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창록 율촌 명예회장
매일 사원증 목에 걸고 출근…대표부터 파트너 변호사까지 사무실 크기 같아
우창록 율촌 명예회장이 1992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나와 차린 우창록 법률사무소가 시작이었다.
“이제 나를 삼류로 보겠구나.” 그가 ‘김앤장 변호사’라는 딱지를 떼고 처음 했던 생각이다. “김앤장에 다닐 때는 모두가 나를 일류로 봤어요. 실력을 입증할 필요도 없었죠. 독립 후에는 아내에게 ‘6개월 치 월급은 못 가져다줄 것 같다’고 말했어요.”
서울대 법대 졸업장도 변호사 시장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삼류면 어때 내 실력대로 하자.” 이미 조세법 전문가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던 우 변호사는 홀로서기에 나섰다. 그러자 후배들이 합류했다. 6명의 변호사가 모여 1994년 율촌 합동법률사무소로 다시 출발했다. 규모를 키울 생각이 없었지만 스무 명의 변호사가 모였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조직을 느슨하게 관리하는 데 한계가 왔다. 우 회장은 결단을 내렸다. 같이 동업할 생각이 있다는 변호사들만 데리고 나가 1997년 법무법인 율촌을 차린다.
율촌 출범은 1997년 외환 위기 직전이었다. 외환 위기가 터진 후 생존이 목표였는데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조세, 공정 거래, 부실자산 처리, 기업 인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요가 급증했고 신생 법인이었던 율촌도 일거리가 생겼다.
IMF때 골드만삭스에서 온 전화한통으로 퀀텀점프 율촌이 퀀텀 점프하게 된 계기는 골드만삭스에서 온 전화 한 통이었다. 우 회장은 1997년 골드만삭스에서 일을 하나 맡아 줄 수 있느냐는 연락을 받는다. “할 수 있다”고 답하자 호텔로 불려가 시험을 봤다. 시험에 통과한 우 회장에게 골드만삭스가 맡긴 일은 부실 채권 인수였다.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사건을 안 주면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잖아요. 골드만삭스의 인수·합병(M&A) 기업 실사를 맡았더니 모간스탠리·JP모간·리먼브라더스 등 글로벌 투자은행(IB)들도 일을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6명으로 시작한 율촌은 2022년 임직원 1000명을 넘어섰다. 우 회장이 꼽은 율촌의 가장 큰 힘은 ‘협력’이다. “처음 율촌을 출범할 때부터 네 일, 내 일 가리지 말자는 게 신조였어요. 내가 수임한 일도 제일 잘하는 사람에게 주자던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 회장과 윤세리 고문이 수임한 일도 모두 각 분야 전문 변호사에게 할당했다. ‘신명나게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그 어떤 로펌보다 협업만큼은 자신 있다는 우 회장은 합리적이고 솔선수범하는 리더다. 2019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사원증을 목에 걸고 매일 출근한다. 구성원 간 소통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사무실 구조 설계에도 직접 관여했다.
우 회장은 모든 변호사의 사무실 면적이 같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직급별 사무실에 차등을 두면 쓸데없는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 결과 모든 변호사 사무실은 면적이 똑같다. 대표변호사도 예외는 아니다. 창문이 없는 내측 사무실만 개방감을 고려해 1.7㎡(0.5평) 정도 더 넓다. 회사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39층은 직원들의 라운지로 꾸미고 카페를 만들었다. ‘가장 좋은 공간은 구성원 모두가 공유해야 된다’는 그의 철학이 반영됐다.
인터뷰 막바지에 우 회장은 고 이범렬 변호사의 말을 빌려 후배들에게 조언을 전했다.
“이범렬 선배가 한 월간지에 ‘삼류 소설을 200~300권 읽지 않은 사람은 형사 변론을 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기고한 글이 있어요. 한국에서 형사 사건으로 만나는 사실 관계는 고상한 문학에서 보는 일들이 아니고 삼류 소설에서나 소재로 다뤄질 일들이라는 메타포죠.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으면 변론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다는 말이에요. 그게 기업 변호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변호사라면 ‘병원 인수 계약에 합의했다’는 한 문장을 보고 얼마나 많은 개별적인 계약 관계가 얽혀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