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사수와 일을 함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겼습니다. 제가 존경했던 사수는 실제 함께 일해 보니 후배에게 많은 일을 떠맡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일은 원래 각자 하는 일이 많은 편인데 사수는 늘 공동 작업을 하기를 바랐습니다. 전날 팀장도 지시하지 않은 기획안을 짜라고 했고 기획안을 올리면 그 통과된 기획으로 공동의 작업물을 만들어야 했는데 사수는 마지막에 약간의 손만 보는 정도로 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해내는데 저는 어쩐지 두 사람의 몫을 해야하는 것같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후배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몇 개월씩 지속되자 본인의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잘해줄 때도 많았습니다.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알려 주기도 하고 일 외에는 웃으면서 고민 상담도 들어 줬습니다. 그 사람이 나쁜 것인지, 아니면 제가 약해 빠진 것인지 모르는 나날들이 계속됐습니다.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 당시 남자 친구한테 매일같이 사수의 욕을 했습니다. 남자 친구가 유일한 제 해우소같은 역할을 했는데 최근 전 회사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수가 후배들에게 갑질하는 것으로 유명했다면서 위로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실을 알고 나니 분노가 더 차오릅니다. 누군가와 싸우거나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을 최대한 피해 오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인간관계로 힘든 것이 너무나도 크게 다가옵니다. 저는 성격이 원만하다는 평을 듣기는 하지만 사실은 눈치를 많이 봅니다. 아빠가 언어적 폭력을 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늘 눈치를 본 게 성격이 된 것 같습니다. 미움 받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타입 같고 비난 받거나 욕먹는 행동을 하는 것을 정말 싫어합니다.
회사일도, 개인적인 일도 모든 게 다 어그러진다는 느낌이 들어 돌파구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로 서른이 됐는데 누군가는 삶을 완성해 가는데 저는 뭘 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A. 안녕하세요, 소연(가명) 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지금 몸과 마음은 괜찮을지 걱정이 됩니다. 용기 내 사연을 보내 줘 고맙습니다.
편지 속에 언급되는 소연 님의 사수는 업무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굉장히 착취적인 사람 같습니다. 그는 직속 사수로서 일을 가르쳐 주고 매니징하는 위치를 이용해 교묘하게 소연 님에게 일 전체를 떠넘기고 성과를 빼앗으며 본인의 업무도 전가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연락해 소연 님을 구인하고 고민 상담도 해주고 둘만 있을 때 업무 지시를 해 소연 님이나 남들이 보기에 매우 긴밀하고 배타적인 선후배 한 팀으로 보이게 하면서 소연 님을 다른 직원들에게서 고립시키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소연 님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화내고 비난하면서 정서적으로 옴짝달짝하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그는 ‘본인의 욕심이나 계획은 일을 잘 하기 위한 것이니 이를 위해서는 어떤 것도 해도 괜찮다’는 자의적인 고집을 보이는, 나르시시스틱하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에요.
그에 반해 소연 님은 타인에게 싫은 소리를 잘 하지 못 하고 누군가와 대립하거나 갈등이 불거지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분입니다. 그러니 사수의 독점적이고 집요한 지시와 부당한 정서적 조종에 대항할 엄두를 내기도 어려웠을 거예요.
이런 착취적 관계 속에서 소연 님은 갖고 있던 다정함과 의욕을 잃어 버리고 지첬을 것입니다. 과거에 다혈질인 아버지의 감정적 온도를 살피며 집에서도 편하지 않았던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좋다가도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가 무섭고 싫었지만 그러면서도 소연 님은 양육자인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나르시시스트, 본인의 감정이 타인들의 감정보다 더 중요한 정서적 포식자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져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아버지와 닮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더 나은 관계를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소연 님이 느꼈던 숨막히는 느낌, 답답함 그리고 어른인 아버지를 어린이인 자신이 설득하거나 자제시킬 수 없는 데서 오는 무력감과 분노를 사수를 떠올릴 때 유사하게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무력감입니다. 웬만큼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자신의 어려움을 얘기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력감과 내밀한 고통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가족처럼 느껴질 정도의 친밀감이 있는 남자 친구 외에는 누구에게도 사수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렇게 분산되지 못한 호소는 결국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서 집중적으로 표출되면서 둘만의 관계 발전에 해를 끼쳤을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상사와의 갈등을 회사 안에서 상의하고 해결하면서 사내 의사 소통을 연습할 기회도 갖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럼에도 용기를 내 옛 회사의 선배에게 호소하고 사수의 과거 평판에 대해 들은 것은 좋은 시도였습니다. 후련하기도 했을 것이고 상황을 명확히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갖게 되는 수확도 있었어요. 선배와의 대화 이후 사수가 후배들을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고 마음의 상처를 달래야겠다는 소연 님의 생각에 자신감이 붙은 듯합니다.
