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혼렙’ 작가 사망 등 고된 노동 강도 수면 위…휴재 및 회차별 컷 수 표준계약서에 담겨

[비즈니스 포커스]
“웹툰도 만화”…법 개정 후 웹툰 작가 권리 논의 급물살
웹툰은 만화일까. 알쏭달쏭하던 웹툰 정의에 드디어 마침표가 찍혔다. 2월 27일 웹툰을 만화에 포함하고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 사용 확대를 장려하는 ‘만화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그간 사각지대에 놓였던 웹툰 작가들의 권리 확대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2000년 8월 8일 웹툰이란 용어가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뒤 23년 만이다.성장 뒤 그림자, 웹툰 산업의 이면 “웹툰은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용어로, 현재 세계 디지털 만화 시장을 선도하고 있지만 웹툰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 과정에서 현행 법률 체계가 산업의 수요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김승수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2년간 웹툰 산업 발전 과정의 이면에서 소외되고 있는 웹툰 작가와 종사자에게 주목했다. 촉박한 마감 일정 등으로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작가들이 늘어나는 등 열악한 작업 환경이 문제였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20 웹툰 작가 실태 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웹툰 작가 635명 중 84.4%가 과도한 작업으로 정신적·육체적 건강이 악화돼 웹툰 창작 활동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 밖에 응답자의 84.3%가 연재 마감 부담에 따른 작업 시간 부족을, 74%가 경제적 어려움을, 50.4%가 포털·플랫폼사와의 불공정 경험을 겪었고 2차 저작권 등 제작사에 유리한 일방적 계약을 당한 사례도 있었다고 답했다.

문제의 주된 원인은 표준계약서의 부재였다. 표준계약서는 특정 산업에서 공정한 계약을 체결하도록 계약 조건의 기준을 제시한 틀을 말한다.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활용해 불공정 관행을 해소하는 데 쓰인다.

웹툰이란 단어는 2000년 8월 8일 천리안이란 포털 사이트에서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과 만화·영어로 카툰(cartoon)을 딴 것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도입한 조어다. 쉽게 말하면 웹에서 즐기는 만화라는 뜻이다. K-웹툰이 부흥하면서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만화 형식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됐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2018년 웹툰의 정의에 대해 “웹에서 즐기는 만화라는 의미에서 웹툰이 만화의 하위 장르처럼 보이지만 그 전개와 구현 과정을 살펴보면 만화와는 변별되는 독립적인 제3의 장르적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며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만화와의 친연성을 보이면서 동시에 뚜렷한 차별성을 지향하는 이율배반적 장르가 웹툰”이라고 설명했다.

웹툰은 탄생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 산업으로 성장했다. 웹툰 플랫폼은 콘텐츠와 함께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지금도 미래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산업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웹툰 작가와 종사자들의 권익 보호와 창작 환경 개선은 성장의 그림자였다. 지난해 7월 23일 유명 판타지 장르 웹툰인 ‘나 혼자만 레벨업’의 작화를 담당한 장성락 작가가 사망했다. 향년 37세로 젊은 나이다. 작가의 제작사는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인해 우리의 곁을 떠났다”며 “고인께서는 평소 지병이 있었고 이로 인해 생긴 뇌출혈로 타계하셨다”고 밝혔다. 젊은 작가의 비보에 웹툰업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나 혼자만 레벨업’은 연재 종료 당시 글로벌 조회 수 142억 회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끈 작품이다. 2021년 11월 미국 만화책 판매량 7위에 오르며 ‘카카오페이지 최고 흥행작’이었다.

