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재앙이 아닌 ‘신(新)빈곤’ 또는 ‘위장된 결핍’으로 정의돼야

건강염려증 3

코로나19의 공포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팬데믹(세계적 유행)의 정점에서는 별별 ‘카더라’와 신화들이 난무했다. 동물의 기생충 약으로 쓰이는 이버멕틴(ivermectin)이 코로나19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설(說)부터 아연·비타민D·소금물심지어 표백제가 코로나19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주장까지, 오만 억측이 코로나19 만큼이나 창궐했다. 공포는 괴담의 산실. 진(眞)과 위(僞), 이성과 미신, 정보와 유언비어 사이의 벽을 가볍게 허문다.

그래서 코로나19와 비만의 상관관계를 접했을 때 또 다른 낭설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비만은 “코로나19 감염 위험이 2~3배로 늘어난다(CNN, 2021년)”, “백신 효과가 현저히 떨어진다(가디언, 2021년)”, “증상이 더 심각해지고 사망률도 높아진다(CDC, 2021년)”는 경고의 강도는 점점 높아만 갔다. 여기에 가세한 것은 팬데믹 기간 중 재택근무, 외부 활동 위축, 배달 음식 급증으로 과체중과 비만이 세계적으로 늘었다는 외신 기사들이었다.

이들 뉴스의 공통점은 비만이야말로 코로나19 사태보다 더 본원적인 의료 재앙이라는 긴장된 어조였다. 정말 그럴까. 평소 비만에 대한 경고를 신체 강박증의 부산물쯤으로 여긴 것이 거대한 오판이었다는 말일까. 비만이든 하위급인 과체중이든 신체 투입 열량과 발산 열량 차이에서 발생하는 칼로리 ‘흑자’ 정도로 여겨서는 큰 봉변이라도 겪게 되는 것일까.
우량과 비만 사이
사실 비만이란 용어에 긴장감이 응축된 것도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니다. 요즘 기준상 비만으로 인식되는 체형 소지자를 대할 때 이전에는 ”건강해 보인다”, “후덕해 보인다”, “성격 좋아 보인다”며 덕담을 건내곤 했으니 말이다. 역으로 ‘삐쩍 마른’ 체구를 ‘복쪼가리’ 없어 보인다며 질타와 경계의 태도로 대하기 일쑤였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선풍적 인기를 누렸던 우량아 선발 대회를 떠올려 본다. 턱·목·허벅지에 오동통한 살이 붙은 영·유아에게 온갖 관심과 축복이 쏟아지던 시절이다. “복스럽다”, “실하게 생겼다”, “튼튼하게 보인다”, 심지어 남아(男兒)에게는 “장군감이다”는 상투적 칭송이 따르던 시절. 말이 좋아 ‘우량’이지 사실상 몸무게가 절대적 기준치였다. 몸무게가 건강의 척도였고 살의 양과 복의 함량이 비례한다고 여기던 시절.
1965년 우량아 선발대회 / 자료 = 연합뉴스
1965년 우량아 선발대회 / 자료 = 연합뉴스
1972년 남양분유 표지에 등장한 우량아 모델 / 자료 = 연합뉴스
1972년 남양분유 표지에 등장한 우량아 모델 / 자료 = 연합뉴스
그 사이 강산이 변했고 인식의 대반전이 일어났다. 당시 기준으로 우량아를 요즘 말로 바꾸면 비만 영·유아가 된다. 비만은 ‘영양 장애’라는 가벼운 오명을 넘어 전미의사협회를 비롯한 유력 단체에 의해 만성 질병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래서 유복함의 상징이자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우량함이 경계와 염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건강의 상징에서 질병의 징후로, 복(福)의 표상에서 화(禍)의 조짐으로 둔갑한 것이다.

같은 사물과 현상을 두고 정반대 해석이 발생할 만큼 물질 조건이 변했다. 물질 조건의 변동은 의식과 가치의 변화를 수반한다. 빈곤했던 과거 ‘우량함’은 풍요에 대한 염원이 투영된 심리적 기호였다. 하지만 과학적 의료 담론이 독주하는 현대에서 잔뜩 먹고 배를 두드린다는 함포고복(含哺鼓腹)의 이미지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빈국에서 부국으로 성장한 우리 사회는 결핍에 대한 공포보다 과잉에 대한 우려가 더 커진 때문이다.

하지만 비만에 대한 세계적 공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어딘가 석연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 단순 칼로리 과잉 혹은 영양 불균형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문제를 팬데믹이란 살벌한 명칭과 함께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물론 세계보건기구(WHO)까지 나서 심란한 경보를 연일 반복하니 말이다.

