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영역에 들어서다…성장하고 경쟁하고 도태되며 더 크게 ‘성장’할 것

SM엔터테인먼트의 아티스트들 / 자료=SM엔터테인먼트
SM엔터테인먼트의 아티스트들 / 자료=SM엔터테인먼트
‘카카오냐, 하이브냐.’ 이를 둘러싸고 한국 엔터테인먼트업계는 올 1분기 그 어느 때보다 격동적인 시간을 보냈다.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엔터)를 인수하기 위해 카카오와 하이브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업계 관계자들과 팬들은 한국의 주요 기업들이 참여한 대규모 인수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1997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로 한류 열풍이 시작된 이후 한국 엔터테인먼트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큰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한 기획사나 제작사를 인수하는 것은 업계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 인수전은 규모, 각 회사가 가진 의미 등 여러 면에서 달랐다. ‘K팝의 정통 강자’ SM엔터는 여전히 많은 아티스트를 확보하고 있고 막강한 팬덤을 자랑하고 있다. 이 회사를 두고 이미 빠르게 성장해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카카오와 하이브가 나란히 관심을 가지고 접전을 펼쳤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팽팽한 인수전이 펼쳐지자 그 배경과 효과를 두고 많은 분석이 나왔다. 그런데 그중 ‘K-컬처 정점론’이 있었다. 한류 열풍이 최고조에 다다랐고 그 뒤를 이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이다. 매물로 나온 SM엔터의 시장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물론 다른 기업들에서도 더 이상 초대형 아티스트와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K-컬처 열풍이 기로에 섰다는 얘기였다. 이번 인수전에 대해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대한 몸집을 키우고 다양한 아티스트와 지식재산권(IP)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정말 한류는 위기에 놓인 것일까. 이 인수전은 그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것일까.
◆판이 다른 글로벌 무대가 펼쳐졌다
한류의 위기를 걱정하는 의견에도 일리는 있다. 방탄소년단(BTS), ‘오징어 게임’과 같은 세계 1위를 차지할 만한 강력한 아티스트나 작품이 잘 보이지 않고 있다. 2020년대 들어 급격히 성장세를 보인 것에 비해서도 둔화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실제 하이브의 방시혁 의장은 미국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인수 참여 배경을 ‘K팝의 성장 둔화’라고 꼽기도 했다. 게다가 시장엔 경기 침체와 제작비 증가 등 다양한 불안 요인들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경각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둔화를 꼭 위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번 인수전 뒤엔 이미 한 단계 달라진 새로운 차원의 무대가 펼쳐져 있다. 기존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움직이던 업체들은 한정돼 있었다. CJ ENM 그리고 SM엔터‧JYP엔터‧YG엔터테인먼트 등 3대 기획사였다. 기업 수도 적었고 사업 환경도 열악했다. 하지만 이들 업체는 다양한 아티스트와 콘텐츠를 발굴하고 기획, 기대를 뛰어넘는 성과를 만들어 냈다.

그러자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무대가 열렸다. 규모 자체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엄청난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글로벌 시장이다. 처음엔 인기를 얻는 아티스트나 작품이 나와도 그 인기는 미미했다. 하지만 점차 확산돼 갔고 나중엔 폭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하이브와 같은 신규 플레이어들이 시장에 뛰어들어 기존 기업들과 차별화된 전략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영향도 컸다.

이전에 비해 수요가 급증하고 문화 산업이 그야말로 ‘돈 되는’ 산업으로 자리매김하자 더욱 다양한 일들이 벌어졌다. 카카오와 같은 정보기술(IT) 업체, 플랫폼 업체, 통신사 등도 이 시장에 관심을 보이며 속속 합류했다. 막대한 투자 자금도 유입되기 시작했다. 서로 앞다퉈 투자하기 시작했고 자금 조달과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 기업 간 합종연횡 사례도 늘어났다. 오직 한두 아티스트와 작품만이 인정받는 분위기도 바뀌기 시작했다. 이젠 한국 가수, 한국 작품이라고 하면 골고루 다양하게 관심을 받는다. 한국 콘텐츠를 상징하는 ‘K’가 명실상부한 하나의 장르가 된 것이다.

