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세대를 위한 위기론 강의① 2008 글로벌 금융 위기
[비즈니스 포커스] “건설사·시행사·증권사·은행 고객들이 ‘2008 금융 위기’ 당시에 대한 세미나를 요청해요. 현재 만 39세 이하 직원들은 금융 위기 당시 학생이었거든요. 지금의 대리·과장급 실무진이 그때 그 위기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법무법인의 한 변호사는 최근 고객들로부터 2008 금융 위기에 대한 정보를 요청받는 일이 잦다.10년 차 애널리스트 A 씨도 최근 본부장에게 금융 위기 당시의 진짜 분위기를 묻곤 한다. 1987년생인 그는 한창 대학 축제에 빠져 있을 무렵 미디어에서나 글로벌 금융 위기를 만났다. 책 속에서 금융 위기를 배우고 자료를 통해 관련 수치를 확인했지만 어딘지 부족했다. 미국 중앙은행의 급격한 금리인상을 단 한 차례도 경험한 바 없었다. 체감하는 것과 글자를 통해 배우는 것을 달랐다. 지금의 위기와 비교하려면 보다 생생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2008년 금융 위기 수준의 경제 위기”, “2008년 금융 위기 때보다 심각한 미증유의 위기”라는 세계 석학들의 ‘2023 위기 경고’가 계속되고 있지만 지금의 2030 경제 주체들에게는 낯선 울림에 지나지 않는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수차례 경기 상승과 하강을 겪은 노땅들의 이야기는 그저 스쳐 지나갈 이야기가 아니다. 위기는 언제나 되풀이된다. 다른 경험이 다른 대응을 만든다. Z세대를 위한 위기론 강의, 첫째는 2008 글로벌 금융 위기다.검은 화요일(사회자) “어디까지 떨어질 것 같습니까.”
2008년 9월 16일 오전 8시30분의 생방송 주식 프로그램이었다. 미국의 3대 투자은행 중 하나인 리만브러더스가 파산 신청을 하고 또 다른 투자은행인 메릴린치가 매각됨에 따라 미국 다우지수가 폭락한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공교롭게도 한국은 민족 명절인 추석 연휴를 쉬고 주식 장이 처음 열린 날이기도 했다.
애널리스트 2년 차 김 모 씨의 이마에 진땀이 흘렀다. 사전에 확인되지 않은 질문이었다. 생방송 도중 코스피지수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불시에 답변해야 하니 주가수익률(PER)을 즉각 계산할 수도 없었다. 입이 바싹 탔다.
(애널리스트) “1400선이 지지선이 될 것 같습니다.”
(사회자) “이미 동시 호가에 1360을 불렀습니다.”
검은 화요일. 그야말로 공황이었다. 이날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은 프로그램 매도가 잠시 정지되는 사이드카가 발동됐다. 코스피지수는 장중 1400선이 붕괴됐다. 종가 기준으로 1400선이 무너진 것은 1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전 업종이 내렸다. 그중에서도 증권·은행·건설 업종이 가파르게 급락했다. “홈 트레이딩 시스템(HTS)을 봤는데 모든 화면이 파랐어요. 그런 장면은 처음 봤죠.” 김 씨는 그날을 회상했다. 위기의 진원지는 미국이었다. 2008년 9월 15일. 158년 역사를 자랑하던 리만브라더스그룹의 지주사인 리만브라더스홀딩스가 뉴욕법원에 파산 보호 신청을 냈고 메릴린치가 94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고 500억 달러에 뱅크오브아메리카에게 팔린 날. 이날을 기점으로 세계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글로벌 금융 위기의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한국은 주가연계증권(ELS)과 같은 파생 상품이 이제 막 시장에서 자리 잡을 무렵이었다. 적립식 펀드·차이나펀드·인도펀드 등 ‘펀드 열풍’이 한창이었다. 돈 잃은 투자자들이 증권사와 자산 운용사로 몰려갔다. 당시 프라이빗 뱅커(PB)로 근무했던 양 모 씨는 전국 각 지역에서 매일같이 찾아오는 투자자들을 만났다. “‘서브프라임이 대체 뭐냐, 이거 어떻게 해야 하냐, 삼성전자 계속 들고 있어도 되는 거냐, 이거 잃으면 나 정말 쫄딱 망한다’ 등 질문이 모두 비슷했어요. ‘조금만 더 들고 있으라’고 조언할 수밖에 없을 때였죠.”
