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증상은 월요병입니다. 스트레스로 폭식을 해 살이 많이 쪘어요.
팀원이 총 4명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일하지 않으면 티가 많이 납니다. 가족같은 중소회사에 사내 관계도 좋습니다. 문제는 의욕이 떨어지고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요. 대학 때부터 꿈꾸던 빛나는 직업이었는데 제가 원하던 이상과 많이 달랐고 회사는 현실이었습니다. 제가 살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비윤리적인 일들도 해야 할 일이 생겼고 이런 일을 하면서도 생계와 경력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게 슬퍼 자꾸 눈물이 납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이 일을 그만두고 아예 다른 일을 해야 하는지, 그간 해 온 경력들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또 무섭기도 합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열정이 넘쳤던 신입이었습니다. 사수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토로해 봤습니다. 사수도 저와 동일한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었고 현실적으로 어찌할 수 없음을 함께 공감했습니다. 위로는 됐지만 해결은 되지 못했습니다.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앞을 향해 달렸습니다만 지금은 다 부질없고 그냥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희윤(가명)님 안녕하세요.
살면서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한 번쯤 받아보고 싶었다고 했지요. 이렇게 편지로 만나게 돼 다행이고 반갑습니다. 편지에 적어 주신 현재의 상태와 증상들을 읽으면서 꽤 힘든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걱정도 많이 듭니다.
희윤 님은 지금 많이 지쳐 있는 것 같아요. 번아웃 증후군 초입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의욕이 떨어지고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은 정서적 소진과 직업 효능감 저하를 체감하고 있는데, 이는 번아웃 증후군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심리적 증상 중 두 가지예요. 이에 따라 월요병도 심하게 겪고 폭식도 잦아졌다고 했지요. 이 또한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 분들이 많이 호소하는 증상입니다. 여기에 더해 하기 싫은 업무를 생계와 경력 때문에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 슬퍼 자꾸 눈물이 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고 꿈을 찾던 것도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본인의 자아상과 미래상에 대해 실제보다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흔히 우울증이라고 부르는 주요 우울 장애의 위험마저 감지됩니다.
일반적인 번아웃 증후군은 오랜 기간의 격무와 피로로 인해 발생합니다. 인턴을 마치고 직장 생활 1년을 지나는 희윤 님은 번아웃 증후군이 일찍 나타난 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아마도 마케터라는 직업을 마음에 품고 대학 시절과 취업 준비 시절을 치열하게 보낸 그때부터 상당히 무리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학점도 따고 취업에 필요한 경력과 스펙도 만들고 브랜딩과 콘텐츠 제작에 대해서도 공부하면서 피로가 누적돼 왔을 듯합니다. 그럼에도 본인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너무 하고 싶던 일이고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피곤해도 피곤한 줄도 모르고 달려온 것 아닌가 싶어요. 짐작해 보면 좋은 마케터가 희윤 님 인생의 중요한 꿈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인턴을 거쳐 정직원으로 일하게 된 첫 직장 생활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직무, 자기 꿈과 거리가 있고 오히려 좀 기만적이라고 생각되는, 가치관이 맞지 않는 일들을 주업무로 하면서 차차 지쳐 간 것 같습니다. 업무 속에 담겨 있는 홍보의 과장과 구매자 리뷰 작성 등에서 생기는 업무가 비윤리적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현재 가장 가까운 고통인데, 이미 회사의 방향성과 자신의 방향성에서 정렬(alignment)이 깨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장기화되면 번아웃 증후군의 권위자인 크리스티나 매슬랙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명예교수가 말한 번아웃의 위험 요소 중 ‘가치관의 불일치’로 고착화될 수 있습니다. 회사의 목표는 자신에게 자꾸 나아가라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데 자기 삶의 가치와 윤리는 브레이크를 반복해 밟고 있습니다. 그러니 차는 나아가지 못하면서 바퀴가 공회전하며 타이어를 태우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빨간펜까지 동원하며 자신에게 일을 가르쳐 준 선배 또한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열심히 해 더 좋은 곳으로’라는 위로만 서로 나누고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요. 대표에게 어려움을 토로한 적도 없고 회사가 자신의 어려움을 먼저 읽어 다가오지도 않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죠. 희윤 님의 편지에서 소통에 대해 죽 길게 이어지는 말줄임표의 행렬을 보면 회사 내에서 ‘사회적 지지’가 미흡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또한 번아웃 증후군과 깊은 연관이 있어요.
