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음악, 책 그리고 내면의 영감과 마주하는 곳…이태원 그래픽

책의 단면처럼 종이의 결을 표현했다는 '그래픽'의 외관.
책의 단면처럼 종이의 결을 표현했다는 '그래픽'의 외관.
누구나 학창 시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만화책에 빠졌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대여점에서 빌려 읽어 반납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더라도 학업 스트레스로 지친 고등학생에게 만화책은 너무나도 즐거운 오락거리였다. 비단 학생들만 만화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다 자란 어른들에게는 아직도 만화가 필요하다. 지난 1월 4일 개봉된 일본 만화 ‘슬램덩크’의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 첫 주 만에 42만 관객을 모으고 함께 출간된 특별판 ‘슬램덩크 챔프’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화제를 모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요즘의 만화책은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특히 ‘그래픽 노블’은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으로 일반 만화보다 더 철학적이고 진지한 주제를 다룬다. 이런 어른들의 만화책을 읽을 수 있는 ‘이태원 그래픽’은 그래픽 노블뿐만 아니라 일반 만화책·아트북·잡지 등 다양한 서적을 판매·소개한다. 절판된 도서는 물론 고가의 서적 등도 감상할 수 있어 책 좀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 명소로 소문난 지 오래다.
천장의 창을 만들어  따뜻한 자연채광이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했다.
천장의 창을 만들어 따뜻한 자연채광이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했다.
▶어른들의 만화책방

“이 동네는 눈 쌓이면 오지도 못해요.” 택시 운전사의 설명을 들으며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아슬아슬한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굽이굽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 목적지에 다다르니 미색의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책의 단면처럼 보이기 위해 세라믹으로 종이의 결을 표현했다는 건물의 외관은 마치 아트센터를 방불케 한다. 이곳에 가는 것만큼이나 입구를 찾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외부에 간판도 없고 입구도 주차장을 돌아 주택가 쪽으로 살짝 비탈진 길을 올라가야 나온다. 알고 보니 이러한 불편함은 폐쇄적인 공간을 만들기 위한 건축가의 숨은 의도라고 한다. 검은 사각형의 표지가 보이면 입구를 잘 찾았다는 의미다. 검정 철제문을 힘줘 열고 들어서 몇 걸음 내디디면 사진 찍을 새도 없이 입구로 향하는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마치 게임에서나 보던 던전에 입장하는 듯하다.

포털 사이트에 이태원 그래픽을 검색하면 어떤 블로거는 서점이라고 소개하고 누군가는 고급 만화 책방이라고 표현한다. 또 다른 이는 북카페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곳은 이처럼 한 가지의 명사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다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곳의 건축가가 ‘술 마시는 만화방’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곳은 19세 미만 출입 금지다. 맥주·위스키·샴페인 등의 주류를 판매하고 성인 콘텐츠들을 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오롯이 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랩톱도 들고 올 수 없다.
곳곳에 서적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곳곳에 서적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하루 종일 머무르고 싶은 공간

이곳은 20여 개의 테마로 분류된 2000여 권의 책들로 가득하다. 천천히 살펴보고 있으니 하루 종일 머무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입장료를 내면 오픈 시간인 오후 1시부터 11시까지 이용 시간 제한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캡슐 커피·녹차·콜라·핫초코·밀크티 등의 음료를 무료로 마실 수 있고 맥주·샴페인·위스키 등의 주류는 추가 금액을 내고 주문할 수 있다.

1층부터 3층까지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 이곳은 각 층마다 다양한 형태의 좌석과 다른 주제의 책들로 큐레이션돼 있다.