대공황을 겪지 못한 세대에게 미국의 위기는 예측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김경수 전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장은 당시 인터뷰에서 “지난 40년간 개도국과 선진국을 막론하고 120회 정도의 외환·금융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위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또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 국가인 미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라고 말했다. 증권가·언론사·학계 모두 서브프라임을 공부하는 데만 며칠을 써야 했다. 양 씨는 “한국에서 서브프라임이 왜 문제가 되느냐고 했을 때 시원하게 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며 “그만큼 미국의 위기에 대해 예상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사건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은 닷컴 버블의 붕괴, 9·11테러 등 연이은 악재로 불경기에 접어들 때였다. 연초 취임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들이 선택한 열쇠는 확실한 경기 부양 카드, ‘금리’였다.
2001년 1월에서 2003년 6월까지 앨런 그린스펀 의장을 중심으로 한 미국 중앙은행(Fed)은 13차례에 걸쳐 Fed 기준금리를 하향 조정했다. 한때 6.5%까지 올랐던 기준금리는 2001년 12월 1.75%, 2003년 6월 1%까지 내렸다. 사실상 ‘제로 금리’에 가까운 45년 만에 가장 낮은 금리였다.
이자율이 하락하자 주택 자금을 빌려주는 주택 담보 대출(이하 모기지)이 급격하게 불어났다. 거주 목적이 아니라 투자 목적으로 주택을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CNN에 따르면 2005년 미국인이 구입한 주택의 28%가 투자 목적, 12%가 별장용이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 아래 모기지 대출 업체의 경쟁이 시작됐다. 이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서브프라임(subprime)’에 주목했다. 미국의 주택 담보 대출은 신용 등급에 따라 프라임(prime), 알트에이(Alt-A), 서브프라임(subprime) 등으로 구분되는데 등급이 낮을수록 대출 금리가 높다. 쉽게 말해 신용 등급이 낮은(sub) 저소득층(prime)을 대상 삼은 것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대출을 내주고 수익을 올리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기 때문에 대출 기준이 턱없이 낮아졌다. 일부에서는 계약금 한 푼 없이 집값의 100%를 대출해 주는 형태로도 상품을 팔았다. 맹수들의 진입2004년에는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가 투자은행의 자회사인 증권회사들의 자본에 대한 규제를 풀었다. 대형 투자은행들이 막대한 자금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와 기업의 도덕적 해이 아래 2006년 서브프라임 대출 비율이 미국 부동산 대출의 45%를 차지할 정도로 높아졌다. 모두가 집을 살 수 있게 되자 주택 가격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2000년에서 2006년, 불과 6년 새 투기 지역의 집값은 2.7배 정도 올랐다.
당시 물가는 약 3%, 기준금리는 1%. 실질 이자율은 마이너스 2%인 셈이었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Fed는 2004년 6월부터 기준금리를 차츰 올리기 시작했다. 2006년에는 5.25%까지 올랐다. 모기지 대출을 받아 주택을 마련한 사람들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자율이 상승하면서 모기지 연체율이 가파르게 급증하기 시작했다.
모기지 대출 회사들도 늪에 빠졌다. 소비자들의 대출금 상환은 어려워졌고 전처럼 모기지 상품이 팔리지도 않았다. 초저금리 시기 늘렸던 직원들의 인건비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시애틀의 모기지 대출 업체인 메리트파이낸셜은 2006년 5월 410명의 직원 중 330명을 해고하고 파산 보호 신청 준비에 돌입했다. 아무도 눈치재지 못했던 ‘글로벌 금융 위기’의 서막이었다.
