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자동차공업보호법부터 60년
석유파동‧외환위기‧세계화 등 역사의 변곡점과 함께한 K-자동차
1955년 시발 자동차부터 도시형 SUV까지 변천사
한경비즈니스는 1년에 두 번 합본호를 냅니다. 설날과 추석 2주치를 한꺼번에 낸다는 말입니다. 기자들은 이때 약간은 숨을 돌릴 여유를 갖습니다. 물론 온라인 기사도 써야 하기 때문에 마냥 맘이 편할수 만은 없지만요. 이 정도로는 좀 아쉽다는 독자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한경비즈니스 편집진은 올해 썼던 기사 가운데 ‘시간의 간섭’을 받지 않는 기사들을 추려봤습니다. 공부해두거나 읽어두면 상식이 되거나, 트렌드를 이해할 수 있는 12개의 기사입니다. 이를 한곳에 정리했습니다. 연휴 기간 영상에서 벗어나 활자의 세계로 눈을 돌린 독자분들께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편집자 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설 확률은 얼마나 될까. 엄청나게 낮다는 것을 한국이 보여줬다. 2021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회원국 만장일치 합의’로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변경했다. UNCTAD가 1964년 설립된 이후 개도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지위를 변경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한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큰 축을 담당했던 산업으로 자동차 산업을 꼽을 수 있다. 자동차 산업은 전후방 연관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소득도 늘었다. 2022년 전국 자동차 등록 대수는 2500만 대를 돌파했다. 인구 2명당 자동차 1대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올해 상반기 판매량이 일본 도요타, 독일 폭스바겐 다음인 3위에 올랐다. 2010년 글로벌 5위를 달성한 지 12년 만이다.
빛나는 현재가 있기까지 정부와 기업의 뼈를 깎는 노력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히트작을 내놓았지만 과도한 투자로 흡수된 기업이 있었고 시장 진입에 가로막혀 너무 늦게 출발하다가 결국 손을 뗀 기업도 있었다.
자동차는 한국인들에게 단순한 이동 수단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집에 이은 둘째로 큰 자산이었고 자신의 부를 보여주는 수단과도 같았다. 대형 차를 좋아하는 특징이 생긴 배경이다. 1960~1970년대에는 자동차를 산 후 온 가족이 울산에 있는 공장에 내려가 하룻밤을 자고 차를 받아 오는 일이 흔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모델들을 따라가며 한국 자동차 역사를 들여다봤다.
◆1950~1970년대
시발부터 포니까지
1950년대 거리는 한산했다. 예약제로 운영하는 미군용 택시만 어쩌다 보였을 뿐 승용차는 거의 볼 수 없었다. 1955년 6·25전쟁 직후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자동차가 나왔다. 자동차 정비소를 하던 최씨 3형제(최무성‧최혜성‧최순성)가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라는 회사를 차렸다. 미군이 폐차한 지프차 윌리스 MB를 가져다가 완전 분해한 뒤 쓸 만한 부품들을 모으고 모아 재조립해 ‘시발(始發) 자동차’를 만들었다. 차체는 가장 쉽고 싸게 구할 수 있는 드럼통으로 제작했다. 엔진은 전통적인 대장간에서 거푸집 주조 형식으로 만들었다. 조악한 구조지만 택시 회사에 총 500대가 판매됐다. ‘시발택시’다.
1955년 10월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우수상을 거머쥐며 유명세를 탔고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인지도가 대폭 상승했다. 제작 기간을 4개월에서 1개월로 줄이면서 수요는 더욱 늘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 새나라자동차(대우자동차 전신)에 준 특혜에 밀려 1964년 문을 닫았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는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현 기아)·새한자동차(대우차 전신) 등 우리에게 익숙한 회사들의 자동차가 거리에 등장했다. 포니·브리사·제미니 등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포니의 탄생은 한국 자동차에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이 계획을 주도한 것은 정부다. 정부는 1962년 자동차공업보호법을 제정해 외국산 수입을 금지했고 부품‧시설재 관세를 면제하며 한국 기업을 보호했다. 기업에는 ‘기술 제휴는 하되 외국 자동차 회사와 합작하지 않을 것, 자동차 부품 사업을 육성할 것’을 권고했다. 1973년 중화학 공업 선언을 발표했는데 1980년대 초 자동차 50만 대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한 장기 자동차 공업 진흥 계획이 이때 나왔다. 포니의 탄생 배경이다.
