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트렁크로 차박인 유혹…이동수단에서 여유 즐기는 공간으로 변신
[비즈니스 포커스] ‘700만 명.’ 2022년 한국의 캠핑 인구수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200만 명 정도 늘었다. 캠핑 문화가 확산되면서 낚시인과 등산객 등이 쪽잠을 자던 차박(차 안에서 잠을 자는 캠핑)은 옛말이 됐다. 오히려 일반 오토캠핑(텐트를 차에 싣고 이동해 즐기는 야영)을 건너뛰고 바로 차박을 시작하는 2030세대가 늘었다. 이들은 아예 캠핑카를 구입하거나 레이 등 경차도 내부를 침대처럼 평평하게 해 잠을 잔다. 차 안에 매트 등을 깔고 약간의 개조로 운전석 등받이는 뒤로 눕히는 식이다.캠핑‧차박 열풍에 레저용 차량(RV) 시장도 커지고 있다. 각종 짐과 스포츠 장비를 싣고 나가기엔 RV만한 차가 없기 때문이다. RV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비롯해 픽업트럭과 미니 밴 등을 통틀어 부르는 개념이다.
완성차업계 관계자는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에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며 “RV는 넓은 공간으로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기에 실용적이다. 또 세단에 비해 SUV 등이 수익성이 좋다”고 말했다.
◆전기차도 RV에 힘주는 현대차·기아
RV 인기에 힘입어 완성차 업체 간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완성차 업체는 캠핑카 모델을 내놓는가 하면 차박 용도로 많이 사용되는 SUV 모델은 소형부터 대형까지 다양한 크기를 선보이고 있다.
특히 2022년 기아의 RV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RV 판매량은 29만2000여 대로 2021년 대비 2만8000여 대 증가했다. 그중 많이 팔린 모델은 스포티지다. 기아의 스포티지는 도심형 SUV의 시초로 평가받는 모델이다. 1993년 출시된 이 모델은 박스형에서 벗어나 강하지만 완만한 곡면을 강조하며 인기를 끌었다. 2022년 한 해 스포티지는 글로벌 시장에서 45만2068대가 판매되며 해외 매출의 20%를 차지했다. 한국에서는 5만5394대가 팔렸다.
기아의 전체 모델 중 RV가 차지하는 비율도 2021년 49.4%에서 지난해 54%로 높아졌다. 한국의 전체 산업 수요에서 차지하는 RV 판매 비율이 46.9%인 것을 고려하면 기아의 판매 비율은 업계 평균을 웃도는 셈이다.
2022년 현대자동차도 RV 차량을 총 21만3710대 판매했다. 이는 2021년보다 1.8% 증가한 기록이다. 반면 승용차는 총 18만5553대로 2021년보다 17.1% 덜 팔았다.
현대차와 기아는 SUV 기반의 전기차를 대거 선보일 예정이다. 현대차는 이미 아이오닉5를 출시한 데 이어 2030년까지 총 6종의 전기차 가운데 4종을 SUV로 출시한다. 기아는 2027년까지 총 14종의 전기차 라인업을 구축하는데 이 중 SUV 비율이 절반이다.
◆구동력 높이고 소형 SUV도 차박 가능하게
‘르쌍쉐’로 불리는 르노코리아·쌍용자동차·한국GM의 추격도 거세다.
RV는 빙판길이나 미끄러운 진흙 길, 급경사 등 어떤 도로 조건에서도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사륜구동(4WD) 기술이 중요하다. 4WD는 모든 바퀴로 구동력을 전달하고 상황에 따라 바퀴별 구동력을 조절할 수 있다.
쌍용차는 전통의 4WD 강자다. 픽업트럭인 ‘뉴 렉스턴 스포츠&칸’은 4WD 시스템으로 향상된 구동력을 발휘, 성능을 인정받아 국군 지휘 차량에 뽑히기도 했다. 렉스턴 스포츠&칸은 캠핑족에게도 인기다. 캠핑 시장이 커지며 다양한 장비도 나오고 있는데 많은 짐을 싣기에 픽업트럭 만한 차가 없기 때문이다. 렉스턴 스포츠&칸의 트렁크 용량은 1262리터 수준이고 700kg까지 실을 수 있다.
