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철’로 이병철·정주영 배우는 MZ세대
‘호암자전’ 역주행·틱톡에선 어록도 화제
출간된 지 8년이 지난 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일대기가 담긴 ‘호암자전’이 2022년 12월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역주행 베스트셀러로 부상했다. ‘호암자전’은 교보문고의 2022년 12월 셋째 주 경제·경영 분야 판매 순위 18위로 올라섰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효과다.
드라마의 흥행은 재벌가에 대한 젊은층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즐겨 사용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인 유튜브·틱톡·인스타그램에서는 이병철 창업자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와 관련된 일화나 어록을 소개하는 콘텐츠가 부쩍 늘었다.
‘재벌집 막내아들’은 13년간 재벌가의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대기업 직원(윤현우)이 자신을 죽인 집안의 막내 손자(진도준)로 환생해 복수하고 재벌가의 모든 것을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린 판타지 드라마다. 산경 작가의 동명 웹소설이 원작이다.
판타지물이지만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닷컴 버블, 카드대란 등 1980∼1990년대 실제 역사적 사건들을 엮었고 캐릭터 모티브를 대기업 오너 일가에서 따왔다는 점에서 실존 인물·실제 사건을 떠올리게 해 현실감과 몰입감을 배가했다는 평가다. 드라마 설정과 실제 모티브가 된 사건을 비교해 봤다. 반도체 키운 진양철, 순양=삼성?
극중 순양그룹은 현실 속 삼성과 닮은 부분이 많다. 진 회장은 이병철 창업자처럼 정미소로 처음 사업을 시작했고 주변의 극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도체는 순양의 미래 먹거리”라며 반도체와 전자 사업에 대한 투자를 뚝심으로 밀어붙여 그룹의 핵심으로 키웠다.
진 회장이 ‘자동차 마니아’로 묘사되며 자동차 사업에 혜안을 보이고 도전한 것은 그의 아들 이건희 전 회장을 연상시킨다.
“초밥 한 점에 밥알이 몇 개고? 320개다”라며 자문자답하는 진 회장의 대사는 이병철 창업자가 신라호텔 조리부장에게 실제 건넸던 말로 유명한 일화에서 따왔다.
그는 신라호텔 조리부장에서 초밥 한 점에 들어가는 밥알 개수를 물어보며 “낮에는 밥으로 먹기 때문에 초밥 한 점에 320알이 있다. 저녁에는 술안주로 먹기 좋게 280알 정도가 있어야 정석이다”라고 말했다. 이병철 창업자의 치밀하고 꼼꼼하면서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진 회장이 사는 집 ‘정심재’는 삼성의 영빈관인 서울 한남동 ‘승지원’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심재의 실제 촬영지는 부산 남천동 금련산 자락에 있는 옛 부산시장 관사다. 1980년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고 김중업 건축가가 지은 대통령 별장이다.
이병철 창업자의 거처였던 승지원에는 한옥 건물(본관)과 양옥 건물이 있는데 한옥 건물은 궁궐 건축의 대가인 신응수 대목장이 지었다. 승지원은 1987년 이건희 전 회장이 물려받아 집무실 겸 영빈관으로 사용됐다.
2019년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5대 그룹 총수 회동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등 세계적인 정·재계 인사들과의 만남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순양의 아진차 인수, 기아차 인수전 떠올라
현대그룹을 모티브로 삼은 가상의 기업도 등장한다. 극중 순양그룹과 경쟁 관계에 있는 대영그룹 얘기다. 중공업과 조선업까지 갖춘 자동차 1위 기업으로 나온 대영그룹은 현대그룹과 오버랩된다. 6·25전쟁 당시 월남한 실향민으로 대영그룹을 맨손으로 일군 주영일 회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모습과 닮았다.