정주영 현대 창립자는 고유 모델 자동차가 필요하다는 정부의 제안에 “할 수 있다”며 3주 만에 포니차 생산 계획서를 제출했다. 연간 5만 대. 최소 경제 단위지만 인프라도 없었고 현대차가 조립만 해봤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포니는 ‘꿈을 꿨어요 포니, 갖고 싶어요 포니, 아름다운 포니, 현대 포니’라는 광고 문구처럼 1975년 데뷔에 성공한다.
디자인은 20세기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작품이었다. 엔진 기술은 일본 미쓰비시의 도움을 받았다. 차체만 고유형이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포니는 세계에서 열여섯째, 아시아에서 둘째 고유 자동차 모델로 이름을 올렸다. 자동차 생산 이력도 짧고 개발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단기간에 고유 모델을 개발한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기록이다. 포드자동차의 생산 기지에 불과했던 현대차가 조립차를 생산한 지 8년 만이다. 출시 이듬해인 1976년부터 아르헨티나·콜롬비아·에콰도르·이집트 등에 수출했다.
◆1980년대
봉고 신화와 엔트리카의 등장,
쏘나타와 그랜저까지
1979년 아침마다 주유소는 장사진을 이뤘다. 2차 오일쇼크로 유가가 급등하면서 한국 경제 역시 엄동설한을 맞았다. 자고 일어나면 휘발유 값이 껑충 뛰자 당시 아버지들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휘발유 통을 들고 주유소로 달려나간 것이다.
휘발유 값이 오르고 세계 경제가 흔들리자 한국 자동차 기업들도 휘청였다. 여기에 이듬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가 들어섰다. 신군부는 ‘자동차 산업 통폐합’ 조치를 취했다. 현대와 새한(대우)을, 기아와 동아자동차(쌍용자동차 전신)를 통합하려고 했다. 결론적으로 두 건 모두 합병은 백지화됐다. 다만 현대와 대우는 승용차만, 기아는 중소형 상용차를, 동아는 특장차만 만들 수 있도록 교통 정리가 됐다. 이는 기아의 위기를 야기했다. 기아는 1980~1981년 2년간 500억원의 적자를 냈고 18개에 이르던 계열사 중 5개사를 매각했다.
이때 기아를 먹여 살린 히트작이 등장했다. 봉고차(봉고 코치)다. 승합차의 대명사인 봉고는 일본 마쓰다 봉고를 들여와 개조한 모델이다. 봉고차는 12인승에 디젤 엔진차여서 세금도 쌌고 기름값도 쌌다. 사람을 많이 태우고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데다 가격도 착했던 것이다. 오일쇼크로 허덕이던 국민들을 홀렸다. 1981년 1022대가 팔렸고 1982년 1만 대를 돌파했으며 1983년엔 2만 대 가까이 팔렸다. 봉고 이후에 출시된 소형 승합차는 모두 봉고차로 불렸을 만큼 대박을 쳤다.
이를 ‘봉고 신화’라고 부른다. 신화의 주역은 직원들이다. 이들은 일치단결해 회사 재건에 나섰다. 자진해 상여금을 반납했고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에 노력을 기울였다. 1983년 기아는 되살아났다.