과거 베스트셀링 모델이었던 무쏘의 유전자(DNA)를 이식한 신차 토레스(7월 출시)도 2022년 불티나게 팔렸다. 출시 반년 만에 판매량 2만2484대를 기록했다. 당초 계획 대비 30% 이상 더 팔았다는 설명이다.
한국GM의 쉐보레는 2019년부터 소형 SUV 트레일블레이저, 준대형 SUV 트래버스, 대형 SUV 타호 등을 차례대로 출시하며 라인업을 갖췄다. 2022년 6월에는 중형 SUV 신형 이쿼녹스을 선보이며 SUV의 풀 라인업을 꾸린 상태다.
특히 트레일블레이저는 2022년 한 해 동안 내수 시장에서 1만4561대, 수출 시장에서 15만5376대 등 총 16만9937대가 판매되면서 쉐보레 브랜드의 베스트셀링 차량에 이름을 올렸다. 이 모델은 소형 SUV임에도 180cm가 넘는 성인 남자가 차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실내 공간을 갖췄다.
한국GM 관계자는 “실내 공간을 최대한 확대해 다목적성과 거주성을 중요시하는 북미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또 기본 모델과 함께 스포츠성을 강조한 RS 모델, 오프로드 성능에 집중한 ACTIV 모델을 판매하며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디자인을 조율한 점이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르노코리아는 SUV LPG 모델 QM6와 XM3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반전을 꾀하고 있다. QM6는 LPG SUV의 선두 주자로 유명하다. 2019년 출시(QM6 LPe) 이후 2022년까지 9만 대가 팔렸다.
2022년 말 한국 시장에 추가된 XM3 E-TECH 하이브리드에는 전기차에 가까운 하이브리드 구동 시스템이 탑재됐다. 이 시스템은 도심 구간에서 전기차 모드 주행(최대 75%)을 제공한다. 배터리 잔여 용량과 운행 속도에 따라 일정 구간 100% 전기차 주행을 할 수도 있다. XM3 E-TECH 하이브리드는 2021년 6월 유럽 시장에서 먼저 출시됐는데 2022년 영국 오토 트레이더의 실구매 소비자 평가 ‘최고의 하이브리드차’ 부문 1위, 프랑스 기자들이 뽑은 ‘최고 권위 상’ 수상 등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승용차 앞지른 RV
RV 시장의 열기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와 업계 등에 따르면 2010년부터 꾸준히 증가하던 RV 비율은 2013년 처음으로 30%를 돌파했고 2015년 40%대를 넘겼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성장은 더 가팔랐다. 해외 여행이 제한되고 가족·연인 등 소규모 단위로 별도 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캠핑과 차박이 인기를 끌면서다. 2021년 RV의 판매량은 처음 승용차 판매량을 앞질렀고 2022년에도 더 많이 팔렸다.
현대차·기아·한국GM·르노코리아자동차·쌍용자동차 등 국내 완성차 5개 사는 2022년 국내외에서 모두 746만5040대를 판매했다. 2021년 대비 현대차는 1.4%, 기아 4.6%, 한국GM 11.7%, 르노코리아 27.8%, 쌍용차 34.9%로 모두 판매량이 증가했다.
내수 시장만 봤을 때 현대차는 1년 전보다 판매량이 5.2% 줄어든 68만8884대를 기록했다. 대부분의 차종이 전년에 비해 부진했다. 기아는 쏘렌토·봉고·카니발이 실적을 견인하며 54만1068대를 팔았다. 2021년 대비 찔끔(1.1%) 늘어난 셈이다.
쌍용차는 6만8666대로 3위를 차지했다. 전년 대비 판매량이 21.8% 늘었다. 2022년 초 출시된 토레스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실적을 견인했다. 최대 판매 모델인 렉스턴 스포츠(2만5905대)도 힘을 보탰다.
4위는 5만261대를 판매한 르노코리아다. 다만 2021년과 비교해 판매량이 13.9% 감소했다. 꼴찌는 한국GM이 기록했다. 2021년 대비 31.4% 축소된 3만7237대를 팔았다. 11개의 차종 중 트레일블레이저만 1만 대를 넘겼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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