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지만 쭉쭉 뻗어나가는 그 느낌…과거 그대로 아닌 ‘리스타일링’ 필요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포스터 / 자료=에스엠지홀딩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포스터 / 자료=에스엠지홀딩스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너에게 가고 있어.”
요즘들어 오랜만에 이 노래를 듣거나 흥얼거린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가수 박상민이 부른 ‘너에게로 가는 길’이란 노래다. 1998~1999년 SBS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의 주제곡이었다. 지난달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되며 이 노래와 애니메이션은 대중에게 다시 소환됐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27년 전 완결된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한국 박스 오피스 1위에 올랐고 누적 관객 수 300만 명을 돌파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본 후 더욱 분주해졌다. 집에 돌아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서 과거 애니메이션을 찾아 보는가 하면 ‘너에게로 가는 길’을 들었다. 인기에 힘입어 영화 상영 직후 다함께 이 노래를 부르는 ‘싱어롱(sing-along)’ 행사가 열렸고 전석 매진됐다. 1990~1996년 연재됐던 원작 만화는 한국에서 100만 부가 팔렸다. 팝업스토어엔 굿즈를 사려는 사람들이 새벽부터 긴 줄을 섰다.

수십 년 전 작품이 다시 살아나 이토록 폭발적인 인기를 얻다니 놀랍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과연 콘텐츠의 수명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시시각각 콘텐츠가 쏟아지고 요즘, 그 수명은 이전에 비해 훨씬 짧아졌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상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타이타닉’, ‘탑건 : 매버릭’ 등 오랫동안 가슴 한쪽에 묻어 놓았던 작품들이 속속 부활해 새로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젠 많은 팬들이 벅찬 마음으로 기다린다. 이 작품들이 또 언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올지, 다시 소환될 다른 작품들은 무엇일지 기대하며….투박하지만 심장을 두드리는 직감적 콘텐츠
물론 옛 작품이 나온 게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의 ‘복고’ 열풍과는 양상이 다르다. 한두 편의 작품이나 아티스트가 나와 반짝 인기를 얻고 다시 사라지는 수준이 아니다.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작품들이 잇달아 나오고 이 중 다수가 뛰어난 흥행 성적을 거두고 있다. 지난해 개봉돼 큰 인기를 얻은 ‘탑건 : 매버릭’은 36년 만에, ‘아바타 : 물의 길’은 13년 만에 돌아온 속편이었다. 두 작품은 각각 817만 명, 1068만 명에 달하는 관객을 동원했다. 과거 콘텐츠의 흥행에 비슷한 시기 개봉된 신작들은 쓰라린 참패를 당했다. 리마스터링 과정을 거쳐 25년 만에 재개봉된 ‘타이타닉’도 마찬가지다. 2월 8일 개봉되자마자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이어 박스 오피스 2위에 올랐다.

이변이 속출하자 콘텐츠 시장엔 새로운 공식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급변하는 콘텐츠 시장의 승기를 잡기 위해선 과거 명작의 지식재산권(IP)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23년 콘텐츠 산업 전망’의 주요 키워드로 ‘콘고지신’을 꼽았을 정도다. 사자성어 ‘온고지신’과 ‘콘텐츠’를 합친 말로, 과거의 콘텐츠를 활용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왜 다 지나간 이야기를 다시 찾고 좋아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반응하는 과거 콘텐츠엔 공통점이 있다. 다소 촌스럽지만 직감적인 표현들로 심장을 세차게 두드린다. ‘탑건 : 매버릭’에선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톰 크루즈가 멋지게 머리를 휘날리며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고 전투기로 창공을 가로지른다. “파일럿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얘기엔 “언젠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며 통쾌한 한 방을 날린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도 비슷한 감성의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강백호가 오른손으로 완벽한 슛을 쏘기 위해 오른손에 힘을 집중하며 “왼손은 거들 뿐”이라고 하는 말은 약간 오글거려도 미소를 짓게 한다. 안하수 감독의 “포기하면 그 순간이 시합 종료”라는 얘기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이야기지만 깊이 각인된다.