한국 경제에도 봄이 왔다. 1985년 9월 미국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미국·영국·프랑스·서독·일본 등 5개국 재무장관들이 모여 달러화 강세를 시정하기로 하고 플라자 합의를 체결했다. 이듬해 유가도 60% 가까이 급락했다. 1980년 중·후반 ‘3저 시대(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막이 오른 것이다. 단군 이후 최대 호황이란 평가를 받았던 1986~1988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11~12%에 달했다. 대내외적 상황이 변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자동산 생산 자유화 조치’를 취했다. 기아가 다시 승용차를 제작할 수 있게 됐다. 이때 내놓은 모델이 프라이드(1987년)다. 프라이드는 기아, 미국 포드, 일본 마쓰다가 분업 체제를 통해 만든 모델이다. 디자인이나 승차감은 조금 떨어졌지만 순발력·가격·경제성이 좋아 장수한 소형 차로 꼽힌다.
프라이드와 함께 이 시대를 달렸던 현대 엑셀과 대우 르망도 마찬가지였다. 연비가 리터당 13~18km 정도였다. 이들은 경제성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 자동차 가격이 1년 수입과 맞먹는 수준이 됐다. 1981년 1인당 실질 국민총소득(GNI)이 500만원을 넘어섰는데 프라이드와 엑셀 가격은 각각 330만~400만원, 450만~500만원이었다. 엑셀은 특히 현대차가 최초로 미국 시장에 수출한 차라는 기록도 갖게 됐다.
이 시기 한국 자동차 회사들은 점차 외국 업체에서 스타일을 지원 받던 방식에서 벗어났다. 디자인 작업을 공동으로 진행하거나 독자적으로 진행한 디자인을 평가하며 협업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자동차의 대표 브랜드가 하나 탄생한다. 중형 승용차인 현대차의 쏘나타다. 쏘나타는 1985년 ‘소나타’에서 출발했고 1988년 현대차 디자이너들이 제작한 독자적인 스타일로 시장에 나왔다. 이후 1993년 쏘나타Ⅱ가 한국 베스트셀링 카에 오르며 ‘국민 차’로 사랑을 받았다. 한때 중산층의 상징이 되기도 했고 한국 자동차업계 최장수 모델(37년)을 기록했다. 8세대 모델까지 나오며 900만 대 넘게 팔렸다. 한때 현대차가 회사 이름을 쏘나타주식회사로 바꿀 것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현대차는 대형 세단 시장에도 도전장을 냈다. 1986년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와 손잡고 1세대 그랜저를 출시했다. 1세대는 각이 지고 직선적인 외관 때문에 ‘각 그랜저’로 불렸다. ‘모래시계’ 등 인기 드라마에서 성공한 사업가와 정치인들이 타는 모습이 방영되며 부유층이 타는 고급 차로 자리 잡았다.
12년 후인 1998년 3세대 그랜저(XG)는 일본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현대차가 독자 개발했고 처음으로 해외에 수출했다.
1990년대 말 이후 그랜저는 이미지 변화를 시도했다. ‘고급’ 이미지에 ‘성공’ 이미지를 추가했고 고객층을 넓혔다. 다이너스티·에쿠스·제네시스 등 현대차에 대형 플래그십 세단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2016년부터는 쏘나타를 제치고 ‘국민 차’ 반열에 올랐다. 실제 그랜저는 한국 승용차 중 판매 1위다. 올해 1~8월 4만5055대 판매됐는데 경쟁 차종인 기아 K8(2만9108대)과 비교하면 1.5배 더 팔렸다.
소형 차부터 중대형 세단까지 줄줄이 나오며 1988년 한국 자동차 총생산량은 100만 대를 넘겼다. 자동차 대중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1990년대 초·중반
엘란트라‧에스페로‧세피아 등 아빠 차부터
엑센트‧아벨라 등 신세대 차까지
1987년 자동차 수입이 공식 허용되면서 벤츠와 BMW 등 이름만 들어봤던 외제 차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총성 없는 전쟁의 서막이 오른 셈이다. 1990년대 초·중반 개방화·세계화 흐름 속에서 한국 자동차 총생산이 250만 대를 넘겼다. 1995년 자동차 생산량은 영국·이탈리아·캐나다·스페인을 제치고, 자동차 강국인 미국·일본·독일·프랑스 다음인 5위를 차지했다.