부동산 수요가 줄자 ‘버블’도 멈췄다. 2006년 5월 발표에 따르면 미국 주택 가격의 중간값은 직전 분기보다 3% 정도 하락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막대한 자금을 등에 업은 투자은행들은 위기의 모기지 대출 회사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2006년 8월 모간스탠리가 삭손을, 9월에는 메릴린치가 퍼스트프랭클린을 매입했다. 모기지 시장에 대한 장밋빛 낙관이었다.
탐욕은 오래가지 못했다. 7200명의 직원을 거느린 미국 최대의 대형 모기지 회사였던 뉴센추리파이낸셜에서 회계 부정 이슈가 터졌다. 신규 대출이 중단됐고 2007년 결국 파산 보호 신청을 냈다. 이 회사의 최대 주주는 모간스탠리·골드만삭스·도이치은행·씨티그룹 등 굴지의 금융사였다. 모기지 시장은 위축됐다. 크고 작은 회사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도미노 파산’이었다.
대출자들의 상황도 말이 아니었다. 서브프라임뿐만 아니라 신용 등급이 높은 알트에이와 프라임 모기지에서도 연체가 늘기 시작했다. 1% 금리 시절 모기지뿐만 아니라 가계 부채가 전반적으로 늘어나 오른 금리를 감당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부 당국자들은 상황을 낙관했다. 미국의 월가, 미국 경제가 서브프라임 사태를 충분히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다우존스 산업지수 역시 2007년 10월 당시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인 1만4093까지 올랐다.
한국에서는 조심스러운 경고가 나왔다. 당시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2007년 서브프라임 여파에 대한 상세 보고서를 내고 미국 변동금리 저당 대출(ARM) 자산 규모가 2008년 말까지 계속 증가할 것이고 이에 따라 부실화되는 서브프라임 규모도 줄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장하원 전 하나금융경영연구소장은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금융 시장에서 서브프라임 부실 사태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며 “서브프라임 사태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시장은 미국의 위기를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코스피는 2007년 10월 31일 사상 최고인 2065를 기록했다. 월가의 비명2008년 3월, 월가의 비명이 시작됐다. 월스트리트 5대 투자은행 중 하나였던 베어스턴스가 무너졌다. 1929년 대공황을 넘긴 ‘겨울잠을 자지 않는 곰’이란 별칭이 있을 만큼 탄탄한 재무 구조를 자랑했던 투자은행이다.
그리고 2008년 9월 15일, ‘금융 제국’ 리만브라더스가 쓰러졌다. 158년 역사의 리만브라더스는 크고 작은 경제 위기를 모두 넘겨 ‘19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란 별명을 가진 회사였다. 하지만 미국 제4대 투자은행 리만브라더스홀딩스는 파산을 선언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부동산업의 호황을 예측하며 미국 제2대 부동산 투자 신탁 회사를 인수했던 리만이었다. 파산 당시 리만브라더스는 1380억 달러의 우선 채권과 170억 달러의 후순위 채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회수는 겨우 40%, 투자자 손실은 1000여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 역사 이후 최대의 금융 파산 사건이자 전 세계 금융 시장을 어둠에 빠뜨린 글로벌 경제 위기 사건이었다.
시장은 다음을 예상했다. 모간스탠리와 골드만삭스가 전철을 밟을 것이란 소문이 번졌다. 미국 정부는 부랴부랴 구제금융에 나섰다. 모간스탠리·골드만삭스 등 독립 투자은행이었던 이들이 상업은행 지주회사로 변경하고 Fed의 감독 관리하에 들어갔다. 하지만 금융 위기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 위기로 확대됐다.
첫 타자는 세계 최대의 보험사 AIG였다. 높은 신용 등급을 바탕으로 발행한 모기지 채권이 말썽이었다. 9월 17일 AIG가 파산 직전에 이르렀을 때 미국 정부는 구제금융을 선택했다. 모기지 채권 시장의 큰손인 AIG가 파산하면 130개국에 걸친 7400만 명의 고객은 물론 세계 경제까지 위기 여파는 상상 초월이었다. 미국 대선도 50일을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미국 월가의 진앙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10월 16일 스위스의 UBS가, 19일 네덜란드의 ING그룹이 자국 정부에서 구제금융을 받았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은행, 금융 시스템이 동시다발적 위험에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했다.