그럼에도 소연 님 마음의 어떤 부분은 여전히 ‘나는 누군가와 다투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나는 누군가의 미움을 받지 않을 거야’라는 불안에 갇혀 있습니다. 소연 님의 애착 트라우마는 꽤 크고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성인이 돼 어린 시절의 정서적 고통에 대한 충분한 객관화와 회복이 된 것이 아니라면 이때 자신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상처받았을지 또 무엇에 대한 기준이 교란되거나 훼손됐을지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연 님의 정서적 현실에서는 ‘자신의 의견과 기준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곧 누군가와 직간접적으로 부딪치고 대립할 수 있는 리스크라고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을 잘 해왔으면서도 자신에게 잘 맞는 소통 스타일, 상사 타입, 허용하기 어려운 개인 영역 침범 등에 대한 기준이 뚜렷하게 잡혀 있지 않은 듯해요. 이는 이직 과정에서의 비합리적이거나 충동적인 결정으로 이어집니다.
C 회사로 이직 시 소연 님은 관계 불안이 높은 본인에게는 회사의 심리적 안전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B 회사로 이직 시에도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판단하기보다 전 상사의 요청이라는 명분으로 본인의 결정이라는 부담 없이 C 회사를 떠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소연 님, 자신의 뚜렷한 생각과 욕구를 나타내기 힘들어 권위 있고 단호한 누군가의 의견 뒤에 숨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패턴이 지속되다 보면 자신은 어느새 가장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포식자에게 의존하며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소연 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싶다고 했지요. 믿었던 사람이 발등을 찍은 것 같고요. 부상당한 사자는 자신만의 안전한 굴에 들어가 천천히 상처를 핥습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유독한 관계와 환경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안전한 환경 안에 옮겨 보는 겁니다. 착취자가 있는 환경에서는 어떻든 부상이 깊어질 뿐입니다. 나쁜 관계 속에서 일하다 지친 소연 님은 애쓴 사람이자 피해자일 뿐이지 호구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심리 상담 등을 통해 트라우마에 대한 인식을 갖고 정서적 지지를 충분히 받으며 회복을 시작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조금 힘이 나면 친구나 회사 동료, 업계 친구 등 조금 덜 친밀한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공유하고 조언을 구하는 시도를 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직한다면 어떤 분위기의 회사로 가고 싶은지 명확히 하고 온보딩 과정에서 요청도 하면서 새로운 일의 느낌을 만들어 가면 좋겠어요.
사회 초년생으로서 인정과 예쁨을 받기 위해, 아니 미움 받지 않기 위해 일하던 시기에서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자기 정체성으로 마음의 무게 중심을 이동해 갈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의 세계를 세우는 것이죠. 이 과정은 물론 어렵고 힘도 들고 분명히 값을 치러야 하지만 자기만의 삶이라는 값진 땅입니다. 자신의 땅을 지키며 싸우는 법 또한 조금씩 익혀 가길 바랍니다. 약소국이라고 해서 인접한 강대국과 싸우지 않기 위해 침범을 계속 허용하면 결국 식민지가 되고 맙니다.
어떤 일을 하고 본인이 무엇을 잘하는지 그리고 이직을 한다면 어떤 업무를 하는 곳에 가고 싶은지, 일이라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 생계 이상의 어떤 의미인지 하나씩 찾아보면 좋겠어요. 일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자기 욕구에 대한 자기 결정권과 표현권을 확립해 가길 바랍니다.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경비즈니스는 ‘안주연의 다시, 연결’을 연재하며 독자에게 상담 편지를 받고자 합니다. 직장인 마음 상담을 주제로 다양한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대표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 직접 답하겠습니다. 하단 링크로 직접 사연을 작성하거나, poof34@hankyung.com으로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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