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쌍팔년도’ 경영 방식 고수하는 일본…‘장인 정신’도 발전에 걸림돌로
[글로벌 현장] 1988년을 전후로 한국과 일본에서 방영된 코카콜라 광고는 두 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서 먼저 제작된 광고와 광고 음악이 인기를 끌면서 한국에서도 같은 콘셉트의 광고가 만들어졌다. 1988년은 일본 버블(거품) 경제가 절정해 달했을 때다. 일본이 전성기를 누리던 때인 반면 한국은 일본에 비해 20년 정도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던 시기다.미국을 따라잡을 듯한 기세의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광고였던 만큼 한국에서의 반응도 뜨거웠다.
코카콜라 광고는 초기에는 직장 생활과 여가 시간의 활력과 여유를 그리다가 점점 생활 속에 스며든 자사 상품을 묘사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 덕분에 당시 두 나라의 직장 생활과 일상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 35년 전 직장과 일상의 풍경을 오늘날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한국 코카콜라 광고에 나타난 1988년의 일상 풍경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마치 기록 영화를 보는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여전히 ‘쇼와 모델’ 벗어나지 못한 일본
반면 일본 광고에 담긴 1988년의 일상과 오늘날은 콜라를 마시는 사람이 줄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변화가 없다. 어린이집 원생들과 중고교생들의 교복, 여름철이면 일상적으로 입는 유카타, 하얀색 자전거로 순찰하는 순경, 다양한 방과후 부활동, 노천 온천, 여름 축제(마쓰리), 자녀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시치고산 등.
한국인이 어느 틈엔가 흘려보내 버린 전통 풍습과 옛 모습들을 일본은 도쿄 도심에서조차 신기할 정도로 지켜 가고 있다. 서울과 도쿄 생활의 가장 큰 차이를 “계절의 변화와 1년의 흐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점”이라고 답하는 한국인 주재원이 많은 이유다.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대신 옛 모습도 소중하게 간직한 일본의 일상 풍경이 매력적이라는 외국인이 적지 않다.
하지만 기업의 측면에서 보면 어떨까. 일본의 기업들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대체로 1988년 광고에 나오는 모습과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데스크톱 컴퓨터가 노트북으로 바뀌고 사무실 인테리어가 세련된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생활의 풍경이 한결같다는 점은 안정감을 준다. 반면 전 세계 기업들이 혁신에 목을 매는 이때 변화에 둔감한 기업들이 모인 일본 경제는 정체를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일본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일본 재계 스스로 주요국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하는 방식에 대해 ‘미국은 IX, 유럽은 CX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데 일본은 여전히 쇼와 모델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IX는 ‘이노베이션 트랜스포메이션(Innovation Transformation)’의 약자다. 기술 혁신으로 경제 구조를 진화시키는 미국 기업들의 미래 전략이다. GAFA(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 등 빅테크들이 대표적이다. CX는 ‘코퍼레이트 트랜스포메이션(Corporate Transformation)’의 준말이다. GAFA와 같은 초대형 혁신 기업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인수·합병(M&A)을 통해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유럽 기업의 4차 산업혁명 대응 전략을 말한다. 이노베이션 대신 기업의 모습과 체계를 변신시켜 미래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쇼와(昭和)시대는 1926~1989년 히로히토 일왕의 재위 기간이다. 일본이 세계 2위 경제 대국에 오른 ‘좋았던 날’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는 ‘낡고 구식’의 이미지로 더 많이 쓰인다.
코카콜라 광고에서 묘사한 일본이 쇼와 말기였다는 점에서 ‘일본 기업들은 여전히 쇼와 모델을 고수한다’는 일본 재계의 자평은 설득력이 있다는 평가다.
변화를 거부하는 일본 경영인들
쇼와 모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미국 기업이 기술 혁신, 유럽 기업이 M&A를 통해 미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비해 일본기업은 여전히 ‘쌍팔년도’ 경영 방식을 고수한다는 뜻이다.
일본 기업의 쌍팔년도 경영 방식은 ‘모노즈쿠리’로 대표되는 일본의 제조업 전통을 말한다. 모노즈쿠리는 착실하게 개선과 개량을 거듭하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일본 제조업 특유의 장인 정신이다.
일본의 장인 정신은 일본을 세계 3위 경제 대국으로 올려 놓은 원동력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디지털화와 기술 혁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지적을 더 많이 받는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기술 혁신을 통해 단숨에 시장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의 시대에 모노즈쿠리 전통이 의도하지 않게 변화를 거부하는 주체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변화와 혁신에 소극적인 일본의 전통적인 경영인 상(像) 역시 쇼와 모델을 대표한다. 일본 심리학의 대부 가와이 하야오는 ‘중공구조(中空構造) 일본의 심층’이란 책에서 “일본의 정치 지도자와 기업 경영인은 강력한 지도자보다 전체적인 균형을 조율하는 조정자형이 많다”고 말했다.
그 결과 미국과 유럽 기업은 강력한 리더가 이끄는 통합형 경영 체제가 많지만 일본 기업은 균형형 경영 체제가 흔하다고 분석했다.
일본 신사는 입구인 도리이(鳥居)부터 고색창연한 건축물이 늘어서 신성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막상 신사 안은 텅 비어 있다. 겉보기엔 화려한데 알맹이는 텅 빈 일본 신사의 사당(祠)처럼 일본 기업은 실질적인 리더가 존재하지 않는 대신 각 계열사나 사업부의 힘이 서로 작용해 조직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설명이다.
수십, 수백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의 선단식 경영 시대에 이러한 경영 체제는 기업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경쟁력이었다. 반면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오늘날 전통적인 일본 경영인 모델은 기업을 고인 물로 만드는 원인이다.
품질 검사 부정, 직장 내 괴롭힘, 입찰 담합 등 사고가 끊이지 않는 미쓰비시전기는 조정자형 경영 체제의 단점을 바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쓰비시전기는 8개의 사업부문 대표자가 사장을 돌아가면서 4년씩 나눠 맡는 전통을 유지해 왔다.
사장은 조직의 리더라기보다 8개 사업부의 조정자에 가까웠다. 자연스럽게 사업 구조 재편과 같은 변혁을 추진하는 리더는 드물었고 현상 유지에 힘을 쏟는 관리자가 대부분이었다.
수성에 골몰하는 고만고만한 경영인은 미쓰비시전기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본 특유의 현상이다. 총리 직속 자문 기구인 경제재정자문회의의 멤버이자 올해 일본 3대 경제 단체인 경제동우회 대표에 선출된 니나미 다케시 산토리홀딩스 사장은 이를 ‘마트료시카 현상’이라고 부른다. 비슷비슷한 유형의 경영인이 반복해 배출되는 일본 기업의 풍토를 큰 인형 안에서 작은 인형이 나오고 또 그 속에서 더 작은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에 빗댔다.
변화를 거부하는 경영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을 일으켜 세운 힘이었던 ‘애니멀 스피릿(야성적 추동)’의 상실이 겹쳐지면서 일본 경제가 시들고 있다는 게 일본 재계의 자체 진단이다.
작년 3월 일본경제연구센터는 중기 경영 예측 결과를 내놓았다. 코로나19 사태가 2022년 이내에 수습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세계 경제에 준 충격이 2025년까지 마무리된다는 표준 시나리오에서도 2030년대 일본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이 상시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기업 실적 부진에 따른 설비 투자 부진,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감소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노동자 1인당 급여 증가율은 0.3%에 그치고 대기업의 영업이익도 60조 엔 수준에서 정체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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