이 상황이 희윤 님에게 단순히 직장에 대한 불만족과 소진이 아닌 꿈과 목표가 훼손돼 가고 있지는 않나 걱정이 듭니다. 우리에게는 그저 직장을 갖는 것 이상으로 자기 일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있고 희윤 님은 그런 가치와 꿈이 잘 맞을 때 만족하는 분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현 직장에서 자기 마음을 충족시키기 어려운 현실을 접할 때의 고통은 몇 마디 말로 쓰기엔 이미 충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내담자들에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내 밥그릇 챙기기’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경력과 이력 등을 챙겨 보는 겁니다. 회사는 현실입니다. 그 말은 자신이 완벽하다고 여기는, 자기가 꿈꾸는 모습의 회사를 만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입니다. 심지어 때로는 자신이 창업한 회사조차 그렇게 되기 어려운 때도 많아요. 이는 현실이 그러니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아직은 1년 차인 만큼 아주 천천히 자신을 중심으로 답답함을 바꿔 풀어 가길 바라는 의도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심리 상담 등에서 가장 중요하게 짚어 가는 지점은 ‘내(내담자)가 바꿀 수 있는 영역’을 찾는 것입니다. 타인을 바꾸는 것은 실제로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거의 불가능한 경우도 많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현실 속에서 회사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이미 본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다 부질없고 그냥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그런 말씀일 것 같아요.
그러면 이제 범위를 정해 보도록 해요. 희윤 님은 생계와 경력 때문에 회사를 쉽게 그만두기 어렵다고 했어요.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세요. 약간 우스갯소리를 빌려 오자면 ‘맥도날드 드라이브스루에서 아르바이트했다’를 ‘200억 달러 수익을 창출하는 다국적 기업의 관계자로, 자동차 산업과 협력하는 일을 했다’로 바꾸는 링크트인 콘셉트의 자기 소개를 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약간의 농담이 들어갔습니다만 이 이야기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의미 발견, 더불어 정량화를 통해 자기 일에서의 효능감을 찾는 일의 중요성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제반의 돌아봄 속에서 자신이 마케팅하는 과정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여러 단계들 속에서 어떤 미세한 순간이 자기 삶에 흥분을 가져다주는지도 발견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성과를 내는 ‘숫자’가 좋은지, 자기가 만든 바이럴 콘텐츠를 본 사람들이 ‘카드뉴스 3페이지의 글귀를 보고 마음을 바꿔 먹는’ 영향력이 좋은지 등이 각각 미세하게 다릅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자신이 일하는 내적 동기 혹은 자율성 등과 관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시간의 축을 길게 보는 것은 관점 전환에서 매우 중요한 능력입니다. 사회 초년생은 자기 일이 얼마큼 이어지게 될지,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등에 대한 감각이 아직 충분히 길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지고 친구나 주변의 성공들, 높은 연봉들을 보고 자신의 현실과 비교하면서 고립 공포(Fear of missing out)를 느끼거나 현재 삶을 더욱 비관하거나 급하게 퇴사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사실 마케팅 용어인 고립 공포(FOMO)를 마케팅 분야 사람들이 더 많이 겪을 것 같다는 개인적 우려도 갖고 있습니다.
희윤 님은 당연히 직장이나 커리어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크게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들은 때로는 성과를 내고 어떤 때는 실패도 하게 됩니다. 지금 직장에서 희윤 님이 바라는 가치나 꿈들이 덜 구현된 괴로움·아쉬움·안타까움 등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구체적으로 나눠 조금씩 실현하며 좀 더 긴 미래의 목표에 한 발씩 다가가 보는 것을 제안하고 싶어요.
MZ세대(밀레니얼+Z세대) 한국의 젊은이들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매우 급속한 성과 내기, 비교 (당)하기 등에 노출돼 일찍부터 번아웃을 경험하고 자신만의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깊게 탐구해 보지 못한 채 긴 호흡의 회사 혹은 직업 생활에 돌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시기에서도 학업 성적과 스펙을 키우던 속도처럼 살기는 어렵고 좀 더 길고 복잡한 노력과 조율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희윤 님, 우리 직접 만나 얘기할 확률이 높지 않을 것 같지만 어떤 치료자나 멘토, 상담자 등을 만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일은 희윤 님이 바라는 세상·삶·직장·윤리 등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희윤 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희윤 님이 ‘원하는 (직업적) 이상’의 모습은 무엇들로 구성돼 있는지, 어떤 순간들을 맞닥뜨렸을 때 희윤 님은 삶의 희열을 느끼는지, 자신의 삶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선물의 순간(세렌디피티)은 무엇인지 매우 궁금해졌습니다. 이것들을 타인이 이해하기 쉬울 정도의 구체성으로 묘사하고 풀어 갔으면 합니다. 그 안에 희윤 님의 세계관이 있고 자신의 힘으로 다가가고 이뤄 낼 세계가 있습니다.
저는 희윤 님의 삶이 분명히 독특한 색깔을 갖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세상에 나가 자기 색깔과 맞지 않는 부분을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자기 색깔을 먼저 밝혀 관찰하고 이 색깔을 가깝게 여기고 받아 주는 모임과 동네를 찾아가는 시도 또한 해 보길 응원합니다.
※한경비즈니스는 ‘안주연의 다시, 연결’을 연재하며 독자에게 상담 편지를 받고자 합니다. 마음 상담을 주제로 다양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직접 답하겠습니다. poof34@hankyung.com으로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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