극중 IMF 외환 위기로 부도 위기에 직면한 아진자동차 인수전에 순양그룹과 대영그룹이 뛰어든 장면은 1998년 현대차의 기아차 인수 스토리를 연상하게 한다. 1998년 기아차의 부도로 채권단이 국제 입찰 방식으로 기아차 매각에 나서자 현대차·대우차·삼성차·포드가 입찰전에 뛰어들었다.
드라마에선 순양그룹이 아진자동차를 품었지만 실제 기아차를 인수한 곳은 삼성이 아닌 현대차다. 현대차는 기아차 인수 성공으로 글로벌 종합 자동차 그룹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고 삼성은 자동차 사업을 정리하게 됐다.
1998년 김대중 정부는 현대·삼성·대우·LG·SK 등 5대 그룹의 사업을 교환하는 빅딜(사업 구조 조정)을 강요했는데 이들 그룹이 경쟁적으로 벌여 놓았던 반도체·발전설비·석유화학·항공기·철도차량·선박엔진·정유 등 7개 업종을 상호 통합해 재벌들의 과잉·중복 투자를 해소하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정부가 주도한 강제적인 구조 조정은 경제사에 큰 후유증을 남겼다. 부실 기업 쌍용차를 인수했던 대우그룹은 삼성차와 대우전자를 맞교환하는 빅딜에도 실패하면서 유동성 위기에 빠져 쌍용차 인수 1년 만에 그룹 해체를 맞게 됐다.
빅딜로 LG그룹도 시련을 맞았다. 반도체 부문 단일화를 위해 LG그룹은 당시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점유율 4위였던 LG반도체를 5위 현대전자에 2조6000억원에 넘겼다. LG반도체를 인수한 현대전자는 이후 유동성 위기에 빠졌고 결국 현대그룹에서 분리됐다. 하이닉스반도체로 사명을 바꾼 뒤 돌고 돌아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국면에서 결국 SK그룹에 인수돼 SK하이닉스가 된다. 삼성에 흑역사 안긴 새롬기술 재조명
극중 한도제철은 1997년 IMF 외환 위기 시작점으로 지목되는 한보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1997년 1월 한보철강의 부도가 진로·기아자동차·쌍방울·해태그룹의 부도로 이어지면서 그해 11월 IMF 외환 위기가 터졌다. 순양그룹이 한도제철을 인수한 대목은 현대그룹의 현대제철 인수 스토리가 연상된다.
진 회장의 외동딸인 진화영에게 복수하기 위해 진도준이 활용한 ‘뉴데이터 테크놀로지’ 주식 폭락 사건도 실제 모티브가 된 사건이 있었다. 닷컴 버블을 타고 등장해 한국 주식 시장 역사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급추락한 새롬기술이다.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었다. 1993년 설립된 새롬기술은 국제전화를 무료로 쓸 수 있다는 ‘다이얼 패드’를 앞세워 1999년 8월 상장 6개월 만에 1890원이었던 주식이 28만2000원까지 약 150배 급등하며 코스닥 황제주로 주목받았다.
2000년 2월 시가 총액이 3조원까지 불어나며 현대차마저 눌렀다. 초기 투자자들은 큰돈을 벌었지만 이들을 보고 한 발 늦게 뛰어든 개미 투자자들은 큰 손해를 봤다. 배우 박중훈 씨가 1997년 지인의 소개로 새롬기술에 2억5000만원을 투자해 큰 수익을 거둔 일화가 유명하다.
새롬기술은 삼성이 물린 주식으로도 불린다. 삼성이 벤처 투자에 관심을 보이던 시기인 1999년 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중공업 등이 880억원을 투자해 새롬기술 주식 80만 주를 주당 11만원에 취득했지만 이후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폭락했다.
새롬기술 전·현직 경영진의 분식 회계 논란과 법적 분쟁이 이어지면서 주가가 5000원대로 추락했다. 삼성은 새롬기술의 주식을 전량 매각했지만 500억원 이상의 손실을 보게 됐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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