1층에는 미술·건축·디자인, 마블&DC코믹스, SF, 영화·애니메이션·드라마 장르 서적과 판매용 도서를 소개하는 공간과 흡연 구역(테라스)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좁고 긴 곡선으로 된 통로가 나오는데, 이 통로의 벽면은 그래픽이 매월 자체적으로 선정해 인스타그램에 소개하는 도서들과 일상·힐링·성장, 모험·시대극·무협 등의 장르 서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중앙에는 판형이 큰 도서를 열람해 볼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안쪽에 들어가면 누울 수도 있을 정도로 편한 좌석이 마련돼 있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3층에는 위스키·맥주·샴페인 등이 열 맞춰 서 있는 냉장고와 주류를 마시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바(Bar), 음악이 흘러나오는 커다란 JBL 스피커와 포토그래피·패션·음악 관련 서적이 함께 진열된 벽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더 안쪽에 들어가면 음료 라운지가 나타난다. 각 층마다 콘셉트와 분위기는 다르지만 저마다 편한 장소를 고른 방문객들이 자유로운 모습으로 이 공간을 향유하고 있는 풍경은 동일하다.

이곳의 공간 기획에 참여한 그래픽 김수경 매니저는 “만화책과 음악 그리고 술을 즐기는 분들이 ‘그래픽’에 들어왔을 때 하루 종일 머무르고 싶은 공간이라고 느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독서하기에 편한 분위기와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며 “공항 라운지처럼 이용할 수 있게 많은 것들을 셀프 서비스로 제공하고 외부 환경에서 내부 공간을 차단함과 동시에 천창으로 따뜻한 자연 채광이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했어요. 층마다 비치돼 있는 책들은 다양한 카테고리로 분류돼 있고 ‘그래픽’의 모든 책을 마지 탐험하듯 거닐 수 있는 동선을 배치해 자신만의 책을 찾는 재미를 더했다”고 이곳을 소개했다.
2층에는 한국사/근현대사, 사회/철학, 아웃도어/스포츠 등의 장르서적이 비치되어 있다.
2층에는 한국사/근현대사, 사회/철학, 아웃도어/스포츠 등의 장르서적이 비치되어 있다.
▶ 친절함으로 완성한 세련됨

‘서투르거나 어색한 데가 없이 능숙하게 잘 다듬어져 있다’는 ‘세련되다’의 사전적 의미다. 그래픽은 입구부터 화장실까지 모든 곳이 세련됨으로 점철돼 있는 공간이다.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메모에서 능숙하게 잘 다듬어진 모양새를 위해 부단히도 노력한 티가 난다. 소위 말해 요즘 뜬다는 공간을 방문하면 ‘세련됨으로 가장한 불친절함’을 느끼는 곳이 많다. 과도하게 생략한 설명이나 지나치게 간소화한 안내는 모두가 편의를 누리기 어렵게 만들고 공간에 대한 물음표를 띄우게 한다.

하지만 이곳은 이런 물음표를 느낌표로 만들어 주는 안내가 곳곳에 붙어 있다. 다 본 책을 올려 놓는 곳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북카트와 발 받침대 겸 짐을 놓을 수 있는 박스이니 편히 쓰라는 메모, 다 마신 음료를 수거해 가는 쟁반이라는 안내, 화장실 거울 앞 컵에 붙은 구강 청결제라는 것을 알려주는 메모까지…. 이곳의 세련됨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직접 이곳을 이용해 보며 방문객의 관점에서 궁금하고 불편할 수 있는 부분들을 하나하나 보완해 갔다는 것이 느껴진다.

실제로 화장실에 붙은 QR코드를 통해 이용객들에게 불편했던 점과 좋았던 점 등의 피드백을 묻는 설문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지난해 3월 문을 열어 오픈한 지 거의 1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이곳을 조성한 이들의 노력은 현재 진행형이다. 혹시 이곳의 책의 종류가 너무 다양해 무엇을 읽어야 할지 헤맬 것 같다면 그래픽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먼저 둘러보고 가면 좋다. 그래픽이 보유한 다양한 책을 짤막한 카드뉴스 형태로 소개하고 있어 방문객들이 독서 목록을 정리할 수 있게 도와준다.

입장료는 1만5000원이다. 사람에 따라 비싸다고 느낄 수도, 거저라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을 소장할 수 있는 돈으로 무궁무진한 영감과 취향을 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남는 장사가 아닐까 싶다.

그래픽
주소 서울시 용산구 회나무로39길 33
운영 시간 오후 1~11시(매주 월요일 휴무)

강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