만약 이 영화들이 과거 작품을 활용한 게 아니라 아예 신작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미 제작 단계에서 보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표현들로 다듬어졌을 것이다. 나아가 더 독특하고 파격적인 설정이 가미됐을 수 있다. ‘새롭지 않으면 무용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콘텐츠업계의 분위기에서 많은 창작자들이 ‘달라야만 살아남는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이 대중은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됐다. 조금은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시원하게 쭉쭉 뻗어가며 가슴속을 파고드는 콘텐츠를 말이다.
관건은 정교한 리스타일링 전략
신기한 점은 이 작품들을 본 적 없는 젊은 세대도 열광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옛날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본 30~40대뿐만 아니라 10~20대도 이 작품에 빠져들고 있다. 스스로를 ‘슬친자(슬램덩크에 미친 사람)’라 칭하며 부모·삼촌·이모와 함께 다시 이전 작품들을 찾아보는 것은 물론 굿즈를 사기 위한 줄 서기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탑건 : 매버릭’, ‘타이타닉’, ‘아바타 : 물의 길’ 등이 흥행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세대에 걸쳐 사랑받은 덕분이다.

젊은 세대 역시 이처럼 새롭게 마주한 과거 작품들을 통해 묘한 감성에 눈을 뜨고 있다. 이 세대들은 감정을 포장하는 데 길들어져 왔다. 감정이 생기거나 미련이 있어도 쿨한 척해야 했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세련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창작자들도 콘텐츠 시장의 핵심 이용자가 된 이들을 사로잡으려면 더욱 세련되고 감각적인 작품을 선보여야만 했다. 그런데 오히려 과거 콘텐츠의 직설적인 화법과 표현이 10~20대에게 더욱 신선하게 다가가는 열쇠가 됐다. 이에 따라 앞으로 콘텐츠의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는 더욱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부모 세대의 가슴속에 심어진 추억이 이전돼 새로운 세대의 마음에 싹을 틔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든 과거 작품이 다 성공할 수는 없다. 차별화된 ‘리스타일(restyle)’ 전략을 정교하게 세운 작품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북산고 5인방 중 가장 눈에 띄지 않았던 송태섭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 영화가 흥행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강백호·정대만·서태웅 같은 기존에 인기가 많은 캐릭터를 적극 활용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익숙함보다 참신함을 선택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가장 멀어진 캐릭터를 활용했다. 그 선택에 대한 설득력도 충분히 갖췄다. 송태섭은 농구 선수들 중 키가 작지만 실력으로 이를 극복해 나가는 인물이다. 친형을 잃은 깊은 슬픔,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친형 대신 살아있다는 죄책감도 갖고 있다. 영화는 송태섭을 통해 오늘날 젊은 세대가 가진 불안을 위로한다. 그리고 그의 성장을 보여주며 작은 희망을 선사한다.

기술적인 면에선 조화로움을 내세웠다. 이 작품은 만화를 3D 영화로 재탄생시킨 것이지만 일반 3D 영화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원작의 2D 그림에 오늘날의 3D 컴퓨터그래픽(CG)을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중 과거 회상 장면에 해당하는 부분들은 2D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 덕분에 만화책에서 보던 그림체와 감성까지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예전부터 “불황엔 복고가 유행한다”는 분석이 있었다. 힘든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 위로받기 위해, 콘텐츠나 상품 등을 통해 과거의 추억을 복기하며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다. 물론 현재도 경기 침체 상황과 맞물려 과거 콘텐츠가 또 한 번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을 즐기는 관객들의 심리는 그렇지 않다. 현재 사는 게 힘들고 지쳐서도 아니고 ‘노스탤지어(향수)’를 통해 심적 도피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자신을 일깨우는 콘텐츠들이기에 더 강렬히 끌리고 원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며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이 시대의 화두를 다시 한 번 떠올리지 않았던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강백호가 안한수 감독에게 하던 말이 떠오른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난 지금입니다!” 다시 찾아온 콘텐츠를 통해 관객들이 소환한 영광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과거가 아닌, 지금 빛나는 이 순간이 곧 영광의 시대다.

김희경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