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어려운 경영 환경에 임원 수 줄여
2022년 임원 인사의 5가지 트렌드
기업들의 실적이 곤두박질하고 어두운 경기 전망 속에서 임원 인사에 칼바람이 불어닥치며 임원 승진 규모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한국의 100대 기업 임원 수는 7100명대에서 2023년 6800~6900명 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전체 임원 승진자 감소 추세에도 불구하고 젊은 리더와 여성 인재 발탁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30~40대 임원과 여성 임원은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5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2022년 달라진 임원 인사 트렌드를 살펴봤다.
① 부회장 승진자 감소
올해 대기업 사장단 인사의 특징은 부회장 승진자 감소다. 주요 그룹의 부회장단은 총수를 보좌하는 가신(家臣) 역할을 해 왔지만 세대교체와 맞물리면서 올해 주요 그룹에서 부회장 승진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기업들은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인사 기조로 전반적으로 변화보다 안정에 무게를 뒀다. 삼성·SK·현대차·LG 등 4대 그룹에선 핵심 경영진인 부회장들이 대부분 유임됐다.
오너 일가 중에선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회장, 성기학 영원무역·영원아웃도어 회장의 차녀인 성래은 영원그룹 부회장이 타이틀을 달았다.
전문 경영인 중에선 최성안 삼성엔지니어링 사장이 삼성중공업 부회장으로, 이명우 동원산업 사장이 동원산업 사업지주부문 부회장으로, 명노현 (주)LS 사장·도석구 LS MnM 사장이 각각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② 파격에서 대세로…‘3040 젊은 피’ 돌풍
연공서열에서 벗어나 능력과 성과 중심 인사 기조를 이어 가면서 30~40대 젊은 임원을 발탁한 기업들이 늘어났다. 50대 전유물이었던 임원 자리에 40대 부사장, 30대 상무가 대거 등용되며 젊은 리더 발탁이 큰 흐름이 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2년 부사장 59명, 상무 107명, 펠로우 2명, 마스터 19명 등 총 187명을 승진시켰는데 직급과 연차를 깨고 젊은 리더와 기술 분야 인재를 적극 발탁했다. 40대 부사장, 30대 상무를 대거 등용하면서 임원진의 평균 연령도 낮아졌다.
올해 45세인 DS부문 S·LSI사업부 모뎀개발팀장 이정원 부사장은 최연소 부사장 승진자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올해 37세인 DX부문 생산기술연구소 H·W기술그룹 배범희 상무는 최연소 상무 승진자가 됐다.
안희영 DX부문 VD사업부 서비스PM그룹장(상무), 저메인 클라우제 DX부문 VD사업부 SEAVO 상무를 비롯해 총 11명의 여성·외국인 승진자도 나왔다. ‘성별과 국적을 불문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인재 경영 철학이 반영된 인사라는 평가다. ③ 돈줄 마른 불황기…투자자 끌어 온 CFO 약진
재계 전반에 성과주의에 기반한 인사가 이뤄진 가운데 유동성 위기 등의 리스크에 대비할 그룹 내 ‘재무통’이 약진했다.
글로벌 금융 시장 경색으로 미래 사업 투자에 필요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적시에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최고재무책임자(CFO)의 역량이 중요해지는 추세를 감안한 것이다. 이번 연말 인사에서 사장직에 오른 이규복 현대글로비스 신임 대표, 차동석 LG화학 사장, 이성형 SK(주) 사장, 이태형 (주)GS 사장이 대표적인 CFO 출신 CEO다.
④ 80년대생 CEO 시대…오너 3~4세 전진 배치
경영 수업을 받던 1980년대생 오너 경영인들의 전진 배치도 눈길을 끈다. 한화그룹의 3세 경영인인 김동선 한화솔루션 갤러리아부문 전략본부장 겸 한화호텔앤드리조트 미래전략실장 전무는 상무 발령 1년 5개월 만에 승진했다. 기존에 해온 신규 사업 발굴 업무에 더해 갤러리아 경영 전반에까지 관여하면서 유통 부문 승계를 위한 보폭을 확대했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의 장남 이규호 코오롱모빌리티그룹 신임 사장과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장남 이선호 CJ제일제당 식품성장추진실장은 미래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중책을 맡았다.
구본준 LX홀딩스 회장의 장남인 구형모 LX홀딩스 전무는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LX그룹 내 경영개발원 역할을 할 신설 회사인 LX MDI 대표에 부임해 경영 전면에 나섰다. SK네트웍스는 최신원 전 회장의 장남인 최성환 사업총괄이 사업총괄 사장으로 승진했다.
젊은 오너가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핵심 경영진의 연령도 낮아지는 추세다. 성과 중심 기조와 직급 체계 간소화로 C레벨 승진 속도가 빨라졌다. 삼성전자는 60세가 되면 퇴임하는 ‘60세 룰’이 인사 관행이었지만 1968년생으로 올해 55세인 이재용 회장이 취임하면서 임원 세대교체도 빨라지고 있다.
올해 신규 임원의 평균 연령은 46.9세이고 이 회장보다 나이가 많은 부사장 승진자는 8명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LG전자·SK텔레콤·SK하이닉스·한화솔루션·CJ제일제당 등에서도 1980년대생 임원이 발탁됐다. ⑤ 유리 천장은 옛말…거세진 여풍
삼성·LG에서 비(非)오너가 첫 여성 사장이 탄생하는 등 주요 그룹에서 여성 고위 임원의 CEO 승진이 두드러져 거세진 여풍(女風)을 실감할 수 있었다.
4대 그룹에서 여성 CEO의 신호탄을 쏜 것은 LG그룹이었다. ‘18년 최장수 CEO’였던 차석용 부회장의 후임으로 이정애 사장을 LG생활건강 신임 사장에 발탁했고 광고 제작사 지투알 대표에 박애리 부사장을 선임했다.
이어 삼성에선 이영희 삼성전자 DX부문 글로벌마케팅센터장이 글로벌마케팅실장 사장으로 승진하며 이재용 회장 취임 후 첫 여성 사장으로 주목받았다. 안정은 11번가 대표, 이선정 CJ올리브영 대표, 최숙아 LS EV 코리아 대표, 박명신 글래드호텔앤리조트 대표도 재계 여풍의 주인공들이다. 여성 CEO의 부상은 다양성을 중시하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기조와 관련이 있다.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지난 8월부터 자산 총액 2조원 이상 상장 기업은 이사회를 특정 성(性)으로만 구성할 수 없고 2025년 ESG 공시 의무화로 여성 임원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의 ESG 평가에서 성평등 점수가 주요 투자 지표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면서 100대 기업의 전체 임원 수 감소에도 불구하고 여성 임원 숫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2004년만 해도 13명에 불과했던 여성 임원 수는 2013년 100명을 넘어선 이후 2022년 처음으로 400명대로 올라섰다. 2022년 상반기 기준 여성 임원이 가장 많은 기업은 삼성전자(65명), CJ제일제당(30명), 네이버(23명), 현대차(18명) 순이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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