기업을 넘어 국가로도 위기가 확대됐다. 10월 24일 아이슬란드는 IMF에서 구제금융을 받았다. 곧이어 우크라이나·헝가리·세르비아·파키스탄 등 해외 의존도가 높았던 신흥국이 IMF에 손을 벌려야 했다.
11월에는 소비·투자·생산·고용 등 미국의 주요 경제 지표가 하락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제너럴모터스(GM)·크라이슬러·포드 등 자동차 3사에 파산 위기가 닥쳤다. 포드는 자력으로 생존했지만 GM과 크라이슬러는 대출 형식으로 정부 예산을 받아야만 했다(GM은 2009년 6월 1일 파산했다).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는 폐허가 됐다. 그리고 12월 23일 IMF는 ‘제2의 대공황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을의 충격은 겨울의 공포로 번졌다. 10월 말에는 코스피 1000선이 붕괴됐다. 빚 내서 투자했던 사람들이 벼랑 끝에 내몰렸다. 주식 투자 실패로 삶을 비관한 사람들, 증권사 직원들의 비극적인 소식이 매일같이 들려왔다.
증권사와 자산 운용사들은 수익성 악화에 긴축 경영에 돌입했다. 어떤 증권사는 임원들에게 제공되던 운전사를 모두 해고하고 계약직에 대해서는 재고용하지 않는다는 방침까지 나왔다. 삼성·현대 등 대기업이 증권업에 진출하며 불과 몇 달 전까지만해도 결혼 상대 1순위로 꼽힌 ‘억대 연봉’ 증권맨들이 어느새 정리 해고를 걱정했다. 한 증권사 직원은 “그때 싹 물갈이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증권사에 취업한 친구들을 모두가 부러워했는데 그때 그 친구들이 회사에서 잘려 주유소에서 알바 하고 그랬어요. 증권사에 입사하면 패가망신한다는 사회적 인식도 팽배했을 때였죠”라고 회상했다.
미국의 재채기에 한국은 독감에 걸린다고 했던가. 모두가 최악의 상황을 예견했다. 원·달러 환율도 치솟았다. 2008년 초 95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은 2009년 1월 말 1400원을 돌파했다. 원화의 막대한 평가 절하였다. 수출 주도의 대우·현대·삼성과 같은 대기업들도 불황에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 : 1997년 되감기’란 제목의 칼럼을 썼다. ‘붕괴’의 저자 애덤 투즈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아시아의 그 어떤 지역이나 국가도 2008년 한국처럼 수출 불황과 환율 폭락, 유동성 위기가 종합적으로 덮친 곳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미국·유럽·신흥국들이 겪은 기업의 연쇄 부도, 국가 부도 위기가 한국에는 오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1000억 달러에 달하는 해외 대출 보증을 섰다. 정부뿐만 아니라 포스코·현대차·삼성전자와 같은 기업들도 수천만 달러를 외환 시장에 쏟아부었다. 당시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석유 사용을 줄이고 개인들의 달러 저축으로 원화 방어에 활용하자”고 호소했다. IMF 때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던 국민들은 이번에도 환전소에 길게 줄을 섰다. 10월 30일 한국은행과 Fed가 300억 달러의 통화 스와프 협정을 맺었다. 한국은행은 필요한 만큼의 달러를 공급할 수 있었고 외환 시장도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세계도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 적극적인 정책 공조에 돌입했다. 금리 인하, 통화 스와프 등으로 시장에 유동성을 풀었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대규모 경기 부양책이 편성되고 IMF 구제금융 등 국제기구의 대응도 분주했다. ‘자유 경제’ 미국은 공매도를 규제하고 안정기금을 투입하는 등 시장 개입에 나섰다.
