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져 나온 ‘악화·위축·하락’ 등 부정적 키워드…재계 ‘비상 경영 체제’ 돌입

[비즈니스 포커스]

“일반적으로 3분기는 계절적인 성수기로 시황이 개선되는 시기임에도 올해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수요가 약세를 보이는 시장 환경이 펼쳐지고 있다.”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장은 10월 26일 3분기 실적 발표 자리인 콘퍼런스콜(이하 컨콜)에서 “3분기 매출은 달러 강세에도 전 분기 대비 20% 감소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노 사장뿐만이 아니다. 한국 기업들의 3분기 컨콜에서 임원들은 ‘인플레이션’, ‘경기 침체’, ‘시황 악화’, ‘소비 심리 위축’, ‘하락’, ‘저하’ 등의 부정 키워드를 쏟아 냈다. 고환율·고금리·고물가 등 3고(高) 현상에 다수의 기업들의 3분기 실적이 시장 예상치를 크게 밑돌고 있다. 기업들은 투자를 줄이고 구조를 개편하는 등 비상 경영 체제로 전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반도체·디스플레이금융 정보 업체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11월 2일 기준으로 263개사 기업의 3분기 실적이 발표됐다. 이 가운데 에프앤가이드의 증권가 전망치 평균(컨센서스)을 웃돈 곳은 총 67개사인 반면 컨센서스보다 낮은 곳은 총 100개사였다. 반도체·증권·유통·석유화학 업종의 부진이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곳이 삼성전자다. 삼성전자는 3분기 연결 기준 매출이 76조7800억원, 영업이익이 10조8500억원이라고 발표했다. 전 분기 대비 매출은 3.79%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23.62% 감소한 실적이다.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수요 둔화 등 매우 어려운 경영 여건이 지속된 가운데서도 디스플레이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이 선전하며 최대 매출을 달성했지만 메모리 사업 수익성 악화가 발목을 잡았다. 한진만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메모리 사업은 시장 환경이 변화하면서 늘 수익성 등락이 발생하는데 지금은 수익성이 하락하는 시기”라며 “수익성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가격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의 상황도 좋지 않다. SK하이닉스는 지난 3분기 연결 기준으로 매출 10조9829억원, 영업이익 1조6556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전 분기 대비 각각 20.5%, 60.5% 감소했고 지난해 3분기보다는 각각 7%, 60% 감소한 수치다.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장은 “3분기는 물가와 금리 상승으로 거시 경제 환경이 악화되며 고객들의 메모리 수요가 급격하게 감소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D램 출하량은 전망치를 밑도는 한 자릿수 중반의 감소를 기록했고 평균 판매 단가(ASP)는 전 분기 대비 약 20% 수준으로 하락했다. 낸드플래시 출하량 역시 전망치를 밑돌았다.

노 사장이 꼽은 주요 변수는 세 개다. 연초 기대와 달리 올해 하반기 메모리 시장 수요가 급격히 감소한 점,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한 각국의 금리 인상과 달러 강세 기조가 경기 침체 우려를 확대시키며 소비와 투자를 동시에 위축시킨 점,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기간 중 높은 성장세를 보였던 정보기술(IT) 제품이 기저 효과로 인해 체감되는 수요 감소의 속도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점 등이다.

SK하이닉스는 이러한 시장 환경에 맞춰 2023년 투자 축소를 통해 수급 균형을 맞춘다는 계획이다. SK하이닉스는 2022년 대비 50% 이상 감축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는 지난 금융 위기였던 2008~2009년의 업계 자본 지출 절감률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LG디스플레이 실적도 시장 전망치를 밑돌았다. 3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6.3% 감소한 6조7714억원을 기록했고 영업 손실 7593억원으로 적자 전환됐다. 전 분기와 비교하면 매출은 20.8% 늘었지만 적자 폭이 커졌다. 허석 LG디스플레이 IR 실장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 최대 판매 지역인 유럽에서 러시아·우크라 전쟁, 에너지 문제 등으로 소비 심리가 급격히 냉각됐다”며 “패널 수요 감소는 특히 강점을 지닌 하이엔드 TV와 IT 부문에서 두드러지면서 3분기 경영 실적은 당초 목표치를 밑돌았다”고 말했다.

