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순기능의 결과…소화불량, 근육 뭉침 등 신체화 증상 표출 시 진단과 처방 받아야
[안주연의 다시, 연결] ※한경비즈니스는 ‘안주연의 다시, 연결’을 연재하며 독자에게 상담 편지를 받고자 합니다. 직장인 마음 상담을 주제로 다양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직접 답하겠습니다. 하단 링크로 직접 사연을 작성하거나, poof34@hankyung.com으로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사연 접수 링크
안녕하세요. 저는 서른 넷, 현재 백수입니다. 지난해 10월 권고사직으로 퇴사하게 됐습니다. 하던 일은 사무직이고 단순 작업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퇴직금과 나라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활 중입니다. 처음에는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권고사직을 당했다는 울분에서 헤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술을 빌리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 욕도 해보지만 갑자기 우울하고 화가 납니다. 당시에 제게 회사를 그만두라고 종용했던 상사와 말리지 않았던 동료들이 밉습니다. 저는 외향적인 편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말을 잘 하고 대화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눈치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고 타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습니다. 말조심을 하자고 생각해도 그게 어렵더라고요. 하던 일은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그래도 보람차게 해 왔습니다. 좋아했습니다. 분노와 울분을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까요. 구직 용기도 생기지 않습니다.
민지(가명) 님, 안녕하세요.
퇴사 후의 정서적 어려움을 솔직하게 상의해 주셨습니다. 최근의 경기 부진과 고용 축소 상황에서 많은 분들이 민지 님의 상황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지 님의 편지를 읽으며 마음 한쪽이 저릿했습니다. 실직 자체가 높은 스트레스지수를 기록하는 상실의 경험입니다. 특히 인원 감축으로 퇴사를 권고받게 된 분들이 정말 힘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퇴사자들의 인터뷰들을 살펴보면 경영난으로 인한 퇴사 권고인데도 그 상황에 놓인 대상자들은 쫓겨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창피하고 부끄러웠다고 회고합니다. 본인이 이곳에 꼭 필요한 인물이 아니고 적응을 잘 못한 무능한 패배자처럼 느껴졌다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동안 잘 해내려고 나름대로 애쓴 부분이 몽땅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보통 회사도 경영 상황이 어려울 때 이런 결정을 내리다 보니 대상자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시간을 여유 있게 주고 퇴사 이후를 돕는 등의 정서적·실질적 배려를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퇴사 대상자가 되지 않은 동료들 또한 불안·죄책감·분노·상실감·회사에 대한 불신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돼 퇴사하는 동료를 충분히 지지하거나 제대로 작별하지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결과적으로 퇴직하게 된 대상자들은 실직의 충격과 분노·슬픔을 짧은 시간에 혼자 추슬러야만 하고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고립감과 좌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민지 님도 이러한 과정과 감정들을 거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원 감축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면서 조직 내에 불안·불확실성·공포 등의 감정이 퍼졌을 것이고 민지 님도 마음이 쓰였을 겁니다. 그런데 본인도 동료들도 민지 님이 그 대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당신이 하던 일을 줄이려고 한다’는 간단한 설명으로 퇴직을 권고 받으셨으니 매우 당황스러우셨겠지요. 퇴사 이후에도 위에 언급한 숱한 감정들이 밀려와 이를 혼자 감당하기 힘드셨을 것입니다.
민지 님에게 2년 동안 그 누구보다 수고하셨다고 먼저 말씀 드리고 싶어요. 그동안 성실히 일해 왔고 잘 마무리한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꼭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민지 님은 이전 직장 경험들을 통해 스스로를 ‘어떤 상황에서도 잘 견디고 책임감이 강한 편’이라고 하셨는데 선하고 꾸준하며 타인을 배려하려고 노력하는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편지에서 엿보이는 민지 님의 마음은 타인(조직·동료 등)들에 대해 매우 수용적이고 우호적인데 한편으로는 회사 내 인간관계에 기대 또한 커 보입니다. 원래의 민지 님은 외향적이고 대화를 좋아하는 성향인데 그동안 주변에서 받아 온 피드백들 때문에 이번 회사에서는 천성을 억누르고 말수를 줄이려고 굉장히 조심해 온 것 같습니다. 회사에 잘 적응하고 회사 사람들과 갈등 없이 지내고 싶은 민지 님의 마음이 느껴졌어요. 그렇게 애쓰던 와중에 이런 형태로 퇴사를 통보받게 되니 더욱 서운하고 화가 났을 겁니다.