사단법인 웹툰협회는 젊은 작가의 비보를 계기로 작가들의 과중한 노동 강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시점이라고 목소리를 냈다. 협회는 성명서에서 “고인의 사인이 과중한 노동 강도에 의한 것이라고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고 여러 요인도 함께 있었겠지만 고인의 작업 환경이 매우 고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며 “비단 고인과 관련한 문제만이 아니더라도 실상을 따져 보면 업계가 형성해 온 살인적인 고강도 업무 환경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 문제를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로 파편화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웹툰의 퀼리티가 높아질수록 노동 환경이 열악해지고 있고 웹툰 작가는 소모품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웹툰은 그간 법상에서 만화의 하위 장르로도, 만화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2012년 ‘만화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만화진흥법)’이 제정됐지만 해당 법안에 웹툰의 정의가 따로 없어 만화와 달리 법적 사각지대에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내외 만화 시장과 웹툰업계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 같은 문제로 웹툰 산업은 유료·거대 플랫폼의 성장 아래 플랫폼사에 유리한 불공정 계약이 만연할 수밖에 없는 문제에 직면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표준계약서를 아는 웹툰 작가 5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표준계약서를 사용했다는 응답은 9.4%에 불과했다. 반면 표준계약서를 사용하지 않은 웹툰 작가들은 웹툰 플랫폼 업체에서 자체 양식을 제시해 표준계약서를 사용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김 의원은 “웹툰 작가들은 몇 년 전만 해도 작업 분량을 50컷으로 계약했지만 점점 증가해 현재 70컷으로 계약하는 추세”라며 “구두로 80컷 이상을 권유받기도 하며 에이전시의 피드백으로 컷 수가 추가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표준계약서도 플랫폼사에 유리하게 작성돼 있거나 표준계약서 자체가 완벽하지 않아 악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김 의원은 이 같은 문제를 모아 만화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은 웹툰의 정의 신설을 비롯해 작가의 창작 환경 개선, 교육 훈련 수당 지원, 표준계약서 사용 시 관련 재정 지원 우대 등 작가 권익 보호 관련 내용, 지역 균형 발전 및 만화 산업 기반 시설 조성, 만화 관련 융·복합 콘텐츠 산업 발전 등 만화 산업 발전에 관한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자료 제공 : 김승수 국민의힘 의원실
자료 제공 : 김승수 국민의힘 의원실
2월 27일에는 해당 법안이 국회 본회의 재석 185인 중 찬성 184인, 기권 1인으로 통과됐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개정안은 만화의 정의를 ‘하나 이상의 구획된 공간에 실물 또는 상상의 세계를 가공해 그림 또는 문자를 통해 표현한 저작물로서 유무형의 매체(디지털 매체 포함)에 그려진 것’으로 바꿔 웹툰을 만화에 포함했다. 또 ‘정보통신망을 통해 유통하기 위해 정보통신망에서 제작된 만화’로 웹툰의 정의를 신설했다. 그간 혼용됐던 만화와 웹툰을 구분한 것이다.

또한 개정안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를 제·개정할 때 관련 단체와 전문가의 의견을 듣도록 했고 표준계약서 사용을 권장할 수 있도록 했다. 표준계약서 사용을 확대하기 위해 만화 사업자와 관련 단체가 표준계약서를 사용할 경우 재정적인 지원 우대 근거도 추가했다. 만화 관련 문헌·작품 원고 같은 만화 자료를 수집·보존·관리하고 만화 산업 실태 조사를 할 수 있는 근거도 새로 만들어 기초 자료와 통계를 축적하는 제도적 기틀도 마련했다.

개정안 통과에 권창호 웹툰협회 사무국장은 “웹툰도 만화라는 법적 정의가 세워진 것이라 기본을 다시 세운 셈”이라며 “지원이나 진흥 사업을 할 때도 그 기반이 생겼다”고 환영했다. 권 국장은 웹툰의 정의가 신설됨에 따라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대체할 고유 식별 체계를 만들 수 있는 첫 단추를 끼운 셈이라고 평가했다.

표준계약서에 대해서는 “사용 권고 신설이 가장 큰 부분으로 표준계약서 진일보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다만 문체부가 내놓은 표준계약서 개정안에 대해 의견서를 낸 상태”라고 설명했다.표준계약서 손질 급물살 법 개정 후 웹툰 창작 노동자 단체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사항들이 담긴 새 표준계약서 손질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3월 7일 ‘웹툰 작가들의 노동 환경 실태와 건강 문제’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안미란 문체부 대중문화산업과장은 “작가들의 건강 문제가 매우 중요한 이슈라는 것을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다”며 “표준계약서 내에 휴재권과 분량 제한 조항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고 말했다.

현재 문체부가 준비하는 새로운 웹툰 분야 표준계약서 초안에는 50회 차 연재 시 반드시 2회는 휴재해야 한다는 내용과 회차별 최소·최대 분량 설정, 예술인 고용보험 관련 사업자 의무 등이 담겼다. 안 과장은 “서비스 제공업자는 조건 없는 휴재를 보장해야 한다”며 “저작권자가 휴재 의무를 준수하지 않는다면 서비스 제공업자가 미보장된 휴재 기간만큼 대상 저작물 연재를 중단하고 저작권자에게 휴재를 권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합의를 통해 무급 휴재권과 별도로 조건부 휴재, 유급 휴재도 설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초안에 담았다.

안 과장은 웹툰 창작자 단체에서 과로의 주요인으로 언급해 온 회차별 컷(분량) 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최소·최대 분량 설정을 표준계약서에 담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산 투명성 제고, 예술인 고용보험 관련 사업자 의무 추가 등의 내용도 새 표준계약서에 반영된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창작자 간담회와 전체 설명회를 거쳐 이 같은 내용의 새 표준계약서를 상반기에 고시할 예정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