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판, 인기 명품에 몰리는 소비자들…리셀 시장 가격이 상품 가치 기준으로

[비즈니스 포커스]
샤넬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백화점 오픈 전부터 길게 줄을 선 모습.  사진=연합뉴스
샤넬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백화점 오픈 전부터 길게 줄을 선 모습. 사진=연합뉴스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제품인 ‘버킨백’의 백화점 정가는 약 1400만원이다. 하지만 이 돈을 주고 버킨백을 구매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에르메스는 모든 제품을 수작업으로 만들어 대량으로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다.

소량의 제품만이 수시로 매장에 들어오는데 진열되는 족족 소비자들이 이를 구매해 버킨백을 사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여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물론 오래전부터 그랬다. 현재 버킨백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중고(리셀 시장) 거래밖에 없다. 현재 버킨백은 리셀 시장(네이버 크림 기준)에서 정가(1400만원)의 두 배 이상인 320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해 발생한 일이다.

명품 시계 롤렉스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다. 정가가 1140만원 정도인 ‘서브마리너’ 제품은 백화점 대신 리셀 시장에서 이를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많다. 워낙 인기가 많아 매장에서 이를 구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브마리너는 ‘부르는 게 값’이다. 인기 색상은 정가를 훨씬 웃도는 2000만원에 거래되기도 한다.

패션 시장에 정가가 사라지고 있다. 인기가 높은 제품은 웃돈을 붙여 사는 것이 일상화됐다. 에르메스처럼 정가보다 두 배 높은 가격에 제품이 나와도 이를 덥석 구매하는 소비자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정가가 아닌 리셀 시장 거래가가 상품의 가치를 매기는 기준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패션 시장에서 정가가 사라지는 배경은 무엇일까. 업계 관계자들은 주된 요인으로 이런 제품들이 쏠쏠한 ‘재테크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재테크 수단으로도 각광에르메스의 버킨백이나 롤렉스의 서브마리너처럼 정가의 두 배가 넘는 가격에 중고가가 매겨지다 보니 사람들은 돈을 버는 수단의 하나로 이런 물건을 구매한다는 얘기다.

최근 중고 버킨백을 2000만원 후반대에 구매한 직장인 이민아(38·가명) 씨는 “버킨백은 중고 제품이라고 해도 감가가 되기는커녕 해를 거듭할수록 값이 높아진다”면서 “마음껏 가방을 들고 다니다 다시 중고 시장에 내놓아도 오른 가격을 감안하면 본전을 뽑는 것이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에 가방을 구매하게 됐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롤렉스 등 주요 명품 브랜드들은 한국 시장에서 매년 제품 가격을 올리고 있다.

가령 샤넬만 하더라도 올해만 벌써 네 번이나 가격을 인상했다. 대표 제품인 ‘클래식 플랩백 미디움’은 가격이 1300만원대를 돌파했다. 이 제품은 지난해 11월까지만 하더라도 가격이 1124만원이었다. 1년 만에 가격이 무려 17% 올랐다.

그런데도 이를 구하지 못해 여전히 품귀 현상을 빚는 모습이다. 당연히 리셀 시장 가격은 정가보다 더 비싸다. 1600만원 정도를 줘야 새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매년 값을 올리기 때문에) 에르메스·샤넬·롤렉스 매장에서 인기 제품을 운 좋게 구매하면 갖고 있기만 해도 차익을 거둘 수 있다”며 “백화점이 문을 열기 전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 것도 이렇게 값이 올라가는 명품 제품들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최근 나타나는 소비자들의 구매 특성도 정가를 사라지게 하는 데 한몫했다는 말이 나온다. 요즘 소비자들은 제아무리 값이 비싸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구매하는 데 망설이지 않는다. 주저하지 않고 지갑을 연다.

고가의 명품 또는 생산 수량이 정해진 한정판 제품 등에 수요가 몰리며 가격이 높아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명품 업체들이 숱한 비난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한국 시장에서 자신 있게 가격을 올리는 것은 원하는 제품에 주저하지 않고 돈을 쓰는 한국 소비자들의 특성을 이용한 것”이라고 꼬집었다.인기 없는 제품은 정가 이하로 떨어져비싼 명품만 정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저가 제품들도 마찬가지로 정가가 무색해진 지 오래다. 대표적인 것이 나이키다. 나이키의 인기 농구화 ‘덩크’의 발매가는 13만~20만원 사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품들을 한정된 수량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발매와 동시에 프리미엄이 붙는다. 최소 리셀 시장에서 5만원 이상을 더 줘야 신발을 구매할 수 있고 인기 제품은 발매가의 수십 배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협업을 통해 내놓은 한정판 제품들은 가격이 천정부지다. 한국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언더마이카’는 최근 이마트와 협업해 만든 SSG랜더스 우승 기념 재킷 가격이 리셀 시장에서 두 배 이상 치솟았다.

발매가는 39만9000원인데 약 100만원에 거래된다. 자라나 유니클로 같은 SPA 브랜드가 다른 브랜드와 협업해 발매한 한정판 제품들도 리셀 시장에서 웃돈을 줘야 살 수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런 한정판 제품들은 갈수록 희소성이 더해지기 때문에 값이 오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브랜드들 또한 이런 부분을 일종의 홍보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상품에 대한 긍정적인 입소문이 나게 하는 일종의 ‘버즈 마케팅’ 기법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리셀 시장에서 값이 올랐다는 얘기가 들리면 매장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들고 브랜드들의 매출도 상승하는 효과를 거두는 선순환 고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항상 정가보다 비싸게 제품을 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인기가 없는 제품은 갓 내놓은 신상품이라도 리셀 시장에서 ‘중고’ 대접을 받는다.

최근 아디다스와 구찌가 함께 만든 이른바 ‘구찌다스’를 예로 들 수 있다. 두 브랜드가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사로잡자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야심차게 내놓았지만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예상만큼 인기를 끌지 못하며 리셀 시장에서 새 제품이 정가 아래로 거래 중이다. 정가가 약 240만원에 달하는 구찌다스의 ‘스몰 숄더백’은 150만원에 리셀 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

한편 정가보다 리셀가가 훨씬 비싸진 브랜드가 많아지면서 일부 소비자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최근에는 몇몇 브랜드들을 이런 목소리를 감안해 구매한 제품을 리셀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해 눈길을 끈다.

에르메스는 올해 3월, 나이키는 9월부터 구매자들의 이용 약관에 ‘리셀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물론 실효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이용 약관에 리셀 금지 약관을 넣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제품의 소유권을 가진 소비자가 자신의 물품을 재판매하는 것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일부 브랜드들이) 소비자들의 불만을 고려해 보여 주기식 정책을 내놓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주요 리셀 플랫폼이나 중고 거래 사이트 등을 살펴봐도 여전히 에르메스나 나이키 제품이 버젓이 판매되고 있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