냈다. 영국 내 비즈니스가 감소하고 유럽 내 비즈니스는 증가하게 됐다.

영국에 창고를 두고 EU 전체로 물건을 팔던 기업들도 급하게 독일과 네덜란드 등에 창고를 개설하고 부가세 번호를 등록하는 등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옥스퍼드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16년 이후 영국을 제외한 G7은 기업 투자가 증가한 반면 영국은 투자자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글로벌 금융사들도 다른 국가로 이전하면서 ‘영국=국제 금융 중심지’라는 위상도 약화됐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 이후 G7 국가들은 무역 수지가 회복됐지만 영국은 뒤처지게 됐다.

노동력도 대거 빠져나갔다. 싱크탱크인 러닝앤드워크인스티튜트는 영국에서 100만 명의 노동력이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자깃 차다 영국 국립경제사회연구소(NIESR) 소장은 “무역 장벽이 생성되자 (고급 인력인) EU 회원국 국민들은 영국을 떠났고 정책 불확실성으로 기업 투자가 위축되면서 영국 경제의 성장이 둔화됐다”고 분석했다.
10월 2일 영국 버밍엄에서 열린 보수당 회의 밖에서 리즈 트러스 전 총리의 감세 정책에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10월 2일 영국 버밍엄에서 열린 보수당 회의 밖에서 리즈 트러스 전 총리의 감세 정책에 반대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코로나19‧전쟁 터지며 악화일로
영국의 재정 건전성은 엉망이다. 대외 부채가 자산보다 많은 순채무국이다. 특히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영국 정부는 노동자와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지원금을 뿌렸다. 각종 세금을 한시적으로 인하하거나 면제하는 등 광범위한 지원 정책을 펼쳤다. 코로나19 사태 기간 동안 특별 재정 부양책 집행 규모가 선진국 중 상위권이다. 직접 재정 지출 규모는 GDP 대비 8.3%로 미국(9.1%) 다음이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말 영국의 GDP 대비 일반 정부 부채는 83.8%였지만 2021년에는 102.8%로 급증했다. 재정은 바닥 나고 무역 수지와 경상 수지도 적자를 기록했다.

제조업 생산 기반이 부족한 경제 구조 속에서 코로나19 사태와 전쟁까지 겹치며 물가는 더 가파르게 올랐다. 올해 2월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와 식품 가격이 급등한 계기가 됐다. 영국은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제재 조치를 시행했다. 에너지 수입을 중단하며 난방과 전력 생산에 쓰이는 천연가스·석유 등과 식품 등의 가격이 크게 올랐다.

에너지는 소비를 줄이기 어려운 품목이다. 에너지 요금이 비싸지면 저소득층이 타격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영국 싱크탱크인 국립경제사회연구소(NIESR)는 “저소득층은 지금도 소득의 25%를 에너지 비용으로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파운드화 위상 ‘흔들’?
그래픽=송영 기자
그래픽=송영 기자
미국과 금리 격차도 확대되고 있다. 물가를 잡기 위해 영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고 있지만 미국 중앙은행(Fed)의 속도보다 느리다. Fed가 3연속 자이언트 스텝(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밟는 동안 영국은 2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해 금리 추가 인상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영국의 기준금리는 2.25%, 미국의 기준금리는 3~3.25%다.

어쨌든 현재는 금리 상승기다. 금리가 오를 때는 감세 등 확대 재정 정책을 시행하면 향후 이자 상환 부담이 증가하고 정부 재정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또 지금처럼 달러가 강세일 때 빚을 갚는 부담이 더 커진다. 리즈 트러스 전 총리가 감세 정책을 발표하면서 금융 시장이 출렁인 이유다.

9월 26일 영국 파운드화의 미 달러화 대비 환율이 한때 파운드당 1.03달러까지 떨어졌다. 역대 최저치다. 국채 금리는 ‘부채 과다국’인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국채 금리를 뛰어넘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영국 경제가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크게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위상이 흔들린 상징적 기록인 셈이다.

파운드화는 오랜 기간 준(準)기축 통화로 대접받았다. 달러화와 유로화에 이어 국제 결제 비율이 높다. 브렉시트 이후 유럽의 금융 시장 허브로서 영국의 기능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영국과 유럽 간 금융 시장은 상호 연계돼 있다. 파운드화의 추락이 ‘영국발(發) 금융 위기’에 대한 경고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배경이다.

하건형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외국인이 영국 자본 시장에서 이탈할 경우 이를 상쇄할 매수 주체가 마땅하지 않다. 중앙은행의 긴급 자산 매입과 같은 한시적 조치가 최선이다. 금리가 오르고 파운드화 약세가 재개될 가능성이 높다”며 “영국 금융 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되면 유럽의 취약 금융회사와 재정 취약국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