게다가 지구상에 아직 7억~8억20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다는 2021년 유엔 리포트를 접하고 나니 몸속에 있는 지방 덩어리 초과분에 대한 상념이 무척이나 복잡해지고 말았다. 누군가는 결핍의 고통을, 또 누군가는 과잉의 멍에를, 누군가는 기초 열량 확보를 위해 쓰레기더미를 뒤지고, 또 누군가는 잉여 열량 배출을 위해 트레드밀(treadmill) 위를 뛰어다니는 부조리….
새로운 빈곤으로서의 비만
그래서 비만에 대한 ‘글로벌 침소봉대’에 대한 정서적 이격감을 해소하기 위해 두 가지 질문을 던져 보기로 했다. 첫째 질문, “비만은 정말로 재앙적일까.” 이에 대해서는 <표1>을 참조하면서 각자 판단할 수 있을 듯하다.
또 하나의 팬데믹, 비만…괴담과 통계 사이[몸의 정치경제학]
코로나19 사태는 일시적 대유행병으로 점차 잦아들고 있는 반면 비만은 지속적 증가 추세에 놓여 있다고 하니 비만에 대한 세계적 경각심을 요란한 토끼몰이쯤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둘째 질문, “비만은 정말로 풍요의 재앙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조사 보고가 압도한다. 통계상(성인보다 아동 비만 통계가 새로운 경향과 미래 예측에 더 실효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아동 과체중·비만의 사례에 집중한다) 십수 년 전만 해도 비만 아동의 다수는 상위 소득 국가에서, 반대로 결식과 영양실조 아동의 다수는 하위 소득 국가에서 나왔다. 그래서 비만과 당뇨는 부자병이고 풍요의 재앙이라는 공식이 성립됐다.

하지만 그 공식이 깨지고 말았다. 예를 들어 보자. 1990년 기준 5세 미만 과체중·비만 아동은 3200만 명 수준이었지만 2016년에는 4100만 명으로 약 26% 증가했다. 중하위 경제 인구 대국에서 과체중·비만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1990년 기준 과체중 아동 비율이 세계 최저 수준인 1% 미만이었지만 2016년 기준 10%에 육박한다. 같은 기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3.3%에서 24.8%로 치솟았다. 26년 사이 750%, 매년 평균 28% 증가세를 보인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개발 부상국에서는 저체중과 과체중이 동시에 늘어났다는 것이다. 저체중과 과체중·비만은 상반된 문제로 인식될 수 있지만 양측 모두 영양 불균형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인도는 이 양가적 트랜드를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사례다. BBC는 지난해 7월 29일 기아·영양 부족·저체중 아동이 제일 많은 나라인 인도가 2030년께 세계 최대 비만 아동국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전 세계 비만 아동 2700만 명 중 10%가 인도에서 나온다는 예측이다.

중저소득 국가 내에서 과체중과 비만이 급증한 것만큼 상위 소득국 내 저소득 가정 아동들에게서 유사한 현상이 확인된다. 예컨대 북미 지역에서는 흑인·히스패닉 등 소수 인종 그룹 내 저소득 층에서 과체중과 비만 증가율이 두드러졌다. 결국 비만·과체중=선진국형 영양 과잉이라는 공식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디지털 문명이 양산한 신(新)결핍, 값싼 가공식품이 제조해 낸 신(新)빈곤이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비만의 아이러니
2022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과체중·비만 아동이 저체중 아동 수를 앞지를 것이라고 예측했던 랜싯(Lancet) 리포트는 아동 신체의 과도한 체지방 누적은 디지털 기기에 점착된 생활과 고열량·저영양 섭생에 기인한다고 진단한다(2017년 발간). 2022년 11월 발간된 WHO 보고서도 역시 필수 영양소 대신 지방과 당분 과다 함유 가공식품의 세계적 유통을 과체중·비만의 주요 배후로 지목한다.

다시 말해 아동들의 비만은 특정 형태의 영양 결핍(의학적 용어로는 영양 장애)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체중과 과체중이 상반된 현상이 아니라 동일 요인의 상이한 표출이란 해석도 가능해진다. 마치 물이 수증기나 얼음으로 외관상 변화를 갖지만 본질적 구성은 동일한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비만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리고 이 아이러니를 통해 비만을(특히 아동의 경우) 풍요의 재앙이 아닌 ‘신(新)빈곤’ 또는 ‘위장된 결핍’으로 재정의할 근거가 확보된다.

기아와 빈곤 아동 구호의 최전선에 서 있던 유니세프(UNICEF)가 돌연 비만 문제에 몰두하는 이유가 잘 설명되는 지점이다. 전 세계 50개 이상의 지역과 비만 관련 단체로 구성된 세계비만연맹(World Obesity Federation)이 결성된 것도, 세계 비만의 날(World Obesity Day)이 지정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지금까지 비만의 잠재적 재앙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기술했다. 이쯤에서 슬며시 어깃장을 놓아 보겠다. WHO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매년 470만 명이 과체중과 비만으로 사망한다고 한다. 이는 2019년 기준 전체 사망의 8%에 해당한다. 같은 시기 암으로 인한 사망이 950만 명이었으니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셈이다.

그런데 좀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어떤 의료적 상황이면 과체중과 비만을 사망의 직접 요인으로 특정할 수 있는 것일까. 비전문가인 필자로서는 그림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비만이 간·신장·당뇨·심혈관 질환·관절 질환에 치명적이라는 것은 미세먼지가 생명까지도 위협할 수 있다는 경고와 어떤 본질적 차이를 지닐까. 간접 연루도 아니고 명백한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은 너무 과한 누명 아닐까.

비만이 인류 보건 의료에 안길 충격파는 인정되지만 그 위기의식에 접속하고 정서적으로 공감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반공주의에 버금가는 건강 공포 통치에 이미 신물이 난 탓이다.

최정봉 전 NYU 영화이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