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철공소 사이에 들어선 작은 휴식처, 아케이드 서울
문래역 7번 출입구에서 도보로 3분, ‘요즘 것’임이 확실한 대형마트와 아파트 단지 뒤로 정반대의 세상이 펼쳐진다. 예술가들의 마을 문래창작촌이다. 세월이 켜켜이 쌓인 오래된 상가와 철공소. 곳곳에 혼재하는 예술가의 공방들과 뉴트로(new+retro) 콘셉트의 카페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듯한 착각이 밀려온다.창작촌 초입에 익숙한 듯 새로운 공간이 들어섰다. 깊은 먹물색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높은 층고의 채광창을 통해 떨어지는 은은한 빛이 가장 먼저 반겨주고 이내 한 가지 궁금증이 피어오른다. ‘도대체 뭐 하는 곳이야.’ ‘철컹철컹’ 문래동 이야기과거 문래동을 먹여 살린 것은 섬유 산업이다. 1930년대부터 동양방적·종연방적 등 굵직한 방적 공장이 밀집해 성황을 이뤘다. 이 때문에 실을 뽑는 ‘물레’에서 문래동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과 문익점의 목화 전래지라는 뜻에서 문래동으로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력하다.
1960년대에는 철공 단지가 대규모로 들어섰다. 금속 가공법인 시어링(shearing)에서 이름을 따 ‘샤링 골목’이라고 불릴 정도로 철강 산업의 호황기를 누렸지만 1990년대 이후 금속 제조업이 침체하며 소규모 철공소만이 겨우 이곳의 명맥을 이어 갔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 텅 빈 문래동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찾아왔다. 작업 공간이 필요한 젊은 예술가들이 임대료가 저렴한 문래에 몰렸고 철공소 골목 사이사이 공방·갤러리·공연장 등 작은 예술 공간이 들어섰다. 허름한 철공소에서 쏟아지는 쇳소리와 낡은 건물 한쪽에서 꽃피는 예술의 이질적 조화. 문래창작촌의 시작점이다. 경리단길·홍대앞·가로수길·을지로…. 개성 넘치는 소상공인 덕에 한때는 ‘힙한’ 동네로 여겨지던 곳들도 치솟는 임대료와 대기업·프랜차이즈의 공격적 입점을 견디지 못하고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희생양이 됐다. 반복되는 둥지 내몰림에 지친 도시인에게 다행히도 이곳, 문래동만은 아직 사람 냄새 나는 동네로 남아 있다. 건물주와 임차인을 대상으로 상생 협약을 체결하는 등 오랜 시간 터전을 지켜 온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 온 덕이다.아케이드 서울, 도시인들의 감각적 배회지“큐레이팅이라는 개념의 유행은 현대적 삶의 특징과 잘 부합한다. 우리는 아이디어의 재생산 원 데이터, 처리된 정보, 이미지, 학문 지식, 다양한 재료와 제품을 매일 목격한다.”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는 큐레이팅(curating)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보살피다(cura)’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큐레이터는 본래 ‘문화·예술을 관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하지만 콘텐츠가 다양화하며 예술을 넘어 미디어·경제·생활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선정·수집하고 관리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커다란 단어’가 됐다. 아케이드 서울의 큐레이팅을 맡은 T.T.T.C도 이런 점에 주목했다. 2020년까지 운영한 아케이드 서울 홍대점은 19세기 파리의 명물이자 도심 속 문명인들의 산책로였던 아케이드에서 영감을 받았다.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은 독특한 쇼핑 공간으로, 4층은 카페와 전시 공간으로 구성됐다. 모든 공간엔 소나무·모래·도자기 등 자연적인 요소가 적재적소에 스며들었다.
올해 새롭게 문을 연 문래점 역시 공간 운영에 깃든 T.T.T.C의 철학을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첫 전시인 김선익 작가의 ‘임시 정원(Temporary Garden)’이 열리는 1층 전시장은 특정 콘텐츠가 뿌리내릴 수 없는 임시적인 공간으로 존재한다. 사람의 흔적이 묻어 나기 쉬운, 가장 가벼운 소재로 제작된 작품은 유동성을 더하고 어느 장소에서든 자신만의 임시 정원을 형성한다. 빛의 길이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을 관찰하는 재미도 있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은 작품을 그대로 관통하며 매 시각 다른 형상을 만들어 내고 그 자체로 온전한 조명이 된다. 아담한 경사로를 오르면 포스터·도록 등 전시를 그대로 함축해 놓은 굿즈를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사진 속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나무 모양의 디저트는 주말에만 한정 판매한다. 굿즈 숍을 지나 테라스로 나가면 아케이드와 벽을 공유한 철공소가 모습을 보인다. ‘철컹철컹’ ‘윙윙’ 쇠 써는 소리와 전시장에서 흘러나오는 BGM의 조화가 절묘하다.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집단의 공존을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4월 2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 이어 T.T.T.C는 또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큐레이팅, 큐레이션이라는 용어가 확장되는 시대다. 패션·브랜드·디자인·공연 등 다양한 콘텐츠와 함께 확장된 의미의 큐레이팅 실험을 이어 나가며 큐레이팅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 나가는 것, 그게 아케이드 서울의 목표다.”
박소윤 기자 sos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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