글로벌 금융 패닉은 대규모 유동성을 골자로 하는 일련의 대책들로 점차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최악의 국면은 넘어서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나왔다. 코스피 역시 글로벌 금융 위기 완화와 미국 주택 지표 개선과 원·달러 환율 하락 등으로 회복 기미를 보였다. 그럼에도 경기 저점을 기대하기는 이르다는 판단이 높았다. 진앙지를 넘어 유럽발 위기로 세계 경제에 독감이 왔을 때였다. 김 씨도 2009년 3월 ‘지수 1200pt선을 넘긴 힘들 듯’이란 제하의 보고서를 냈다. 경기 회복 시점이 불투명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일 때였다.
시장의 예상은 틀렸다. 곧바로 1200선을 뚫더니 그때부터는 달리는 말이었다. “틈을 안 주더라고요. 4월, 5월…하반기는 빠지지 않겠느냐는 예상도 틀렸어요. 2008년 말 최악의 적자를 기록했던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대표 기업들이 그해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죠.” 김 씨는 “아무도 그때 금융 위기가 (한국에서)이렇게 빨리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한국 : 1997년 되감기?’‘한국 : 1997년 되감기’란 해외 칼럼은 그저 시나리오로 끝났다. 해외 의존도가 높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를 학습한 이후 ‘외환 보유액’을 충분히 쌓은 덕분이었다. 한국의 외환 보유액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위기가 덮칠 때도 한국은 IMF 국난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 국민 돈으로 환율을 방어했다.
금융 위기 당시 한국의 부동산 가격이 비교적 안정세였던 점도 급격한 경기 침체를 막는 주요 원인이었다. 미국발 금융 위기의 시발점이 ‘부동산’이었다면 당시 한국은 2006년 말 노무현 정부의 주택 금융 규제 시행으로 상승세가 둔화할 때였다.
미국이 ‘지옥으로 향하는 길(당시 미레크 토폴라네크 체코 총리의 발언)’을 걷고 있을 때 금융 위기의 구원투수로 등장했던 중국도 한국의 회복을 도왔다. 당시 중국은 소비 부문의 성장세가 연간 20% 이상에 달할 만큼 빠른 속도로 팽창하던 때였다. 미국발 금융 위기가 중국까지 덮치자 중국 정부는 5860억 달러(약 4조 위안)의 특별 지출 계획을 승인했다. 이는 당시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12.5%에 달하는 규모로, 금융 위기가 닥친 이후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실질적인 대규모 재정 지원 대책이었다. 엄청난 국가 주도의 동원령은 전 세계 금융 위기의 대항마가 됐다. 특히 주요 상대 교역국인 한국에도 이익을 가져다줬다. 또 이 무렵 안전 자산이었던 엔화 값이 오르며 수출 주도형 기업들의 숨통도 트였다. 삼성전자·현대차 등 한국 간판급 수출 기업들의 실적이 2009년 비약적으로 늘었다.
미국발 금융 태풍은 세계에 여러 메시지를 남겼다. 첫째는 ‘보증 수표’였던 미국의 신뢰도 하락이다. 리만브라더스 사태는 미국의 자본주의, 월가로 대표되는 금융 산업에 대한 신뢰가 크게 깨지는 계기였다. 중국 국부펀드 관리자인 가오시칭은 한 인터뷰에서 “세계는 미국이 자신만의 이념·자부심·독선으로 투쟁을 이어 온 후 마침내 미국인의 위대한 재능 중 하나인 실용주의를 적용시켰음을 목도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의 개입이 실상 ‘아메리카식 사회주의’라는 지적이었다. 마침 금융가에서는 사회주의자 힐퍼딩의 ‘금융자본론’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우월했던’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카운터파티 리스크(거래 상대방 위험)’를 살피게 된 점 또한 금융 위기의 큰 교훈이었다. 카운터파티 리스크는 계약 상대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생기는 위험 가능성을 뜻한다. 리만브라더스가 바로 카운터파티 리스크가 큰 업체로 지목돼 하루아침에 파산한 산증인이다. 이후 금융계에서는 그간 간과해 왔던 카운터파티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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