LG디스플레이는 불황 타개를 위한 고강도의 사업 구조 재편에 나설 계획이다. 김성현 전무(CFO)는 “지난 3년간 사업 구조 고도화를 추진해 왔지만 극심한 수요 침체와 변동성 높은 시황을 극복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며 “경영 성과 부진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재무 건전성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말했다. 재무 건정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올해 설비 투자를 연초 계획 대비 1조원 이상 축소해 감가상각비 수준에서 집행하는 등 투자 및 비용의 과감한 축소를 진행할 계획이다.증권·금융증권업은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11월 2일까지 3분기 실적을 공개한 증권사 중 깜짝 실적을 기록한 메리츠증권과 하나증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증권사가 반 토막 성적표를 받았다. 삼성증권·NH투자증권·KB증권·신한투자증권·현대차증권·하이투자증권·BNK투자증권 등이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양적 완화가 진행되면서 주식 시장이 ‘돈잔치’를 한 것과 달리 연초부터 미국 중앙은행(Fed)의 긴축이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시중에 돈줄이 마른 때문이다. 증시 거래 대금이 감소하며 증권사 위탁 매매 수수료가 급감했고 금리 상승으로 운용 자산 평가 손실이 확대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레고랜드 부도 사건마저 터지며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발 유동성 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다. 증권사의 자금난이 심화하면서 일각에선 구조 조정, 도산 위기설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증권사를 품은 금융지주의 상황도 좋지만은 않다. 특히 4대지주로의 쏠림 현상이 더욱 커지고 있다. KB·신한·하나·우리 등 4대 금융지주는 분기 기준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지만 BNK금융지주·DGB금융지주 등 지방 금융지주사는 시장 전망치보다 낮은 성적을 거뒀다. BNK투자증권(BNK)과 하이투자증권(DGB) 등 비은행 계열사의 실적 부진에 전년 동기 보다 감소한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석유화학·자동차석유화학 역시 부진했다. 글로벌 수요 위축으로 화학 부문이 실적을 갉아먹었다. LG화학은 분기 사상 최대 매출을 경신했지만 배터리 소재 등 첨단 소재와 에너지 솔루션 수익이 쌍끌이한 덕분이다. 3분기 석유화학 부문의 영업이익은 926억원으로 지난해 동기 1조869억원 대비 91.4% 급감했다.

한화솔루션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전사적으로 영업이익은 93.5% 증가했지만 케미칼 부문의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5% 감소한 1197억원을 기록했다. 핵심 원료인 나프타의 가격 상승 지속에 마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실적을 발표하지 않은 롯데케미칼·금호석유화학 등 석화업계 전반에 실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에프앤가이드는 롯데케미칼의 3분기 영업 손실을 1070억원으로 추정했다. 금호석유화학은 56.76% 줄어든 2704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봤다.

현대자동차와 기아도 영업이익이 각각 3.4%, 42.1% 감소했다. 현대차와 기아는 3분기 사상 최대 규모의 매출액을 달성했지만 세타2 엔진 등 품질비용이 발목을 잡으면서 영업이익이 감소했다.

불투명한 업황에 주요 기업들 다수가 4분기부터 긴급 경영에 돌입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역시 10월 25일 열린 이건희 회장 2주기 사장단 회의에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엄중하고 시장은 냉혹하다”고 진단했다.

정부도 무역 적자가 7개월째 이어지고 월간 수출이 2년 만에 감소로 전환되면서 심각성을 깨닫고 시장 상황을 긴급 점검하는 등 위기 대처에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는 11월 1일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 주재로 KOTRA·무역보험공사·한국무역협회 등 수출 지원 기관과 반도체·자동차·정유·철강 등 12개 업종별 협회와 함께 제3차 수출 상황 점검 회의를 개최했다. 안덕근 본부장은 “정부는 연속되는 무역 적자에 더해 수출마저 감소세로 전환된 최근 무역 상황을 매우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다”며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수출 활력 제고에 총력을 다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