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크리에이터가 만든 복합 문화 공간…MZ세대의 보물섬 되다

부산 영도에는 ‘영도 사람이 영도를 떠나면 영도할매의 미움을 산다’는 말이 전해진다. 평소 주민들을 지키는 데 지극정성인 영도할매가 영도를 떠나는 이에겐 심술을 부린다는 설화다. 행정구역상 부산이지만 섬이라는 폐쇄성을 가진 영도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대목이다.
복합문화공간 '무명일기' 전경
복합문화공간 '무명일기' 전경
‘보물섬’ 영도를 아시나요내륙에서 4개의 다리를 각각 건너야만 통할 수 있는 영도에는 한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첫 개항지인 부산항은 항공 운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까지 모든 자원이 드나드는 통로이자 사람이 유일하게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길목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군화에 짓밟힌 아픔을 간직한 땅이고 6·25전쟁 당시 피란민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돼 준 곳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수산업이 쇠락하며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는 빈집과 낡은 컨테이너만이 남았다. 이런 영도가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위한 ‘보물섬’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은 5년여 전쯤의 일이다. 부산항에 늘어선 빛바랜 폐공장은 독특한 콘셉트와 커피 맛을 갖춘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신했다. 해안가 절벽을 따라 공·폐가가 가득하던 흰 여울길에는 저마다의 오션 뷰를 자랑하는 카페가 들어섰다. 이들의 공통점은 부산의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맛과 풍경,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데 있다.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무명일기 2층 창가 좌석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무명일기 2층 창가 좌석
영도가 보물섬이 되기까지는 ‘로컬 크리에이터(local creator)’의 역할이 컸다. 도시 재생 사업은 예산을 들여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재건축·재개발을 통해 새로운 시설을 만든다. 하지만 관광객 수가 예상을 밑돌거나 거주민이 반발하는 등 리스크로 인해 기대만큼의 성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로컬 크리에이터는 다르다. 지역 고유의 특성에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더해 쇠락한 지역 공간을 힙하고 젊은 이미지로 바꾸는 데 주력한다. 이들에게 도시 재생은 딱딱한 사업이 아니라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을 투영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시장의 반응 역시 확실하다. 대량 생산된 공산품보다 ‘마이크로 트렌드(micro-trend)’에 열광하는 MZ세대는 맞춤형 취향,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에 열광한다. 로컬 크리에이터가 만들어 낸 고유의 지역성·문화성은 극세분화된 타깃에 적중했고 이들은 지역 사회의 새로운 동력이자 도시 재생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벽 한쪽을 장식한 대형 스크린이 독특한 분위기를 더한다
벽 한쪽을 장식한 대형 스크린이 독특한 분위기를 더한다
‘영도소반’ 한 상에 담아낸 영도 이야기복합 문화 공간 ‘무명일기(無名日記)’를 운영하는 김미연 대표와 오재민 키친파이브 대표도 이런 점에 주목했다. 섬이라는 특수성과 근대 산업이 남긴 스토리를 어떻게 하면 영도의 정체성과 연결지을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한식 브런치 메뉴 ‘영도소반’을 개발했다. 정겨운 무명 보자기를 풀면 소쿠리 안에 오밀조밀 담긴 로컬 푸드가 모습을 보인다. 메뉴에 쓰인 대부분의 식재료는 영도에서 나고 자랐다. 해녀 카르파초에는 제주도 해녀들이 영도에 정착하게 된 사연을 담았다. 일제강점기 해녀들이 육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부산 영도를 거점으로 삼았고 광복 이후까지 이어져 정착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영도 앞바다에서는 정겨운 제주 사투리를 쓰는 해녀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먹을 게 부족했던 시절 영도민들의 주 식량이 돼 준 조래기 고구마로 만든 메뉴도 있다. 한국 최초의 고구마 재배지인 영도 조래기 마을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도의 이야기를 한 상에 담아낸 대표 메뉴 '영도소반'
영도의 이야기를 한 상에 담아낸 대표 메뉴 '영도소반'
독특한 식문화뿐만 아니라 공간 자체에도 힘을 썼다. 1959년 부두 창고로 만들어져 부산의 흥망성쇠를 지켜봤지만 폐공장으로 오랫동안 방치돼 사람들의 외면을 받은 공간이었다. 오 대표는 높은 천장고와 레트로한 느낌을 살려 각종 공연·세미나가 개최되는 곳이자 누구나 머무를 수 있는 안락한 공간으로 무명일기를 개조했다. 공간 한쪽에 크게 설치된 스크린은 그날 진행되는 행사와 분위기에 맞춰 다른 그림을 연출해 낸다.

“‘정해지지 않은 일상의 기록’이라는 이름에 담긴 것처럼 머무르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장소로 기억됐으면 해요.” 오 대표의 바람대로 무명일기는 음식과 디자인, 문화가 있는 복합 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작은 세미나·간담회부터 정부 주최 토론회까지 치러낸 데 이어 2022 우수 관광 벤처 시상식에서 예비 관광 벤처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무명일기
부산 영도구 봉래나루로 178

박소윤 한경무크팀 기자 sos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