같은 시기 전국 자동차 등록 대수는 500만 대를 돌파했고 국민총소득은 1500만원으로 올랐다. 가정마다 자동차를 한 대씩 보유하는 마이 카(my car) 시대가 열렸다.
기아와 대우도 고유 모델을 내놓았다. 기아 세피아와 대우 에스페로다. 당시 자동차 산업을 주름잡았던 현대차·기아·대우 모두가 고유 모델 출시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 한국 자동차 회사들은 각 세대를 겨냥한 다양한 모델을 쏟아냈다. 지갑이 넉넉해지면서 그 시대 아버지들은 엑셀·프라이드·르망 등 해치백 스타일의 소형차에서 현대 엘란트라, 대우 에스페로, 기아 세피아 등 세단 형태의 준중형차로 갈아탔다. 특히 엘란트라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다. 엘란트라는 중형급으로 급을 높이기 전 좀 더 나은 패밀리 카로 주목을 받았다. 배기량·성능·크기만이 아니라 스포티한 스타일로 세련미를 강조했다. 화려한 색채는 생동감을 줬다.
기아 세피아는 마쓰다의 설계를 응용했지만 마쓰다의 패밀리아보다 균형이 잘 잡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엔진룸과 데크가 짧아 실내 공간도 넓어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예쁘고 색깔 있는 차, 이제 거리에 컬러 혁명이 시작된다’, ‘신세대 신감각’은 현대 엑센트와 기아 아벨라의 광고 문구다. 엑센트와 아벨라는 2030세대를 겨냥해 출시된 모델이다.
당시 2030세대들은 일정한 교육과 미디어 문화를 접해 왔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다르게 자식의 욕망을 표현하면서 오렌지족, 감성 세대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자동차 회사들은 이들의 욕망을 차량의 색깔로 자극했다. 과거 엑셀 등의 차량이 무난하고 보편적인 디자인을 구현했다면 엑센트는 주홍색·청록색·진보라색 등 밝고 채도 높은 색으로 승부를 봤다. 아벨라도 진분홍색·자주색·남청색 등 뚜렷한 유채색을 사용했다.
사회 초년생들 사이에선 현대 아반떼가 인기였다. 아버지의 그랜저나 사회 선배들의 쏘나타와는 다른 차를 원했던 이들은 준중형의 대표 주자 ‘아반떼’를 선택했다. 아반떼는 1990년 출시된 엘란트라의 후속 모델로, 1995년 탄생했다. 현대차가 독자 개발한 베타 엔진을 탑재했다. 베타 엔진은 튼튼한 주철 블록과 가볍고 강성이 뛰어난 알루미늄 합금 헤드가 적용돼 내구성이 우수했는데 자동차 마니아들은 터보차저나 슈퍼차저를 베타 엔진에 이식하기도 했다.
현대차는 아반떼, 쏘나타, 그랜저로 세단 라인업을 완성했다.
이에 맞서 대우차는 1990년대 중반 세 가지 차종을 동시 개발하며 경쟁을 벌였다. 1996년부터 차례로 나온 소형 라노스, 준중형 누비라, 중대형 레간자 등이다. 하지만 대우그룹의 몰락 과정에서 큰 빛을 보지 못했다.
1990년대 또 다른 큰 사건은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이다. 사실 삼성은 197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기 위한 준비를 해왔지만 시장의 장벽이 높았고 해외 업체와의 기술 제휴에 실패하면서 계속 미뤄졌다. 그러다 1994년 닛산자동차와 기술 제휴에 성공해 1995년 SM5를 내놓으며 쏘나타의 자리를 위협했다. 하지만 외환 위기의 후폭풍으로 프랑스 르노에 매각되는 비운을 맛봤다. 이후 르노삼성이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 삼성은 2021년 완성 차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외환 위기 이후
어려운 시기 빛난 마티즈와 카니발,
레저 붐과 도시형 SUV의 인기
1997년 외환 위기가 발생했다. 자동차 산업도 외환 위기의 풍파를 피해 갈 수 없었다. 대우·대우조선·기아·아시아·현대·현대정공·삼성자동차·쌍용차 등 8개 업체가 경쟁했던 한국 자동차 산업은 외환 위기 후 현대차‧기아와 GM대우, 르노삼성, 쌍용차 등 4개사로 재편됐다. 기아는 부도 나고 삼성차는 팔렸다.