친구들과의 만남 중에 갑자기 우울하고 화가 올라온다고 하는데 이러한 감정 분출 또한 자연스럽습니다. 힘든 감정들을 충분히 얘기하는 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현재 단계에서 억지로 화를 참거나 전 회사와 동료들에 대해 일부러 좋게 생각하고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울분은 적당히 살아 있는 공격성 혹은 공격적인 감정으로서 순기능이 있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낸 것도 그 순기능의 결과입니다. 가면을 쓴 착함보다 진심의 분노 표출이 우리들의 마음 건강에는 더 도움이 됩니다.
의사로서 또 한 가지 걱정은 격한 감정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많이 동반되는 ‘신체화 증상’입니다. 스트레스와 울화를 감당하다 보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느낌, 가슴 속 덩어리, 답답함, 가슴 뜀, 입마름, 한숨, 열감, 소화불량, 근육 뭉침 등의 증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한두 달 내에 사라지지만 증상 중 일부가 지속되며 민지 님의 일상생활을 괴롭힌다면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해 필요한 진단과 처방을 받기를 권해 드립니다.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전 남친이나 동료들에게 눈치 없다는 얘기를 듣고 타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피드백을 받는다는 이야기들은 민지 님이 자신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지점입니다.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기는 매우 어렵고 조심스럽습니다. 심리 치료의 과정에 내담자 자신의 책임(혹은 귀인·권한·영향력 등)인 부분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혼자 해결하기보다 전문가를 만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찾아가는 것을 권유드립니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피드백·충고 등의 맞고 틀림과 관계없이 민지 님은 자기 삶에서 부단히 노력하고 조직 내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일했을 겁니다. “눈치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저 말을 한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눈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데, 눈치의 뜻을 풀어보면 ‘전후좌우 주변과 상황을 관찰하고 힘 센 사람의 요구에 나를 욱여넣어 행동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한국은 서열주의와 심기 노동이 심해 약자에게 눈치를 강요하는 경향이 심한데 이는 직장의 심리적 안전을 해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눈치’의 정의 앞부분의 ‘관찰’은 한 번 연습해 볼 만합니다. 타인들과 잘 소통하고 상황에 잘 대처하기 위한 상황 읽기와 마음 읽기는 유용한 삶의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민지 님, 이제부터 셜록홈즈의 확대경을 들이대고 일상을 좀 더 자세히 보고 묘사해 보면 어떨까요. 그때 들었던 말, 주변의 반응, 자신을 화나게 한 것은 특정 단어였는지 혹은 그 사람의 말투였는지…. 자기 마음을 힘들게 했던 ‘자극(현실·사실)’을 자세히 살펴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극에 따라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감정과 욕구가 무엇인지 느끼고 이름 붙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들을 ‘알고’ 향후의 행동을 선택하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보면 퇴직 상황과 현재 느껴지는 자괴감과 자신감 저하, 구직에 대한 두려움을 인지하고 그대로 수용해 주는 것입니다. 그 이후 민지 님은 그 조직에 최적화된 인재가 아니었을 뿐이지 이번 일로 민지 님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장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둘째는 타인에 대한 기대를 적절한 수준(타인이 들어줄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절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호하지 않고 회사를 말려 주지 않은 동료들에 대한 미움의 감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들 또한 회사 앞에서 ‘을’의 처지라 적극적으로 나서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것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마음과 관찰을 동료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바라는 점을 표현하거나 써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해석-감정·욕구-행동의 단계적 확대경으로 일상을 살펴보면서 분노 아래에 있는 다른 감정들을 발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삶에서 일어나는 일과 감정들을 세밀하게 켜켜이 쌓아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분노와 서운함으로 괴로운 중에도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 보고 돌보려고 애쓰고 있는 민지 님의 나날에 진심으로 지지와 응원을 보냅니다.
민지 님, 보내 준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의 짧은 문장들입니다.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보람차게 했고 좋아했다고 쓰셨어요.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큰 생각이 없던 일이어도 그 일에 몰입했던 구체적 경험들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민지 님의 일과 삶 속의 비밀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지 님에게 들어오는 자극들과 민지 님이 세상에 보내고자 한 응답 사이에서 기억의 갈피를 넘겨보면 좋겠어요. ‘보람 찼고, 좋아했던’ 그 순간은 무슨 일을 하며 어떤 관계 속에서 느꼈던 것일까요. 그 순간으로 돌아가 머물러 보길 제안해 봅니다. 그 순간을 만들어 준, 그 순간에 놓여 있던 자신의 주변부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현장을 천천히 세밀하게 묘사하고 살펴보면서 자신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감동과 동기가 무엇을 향하는지 꼭 발견해 보기를 바랍니다.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경비즈니스는 ‘안주연의 다시, 연결’을 연재하며 독자에게 상담 편지를 받고자 합니다. 직장인 마음 상담을 주제로 다양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직접 답하겠습니다. 하단 링크로 직접 사연을 작성하거나, poof34@hankyung.com으로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사연 접수 링크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