해외에서도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카카오가 이번 인수전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자회사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 등에서 1조2000억원에 달하는 투자금을 유치한 영향이 크다. 해외에서도 장기간 이어져 온 한류에 대한 신뢰가 형성 덕분에 거대 규모의 ‘오일 머니’가 유입될 수 있었다.

결국 이 인수전이 일어난 배경엔 ‘성장 둔화’에서 ‘둔화’보다 ‘성장’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의 판이 완전히 달라졌고 이 시장에 엄청난 돈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업들은 이에 힘입어 다른 기업과의 인수 또는 협업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재도약할 준비를 하게 됐다.
◆프리미엄 라벨을 품고 나아가는 K-엔터사
1957년 월트 디즈니가 남긴 메모 / 자료 = 월트디즈니
1957년 월트 디즈니가 남긴 메모 / 자료 = 월트디즈니
한국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의 체급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러다 보니 위기를 걱정하는 쪽에선 기업들의 보폭이 과거에 비해 작아지고 발걸음엔 무게가 보다 실리게 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퇴보가 아닌 더 큰 발전을 위한 걸음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은 앞으로도 정체되지 않기 위해 더욱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펼쳐진 인수전은 다시 한 번 체급을 향상시키기 위한 중요한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각종 스포츠뿐만 아니라 시장에서도 중요한 전략에 해당한다. 더 크고 강한 상대와 싸우며 다시 실력을 재정비하고 키워 나가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강자로 거듭날 수 있다.

몸집 키우기만이 전부가 아니다. 이번 인수전은 글로벌 사업 확장에 필요한 시스템과 다양한 노하우를 접목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SM엔터는 H.O.T부터 보아·동방신기·엑소·에스파에 이르기까지 K팝의 대표 아티스트를 발굴해 왔다. 그만큼 오랜 세월 한류 열풍을 만들어 낸 다양한 노하우와 업력을 갖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SM엔터는 공연·음반 등에서 나아가 각종 관련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막강한 팬덤 기반의 플랫폼을 활용해 다양한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이를 접목해 막강한 시너지를 내기 위해 그토록 치열한 인수전이 펼쳐졌던 것이다.

문득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디즈니가 떠오른다. 디즈니의 창업자 월트 디즈니가 남긴 메모는 오늘날까지도 유명하다. 이 메모는 디즈니가 콘텐츠를 기반으로 TV·음악·테마파크·라이선싱 등 각종 사업으로 확장해 나가는 방안을 구상한 전략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후 다양한 협업과 인수 등을 통해 꿈을 현실화했다.

월트 디즈니가 메모를 적었던 해는 1957년이었다. 디즈니가 1950년대 초부터 ‘신데렐라’ 등 동화 기반의 애니메이션들이 잇달아 흥행에 성공하며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다. 고수들은 꾸준히 준비해 온 결과물이 활짝 꽃을 피울 때 기뻐하며 안주하지 않는다. 곧장 그다음 전성기를 꿈꾸며 또다시 고민하고 전략을 구상한다. 오랫동안 전 세계 시장을 움직여 온 글로벌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격변하는 시장에서 생존, 나아가 성장을 거듭한다는 것은 말처럼 결코 쉽지 않다. 낯설고도 큰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여러 한국 기업들이 ‘한국판 디즈니’를 목표로 삼고 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한참 남은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어렵긴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몸소 오랜 시간 부딪쳐 가며 성공의 방정식을 익혀 오지 않았던가.

얼마 전 BTS의 리더 RM이 스페인 매체 엘파이스와 진행한 인터뷰가 큰 화제가 됐다. RM은 “‘K’라는 수식어가 지겹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스포티파이(음원 플랫폼)가 우릴 전부 K팝이라고 부르는 게 지긋지긋할 수도 있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그건 ‘프리미엄 라벨’이다. 우리보다 먼저 길을 갔던 분들이 쟁취해 낸 품질을 보장하는 라벨 같은 것이다.” 이보다 한류를 잘 이해하고 소개하는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우리는 가슴에 프리미엄 라벨을 달고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그 라벨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기업의 치열한 고민과 노력, 이를 지켜보며 라벨에 대한 믿음과 응원을 보내는 수많은 글로벌 팬들이 있는 한 K-컬처 열풍은 계속된다.

김희경 한국경제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