어려운 시기 소비자들의 소비 키워드는 ‘경제성’이었다. 경제성을 따지자 인기 차종은 두 가지로 분류됐다. 우선 경차. 외환 위기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경차 만한 차가 없었다. 1998년 대우에서 선보인 마티즈는 이 같은 상황에 적중한 모델이었다. 마티즈는 나오자마자 젊은 여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경차라는 이름 대신 마티즈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실내를 캐릭터 상품으로 꾸미고 초보 운전을 알리는 메시지에는 ‘완전 초보’ 등 귀여운 문구가 등장했다.
실내 공간은 크지만 연료비가 싼 액화석유가스(LPG)와 디젤 차량이 주목받기도 했다. 1998년 생산된 카니발이다. 카니발은 크라이슬러의 캐러밴과 포드의 윈드스타를 모델로 개발한 차량이다. 저렴한 유지비에 넓은 실내 공간과 가변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좌석 등 활용도가 좋았다. 또 각종 세제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단 점도 인기 요인이었다. 2000년대 전후에는 레저 붐이 일었다. 2001년 국민총소득이 2000만원을 넘었고 2002년 금융권에서 주5일제가 처음 도입됐다. 사람들은 치열한 도시에서 벗어나 산과 바다로 나가길 원했다. 각종 짐과 스포츠 장비를 싣고 나가기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만한 차가 없었다.
SUV의 대중화는 카니발과 함께 2000년 출시된 현대 싼타페가 이끌었다. 싼타페는 승용차처럼 안정감 있는 주행 성능으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같은 해 기아도 쏘렌토를 출시했고 2004년엔 현대 투싼이 나왔다.
대중화는 2000년대 들어 이뤄졌지만 사실 SUV는 1990년대 초반 시장에 나왔다. 처음 출시된 도시형 SUV는 1993년 탄생한 기아의 스포티지였다. 스포티지는 박스형에서 벗어났다. 강하지만 완만한 곡면이 살아있는 부드러운 스타일을 강조했다. 같은 해 쌍용차도 무쏘를 출시했다. 무쏘는 전통적인 오프로드카를 일상생활에 맞게 변형한 차량이다. 다만 차체 무게와 크기에 비해 실내 공간이 좁았다.
또 한 가지 짚고 갈 점은 도시형 SUV가 시장에 나오기 전 앞서 나온 모델은 지프차다. 지프차는 험로를 달리며 여행을 즐기기에 적합하게 설계됐다. 쌍용차는 1974년 신진자동차와 업무 제휴를 시작해 신진지프자동차공업을 합작 설립하고 그해 5월 신진지프를 선보였는데 이는 훗날 코란도의 전신이 됐다.
1983년 탄생한 코란도는 ‘한국 땅을 뒤덮는 차’, ‘한국을 지배하는 차’ 등의 뜻을 지녔다. 다만 패밀리형 차량을 선호했던 시기 나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낮았다. 또 지프형 차량은 가격도 비쌌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1996년 출시된 신형 코란도(3세대)는 벤츠 엔진에 독창적인 스타일로 변신하며 대학생들이 가장 갖고 싶은 차로 각광받는다. 코란도를 갖고 싶어 쌍용차에 입사했다는 신입 사원이 있을 정도로 절대적 인기를 누렸다. 3세대는 2005년 단종되기까지 36만 대가 판매됐다. 어쨌든 코란도는 한국 SUV의 출발점인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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