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온전히 콘텐츠의 힘 만으로 문화적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유일한 나라

 2022 카타르월드컵 개막식 무대에 선 BTS 정국 / 연합뉴스
2022 카타르월드컵 개막식 무대에 선 BTS 정국 / 연합뉴스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 개막식에 K팝 가수가 등장했다. 11월 20일 열린 세계인의 축제 ‘2022 카타르 월드컵’ 개막식 무대에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정국이 오른 것이다. 전 세계인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정국은 월드컵 공식 사운드트랙인 ‘드리머스(Dreamers)’를 열창했다.

해외에서 열린 월드컵 개막식에 K팝 가수가 등장한 것은 처음이다. 한국과 아시아가 아닌 중동에서 개최된 월드컵이었음에도 K팝 가수가 개막식을 화려하게 장식하자 많은 화제가 됐다. 개막식 직후 미국과 일본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실시간 트렌드 순위엔 ‘월드컵’이 아닌 정국의 이름이 1위에 올랐다.

K-컬처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이제 K-컬처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고 흐른다. 심지어 월드컵과 같은 크나큰 글로벌 행사에서도 당당히 주역의 자리를 꿰찼다. 그 인기는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K팝·드라마·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방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류 열풍에 대해 한때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해 황동혁 감독의 시리즈물 ‘오징어 게임’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특히 그랬다. 한두 작품의 인기가 지나치게 과열된 이후 다른 작품들이 이 분위기를 이어 가지 못하면 한류가 빠르게 식어 버릴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1년이 흐른 현재,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K-컬처는 더욱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오히려 한국 아티스트와 작품이라고 하면 더 주목하고 관심을 갖는다. 2021년이 K-컬처가 그동안 응축해 왔던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발산하는 해였다면 2022년은 다양한 콘텐츠로 그 힘을 증명하며 ‘K-프리미엄’을 만들어 낸 해였다.문화적 파급력에 달라진 대우

올 한 해 동안 사랑받은 수많은 콘텐츠와 주요 시상식에서의 성과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작은 아씨들’, ‘수리남’, ‘슈룹’ 등 많은 한국 작품들이 넷플릭스 등 글로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콘텐츠의 순위를 집계하는 ‘플릭스패트롤’ 사이트의 상위권에 올랐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장르별 차트 톱10에 평균적으로 한국 작품이 3~4편씩 포함됐을 정도다.

단순히 상위권에 진입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다양한 메시지를 던지며 남다른 파급력을 자랑했다. 자폐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우영우 변호사 이야기를 통해선 전 세계 많은 시청자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각종 편견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작은 아씨들’은 “가난은 겨울옷에서 티가 난다”, “가난하게 컸어? 하도 잘 참아서” 등의 대사로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빈부 격차와 이에 대한 차가운 사회적 시선을 담아내 화제가 됐다.

뛰어난 작품성과 연기력을 인정받는 일도 잇달아 일어났다.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칸 국제영화제에선 영화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이 감독상을, ‘브로커’의 배우 송강호 배우는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과 이정재 배우는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에미상에서 감독상과 남우 주연상을 각각 차지하며 지난해에 이어 영광을 이어 갔다. 해외 주요 시상식이 있을 때마다 한국 작품의 수상 소식을 기대하는 일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K팝에서도 BTS·블랙핑크 등 주요 아티스트들의 성과가 이어졌다. K팝이란 장르 자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빌보드 차트, 글로벌 음원 플랫폼 스포티파이 등에도 한국 음악이 다수 오르고 있다.

K-컬처의 이 같은 성과들은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다. K-콘텐츠와 K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찾아보는 해외 시청자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오징어 게임’ 등 유명 한국 작품을 한 번 감상하고 나면 알고리즘에 의해 비슷한 특성을 가지거나 동일한 아티스트의 작품이 추천되는 영향도 크다. K-컬처 알고리즘의 마력에 빠진 글로벌 시청자들은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고 더욱 빠져들고 있다.

이에 힘입어 강력한 K-프리미엄도 형성됐다. ‘한류’라는 용어가 나온 지 20년이 넘었지만 해외에서 한국 제작자나 기업들이 받는 대우가 달라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전엔 아시아에서 관심을 받는 정도였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콘텐츠 시장에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외면받아 왔다. 심지어 가치를 낮게 평가받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분위기까지 만연해 있었다. 한국의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등은 뛰어난 품질로 인정받아 왔음에도 한국 문화를 낮게 평가하는 외국 사람들의 견고한 인식의 틀은 쉽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엔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한국 작품이라고 하면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넷플릭스뿐만 아니라 디즈니플러스·애플TV플러스 등 글로벌 OTT는 한국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해외 주요 기획사와 제작사도 한국과의 협업에 목말라 있다. 워낙 많은 러브콜이 쏟아져 한국 감독·배우·가수 등이 해외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작업을 하고 있을 정도다.

문화 시장에서 생긴 K-프리미엄으로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K-컬처의 열풍으로 한국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인식이 더 좋아지면서 시너지가 나고 있다. “상품과 문화를 동시에 수출해 본 나라는 미국·프랑스·독일·일본과 한국뿐”이라고 했던 프랑스의 문화 비평가 기 소르망의 얘기처럼 꾸준히 상품과 문화를 알리고 확산시킨 효과가 톡톡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국과 같은 사례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미국과 유럽 등은 군사적‧정치적으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공격적인 식민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해당 국가의 문화가 퍼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 같은 역사가 없고 현재도 그렇지 않다. 온전히 콘텐츠의 힘으로 문화적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유일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브로드웨이에선 K팝 뮤지컬까지

막강한 K-프리미엄에 힘입어 한류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고 있다. K-콘텐츠의 영역은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우선 인적 구성 자체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헤어질 결심’에 중국 출신의 배우 탕웨이가, ‘브로커’에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출연했던 것처럼 글로벌 주요 감독과 배우들이 한국 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대거 참여하고 있다. 해외에서 한국 작품 자체를 가져가 리메이크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기생충’, ‘극한직업’, ‘써니’ 등은 미국에서 재탄생할 예정이다. 그중 다수는 작품 판매에 그치지 않고 한국 창작진이 참여해 해외 기획사와 함께 만들고 있다.

K팝의 영향력도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지난 11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개막된 한 뮤지컬은 그 힘을 잘 보여준다. 뮤지컬 제목 자체가 ‘KPOP’으로, K팝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K팝 아이돌 가수들의 분투기를 담은 이 뮤지컬을 보기 위해 많은 브로드웨이 관계자들과 현지 K팝 팬들이 몰려들었다. 특정 국가의 음악과 산업에 대한 이야기가 뮤지컬 소재가 돼 글로벌 시장의 중심에서 울려퍼진 경우가 또 있을까.

이젠 K팝 시스템을 수출하기도 한다. 일본과 남미 등 다양한 지역에서 K팝 기획사와 방송사들이 해당 국가의 아이돌 그룹을 만들고 있다. 국경과 인종의 장벽을 넘어 K팝 시스템을 접목하고 그 DNA를 이식하는 작업이다.

한류 열풍을 두고 해외에선 ‘0.7%의 반란’이라고 표현한다. 전 세계 인구의 0.7%에 불과한 한국인들의 문화와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한류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반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됐다. 글로벌 시장의 명백한 주류가 돼 무한히 뻗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다가오는 2023년, K-컬처는 어떤 모습으로 생동하고 있을지 더욱 기대된다.

김희경 한국경제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