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국내 1위입니다. 백색 가전 1위를 놓친 적은 없습니다.”(아들)
“국내? 1위? 국내 1위? 니 어디 전국체전 나가나?”(아버지)
시청률 1위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재벌 회장이 아들을 꾸짖으며 한 말입니다. 실제 현실에서도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 둘 다 비슷한 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결과 삼성이 어떻게 됐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생각해 보면 축복 받은 나라는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박해를 피해 영국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미국 선조들이 도착한 땅은 한 대륙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유럽에도 복 많은 나라들이 있습니다. 스페인·그리스·이탈리아·프랑스 등은 한 해가 시작되는 1월 1일을 수백억 달러의 경상 수지 흑자로 출발합니다. 지중해를 끼고 있는 빼어난 자연환경, 수많은 문화유산 등으로 매년 여행 수지 흑자가 수백억 달러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나라가 경상 수지 적자를 낸다는 것은 흑자를 모조리 까먹으면서 한 해를 보냈다는 말입니다. 고등어 강국 노르웨이는 그냥저냥 살고 있었는데 1970년 북해 유전 발견으로 나라와 후손들이 팔자를 고쳤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교과서에서 나온 대로입니다. 자원은 없고, 자연환경은 내세울 정도는 아니고, 유적도 유럽에 비하면 남은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 나라가 북쪽으로 가는 길은 막혀 있고 미사일은 시시때때로 인근 영공을 날아다닙니다. 깊은 한숨이 나오는지요.
그래서 원자재는 대부분 수입해야 하고 여행 수지는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거의 매해 적자입니다. 이렇게 발생하는 어마어마한 적자를 채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새해 첫날부터 양말이건 속옷이건 자동차건 반도체건 팔 수 있는 것은 다 만들어 내다 팔아야 하는 게 한국의 운명입니다. 수출은 숙명이기 때문에 전국체전(국내 시장)이 아니라 올림픽(세계 시장)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깨달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수출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풍요로운 것은 사람밖에 없었던 한국. 처음부터 온갖 것들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수출 한국’의 시작이었습니다. 때마침 태어나 일터로 나온 1차 베이비부머들은 1970~1980년대 ‘수출 역군’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슬픈 역사는 생략합니다.
철광석 등 광물과 오징어·생선 등이 1960년 주요 수출 품목이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수출 품목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은 가발입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생계를 위해 애써 가꾼 머리카락을 눈물 흘리며 잘라 팔았습니다. 그들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은 세계 시장을 주름잡았습니다. 1970년 수출 품목 3위에 올랐습니다. 이 밖에 얼마 전 프랑스 생태계를 교란한다고 해서 화제가 된 ‘K-다람쥐’와 소변(약의 재료)·쥐가죽·은행잎 등도 화제가 된 수출 품목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수출은 1977년 처음으로 100억 달러를 돌파합니다. 1차 석유 파동을 이겨낸 성과였습니다. 이후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따라 수출의 중심은 섬유·기계 등 노동 집약적 상품에서 자동차·석유화학·반도체 등 자본과 기술 집약적 상품으로 옮겨 갑니다. 최근에는 바이오와 전기차 배터리 그리고 K팝과 드라마 등 콘텐츠까지 수출 품목에 이름을 올려놓게 됩니다. 그 결과 한국은 올해 세계 6위의 무역 대국에 올라설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한국 경제를 위기에서 구한 마법의 단어 ‘수출’을 살펴봤습니다. 수출은 한국 사회를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 줬습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 1990년대 후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2008년 금융 위기, 2020년 코로나19 위기 등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수출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수출의 마법이 풀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수출은 두 달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무역 수지도 8개월 연속 적자의 수렁에 빠졌습니다. 외환 위기 때나 볼 수 있었던 통계입니다. 그동안 가장 중요한 수출 무대였던 중국과의 교역에서 적자가 커지는 것은 더 불안한 일입니다.
이탈리아 정치 이론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옛것은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은 나타나지 않는 게 위기”라고 했습니다. 한국을 구한 수출의 마법이 풀리지 않도록 하는 새로운 대책이 필요한 시간이 왔습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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